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Ⅰ 자연과 풍토

Ⅰ 자연과 풍토 · 10 / 100

수평선이라는 경계

보이는 끝에서 이어지는 세계

The Boundary Called the Horizon

〈노송과 노인〉 · 1987 / The Old Pine and the Old Man
〈노송과 노인〉 · 1987FŪDO 079
흔들리는 수평선 / A Wavering Horizon · 2005
〈흔들리는 수평선〉 · 2005FŪDO 007

끝까지 이어지는 가는 선

〈노송과 노인〉(1987)의 수평선은 화면 위쪽에 가늘게 놓여 있다. 그 선에는 반쯤 드러난 해가 걸리고, 아래 오른편에는 작은 배가 있다. 전경의 나무와 사람을 보던 눈은 이 선을 따라 멀리 이동한다. 가까운 형상들 주위의 넓은 면도 그때 바다의 거리로 읽힌다. 선 하나가 다른 부분의 크기와 자리를 다시 느끼게 한다.

수평선 위와 아래는 전혀 다른 두 색으로 나뉘지 않는다. 비슷한 바탕색이 이어져도 가는 선과 작은 배의 배치가 공간을 구별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멀리 보게 하는 힘은 색의 대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형상의 크기와 높이, 그 사이에 남은 면의 넓이가 함께 작용한다.

이 선을 보며 우리는 세계가 저기에서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보이는 데까지가 저기라는 감각을 얻는다. 끝은 대상 자체의 끝이 아니라 보는 자리와 관계된다. 이 차이 때문에 수평선은 닫는 선이면서도 눈길을 그 너머로 보낼 수 있는 선이 된다.

담과 다른 경계

미국 해군천문대는 눈에 보이는 수평선을 하늘과 지표가 맞닿는 듯 보이는 경계로 설명한다. 바다 위에 실제로 그어진 검은 선을 찾아 배가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보는 위치가 바뀌면 보이는 범위도 달라진다. 그렇다고 수평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한꺼번에 다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속한다.

제6장의 돌담은 돌을 옮기고 쌓아 놓은 구조였다. 수평선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경계가 아니다. 담을 넘는 일에는 실제 높이와 재료가 있지만, 수평선을 넘는다는 말에는 지금 보이는 범위를 지나간다는 뜻이 있다. 둘을 함께 생각하면, 경계라는 한 단어 안에 서로 다른 경험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수평선도 실제 물감의 선이 된다. 눈앞의 선은 캔버스 위에 남아 있으면서, 저 멀리의 끝을 가리킨다. 가까이 볼 수 있는 자국으로 멀리 있는 듯한 경계를 만드는 것이다. 수평선의 회화적 힘은 이 두 거리가 겹치는 데 있다. 손이 남긴 가까운 선과 눈이 따라가는 먼 바다가 한 자리에서 만난다.

보이는 것의 둘레

현상학에서 말하는 지평은 바다 끝의 선만을 뜻하지 않는다. 후설의 지평 개념을 설명한 크리스티안 바이어의 글은, 하나의 사물을 볼 때 다른 자리에서 보일 모습도 함께 예상한다는 점을 짚는다. 지금 보이는 면이 그 사물의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는 그 면을 통해 하나의 사물을 본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이 현재의 경험을 둘러싼다.

이 개념은 그려진 수평선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비교의 길을 열어 준다. 그림의 가장자리에서 배가 더 이상 그려져 있지 않다고 해서 바다도 거기에서 끝난다고 보지는 않는다. 보이는 부분을 통해 그 바깥의 넓이를 느끼는 것이다. 화가는 모든 곳을 채우지 않고도, 화면이 자기 테두리보다 넓게 경험될 조건을 만들 수 있다.

다만 이 넓이는 아무 이야기나 넣을 수 있는 빈 공간과 다르다.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감각과, 그곳에 누가 기다리고 있다는 주장은 같지 않다. 작품을 보며 떠오른 그리움은 감상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그리움이 그림 속 인물의 실제 사연이라는 근거까지 주지는 않는다. 수평선은 미지의 자리를 열어 두면서도 그것을 대신 설명하지 않는다.

흐려진 선이 반드시 평온한 것은 아니다

〈흔들리는 수평선〉(2005)에서는 한 줄을 또렷하게 따라가기 어렵다. 밝고 어두운 붓자국들이 비스듬히 겹치고, 오른편의 큰 바위 형상이 화면 아래쪽으로 내려온다. 위쪽 먼 곳의 경계도 그 흐름 속에 있다. 하늘과 물의 구획을 단번에 정하기보다 흔들리는 면들을 따라가게 된다.

그렇다고 이 흐릿함이 평온한 합일을 뜻하지는 않는다. 붓자국의 속도감과 방향은 오히려 화면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경계가 약해지는 동안 움직임의 감각은 커질 수 있다. 수평선이 선명하면 갈등이고 사라지면 화해라는 도식은 이 그림 앞에서 멈춰야 한다. 같은 생략도 다른 획들과 만나면 다른 경험을 만든다.

오른편 위쪽에는 작은 사람과 말의 형상이 있다. 주위의 큰 면과 비교하면 그들이 몸을 둘 자리는 좁게 느껴진다. 이때 화면의 방향을 읽게 하는 것은 먼 수평선만이 아니다. 바위의 가장자리와 작은 몸들이 놓인 위치도 어디가 발붙일 곳인지 가늠하게 한다. 하나의 경계가 흐려져도 다른 단서들이 서로를 도우며 공간을 만든다.

〈노송과 노인〉의 가는 수평선과 이 흔들리는 경계를 나란히 보면, 다른 두 방식의 보기가 드러난다. 하나에서는 선을 따라 먼 곳을 짚고, 다른 하나에서는 그 선을 쉽게 붙잡지 못한 채 면의 흐름을 읽는다. 두 작품을 제작연도만으로 갈등에서 평정으로 가는 계단에 올려놓을 수는 없다. 그림마다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르다.

보는 사람의 자리

우리는 그림 속 노인과 같은 곳에 서 있지 않다. 노인의 몸과 그 몸 앞의 바다를 함께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작은 몸을 통해 바다의 크기를 느낀다. 그림은 인물의 눈을 그대로 빌려 주기보다, 인물과 세계의 관계를 우리 앞에 놓는다. 감상자는 그 관계에 가까워질 수 있지만 그 사람의 경험을 전부 가질 수는 없다.

이 거리는 감정을 막는 벽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다 알지 못한 채 가까이 보는 데 필요한 간격이다. 수평선을 바라보는 사람을 기다림의 형상으로 읽을 수는 있어도, 반드시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정할 필요는 없다. 바라봄 자체에 머물면 그 안에 쉼과 주의, 거리와 그리움이 함께 들어올 수 있다.

바다는 관람자에게는 바라볼 넓이이고, 그림 속 몸에게는 살아가야 할 조건으로 읽힐 수 있다. 두 자리는 완전히 같지 않다. 그 차이를 의식하면 넓은 풍경이 주는 감동도 조금 달라진다. 크고 아름답다는 느낌 곁에 그 공간 안에 있는 작은 몸을 잊지 않는 시선이 생긴다.

가장자리에서 다시 보는 일

수평선이 여는 것은 반드시 저 너머의 더 나은 세계는 아니다. 지금의 시야가 전부가 아니라는 여지다. 화가는 그 여지를 선명한 선으로도, 끊긴 흔적으로도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리는 양보다 보는 눈이 어디까지 가고 어디에서 머무는가다. 경계는 끝을 정하면서 시선의 다음 움직임도 준비한다.

돌담에서 수평선으로 시선을 옮기면 또 다른 경계를 만난다. 손으로 쌓은 담, 산을 남기는 윤곽, 해를 알아보게 하는 원, 나무와 사람을 구별하는 선. 이들은 모두 같은 뜻을 가진 선이 아니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몸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만든다. 풍토의 회화는 그 차이들을 하나의 설명으로 덮지 않고 함께 보게 한다.

가는 선 위에 해가 반쯤 걸려 있다. 그 아래 배는 작다. 눈은 선을 따라 화면 끝으로 갔다가, 물가의 사람에게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