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자연과 풍토 · 9 / 100
소나무의 인격
닮은 몸, 서로 다른 생
The Character of the Pine
나무와 사람이 놓인 방향
〈노송과 노인〉(1987)에는 큰 검은 수관과 가는 선으로 그린 몸이 있다. 나무의 잎과 가지가 이룬 덩어리는 왼쪽으로 길게 뻗고, 그 아래의 줄기는 굽어 있다. 오른편의 노인은 몸을 낮추고 있다. 둘을 함께 보면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 형상은 똑같이 기울지 않는다. 검은 덩어리와 가는 윤곽이 서로 다른 무게로 한 자리에 있다.
나무를 먼저 보면 사람은 작아 보인다. 사람을 먼저 보면 나무의 줄기가 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림은 어느 쪽만 주인공으로 고정하지 않는다. 눈이 오가는 동안 크기의 차이와 자세의 닮음이 번갈아 드러난다. 여기서 소나무의 인격을 말하는 것은 나무가 사람의 성격을 그대로 가진다고 선언하는 일과 다르다.
오히려 이 말은 보는 사람에게 질문을 돌린다. 우리는 어떤 선 앞에서 다른 생을 자기 몸과 닮았다고 느끼는가. 닮음을 느낀 뒤에도 서로 다른 존재를 구별해 볼 수 있는가. 소나무를 사람의 비유로 읽는 순간은 감상의 끝이 아니라, 그 비유가 무엇을 보이게 하고 무엇을 가리는지 살피는 시작이다.
풍상을 읽는 눈
굽은 줄기와 고르지 않은 수관을 보면 시간이 떠오른다. 곧게 뻗은 어린 가지와는 다른 생의 길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양만으로 몇 번의 태풍을 겪었는지, 나이가 몇 백 년인지 알 수는 없다. 그림은 나무의 생장 기록을 모두 제공하지 않는다. 오래됨을 느끼는 일과 오래된 연수를 세는 일은 다르다.
〈노송과 노인〉에서 시간의 감각은 표면의 주름을 많이 그렸기 때문에만 생기지 않는다. 넓고 짙은 수관을 받치는 두 줄의 굽은 윤곽, 그 곁에 놓인 작은 몸, 주변의 비어 있는 면이 함께 작용한다. 나무는 많은 세부로 설명되지 않지만 가볍게 지나쳐지지도 않는다. 단순한 형상에 눈이 오래 붙잡힌다.
이를 풍상의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아픔을 아름다움의 조건으로 만드는 일이다. 상처가 있어야 더 깊은 생이라는 판단은 그림 밖의 사람에게도 쉽게 옮겨 간다. 그러나 여기서 오래 볼 것은 고통의 양보다 남아 있는 형상이다. 손상이나 굽음이 있다는 이유로 그 존재의 가치를 줄이지 않는 눈에 가깝다.
나무는 우리에게 견딤을 생각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쓰러진 나무가 덜 성실했다는 뜻은 아니다. 기울어진 줄기가 살아남았다는 비유를 인간의 성패를 가르는 잣대로 삼지 않을 때, 이 그림의 연민은 더 넓어진다. 견디는 존재를 바라보되 견디지 못한 존재를 뒤에 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세한의 기억
소나무를 보며 오래된 문장을 떠올릴 수 있다. 『논어』 「자한」에는 추위가 닥친 뒤에야 송백이 더디 시듦을 안다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계절을 거친 뒤에 드러나는 차이다. 그것을 소나무는 어떤 조건에서도 상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바꿀 필요는 없다. 늦게 시든다는 관찰과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는 선언은 같지 않다.
김정희의 〈세한도〉(1844)를 함께 읽을 때에도 나무의 각도만 비교해서는 부족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작품을 제주 유배 중에도 한결같은 마음을 이어 준 이상적에게 감사하여 그린 그림으로 설명한다. 세한의 뜻에는 한 사람의 강인함만 아니라 관계를 끊지 않은 다른 사람의 행동이 들어 있다.
이 맥락은 변시지의 나무와 사람을 보는 데에도 새로운 길을 낸다. 곧은 나무는 선비의 지조이고 굽은 나무는 민중의 끈기라는 식으로 두 그림을 나누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어려운 조건 속에서 무엇이 곁에 남는지 물을 수 있다. 다만 두 작품 사이의 이런 비교는 직접적인 계승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을 넓히기 위한 대화다.
닮았다고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변시지의 그림을 보면 나무의 검은 수관은 노인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는다. 나무에는 줄기가 두 갈래의 긴 선으로 서 있고, 노인의 몸에는 짧게 굽은 선들이 모여 있다. 두 형상은 넓은 바탕을 공유하지만 각자 다른 크기와 방향을 가진다. 닮음은 그 차이를 없앤 뒤가 아니라 그 차이가 보이는 동안 생긴다.
노인에게 다가가는 시선은 나무 아래에 머물지만, 수관을 따라가는 시선은 왼편으로 뻗어 간다. 둘 사이의 빈 면도 어느 한쪽의 소유가 아니다. 나무와 사람이 같은 풍토에 있다는 것은 서로를 대신한다는 뜻보다, 서로 다른 몸이 같은 공간의 조건을 나눈다는 뜻에 가깝다. 함께 있음은 하나로 합쳐지는 일과 다르다.
이 차이를 남겨 두면 나무는 인간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서 조금 벗어난다. 사람을 닮았기 때문에만 볼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줄기가 휘고 가지가 퍼지는 그 나무의 형식도 남는다. 인간의 삶을 떠올리면서도 나무를 나무로 보려는 시선. 소나무의 인격은 그런 이중의 주의 속에서 더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자화상이라는 읽기의 범위
그림의 노송에서 화가 자신의 생애를 떠올리는 것은 가능하다. 어떤 독자는 귀환을, 어떤 독자는 오래 작업한 사람의 몸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소나무가 곧 변시지라는 문장으로 해석을 닫으면, 나무와 노인 사이에 벌어진 관계가 한 사람의 이야기로 좁아진다. 자화상이라는 읽기는 문을 열 수 있지만, 그 문만 남겨서는 안 된다.
인물의 자세를 작가의 심리로 곧장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이 어떤 날 무엇을 잃었는지는 화면에 적혀 있지 않다. 대신 낮춘 몸, 커다란 수관, 멀리 있는 배와 해가 보인다. 사람의 사연을 이미 안다고 생각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이 놓인 자리를 더 오래 살필 수 있다.
여백은 그 사연을 마음대로 채우라고 마련된 빈칸만도 아니다. 어느 정도는 알 수 없도록 남는 자리다. 우리는 노인의 마음을 다 알지 못해도 그 몸의 작음을 느낄 수 있고, 나무의 정확한 나이를 몰라도 그 형상에 머물 수 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감정을 약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때로는 다른 존재를 더 가까이 두게 한다.
곁에 남아 있는 형상
〈노송과 노인〉의 나무는 인물의 모든 외로움을 없애 주는 듯 보이지 않는다. 넓은 바탕은 여전히 그들을 둘러싼다. 그러나 사람 하나만 남은 화면과도 다르다. 시선이 멈출 자리가 나무에도 있고 사람에게도 있다. 한 형상을 오래 본 뒤 다른 형상으로 옮겨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이 곁의 관계를 만든다.
소나무의 인격을 굳센 정신 하나로 요약하지 않을 때, 그림에는 더 많은 몸이 들어올 수 있다. 오래 서 있는 몸, 잠시 숙인 몸, 다른 것에 기대야 하는 몸. 그림이 주는 것은 그 몸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견뎌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다. 서로 다른 자세를 한 화면에서 버리지 않고 보는 시간이다.
검은 수관은 왼쪽으로 뻗어 있다. 노인은 그 오른편에서 몸을 낮춘다. 둘 사이에 남은 밝은 면을 눈이 천천히 지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