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Ⅰ 자연과 풍토

Ⅰ 자연과 풍토 · 8 / 100

태양의 현상학

그려진 해와 화면의 밝음

The Phenomenology of the Sun

〈한라산〉 · 1987 / Hallasan
〈한라산〉 · 1987FŪDO 009
〈검은 태양〉 · 1985 / The Black Sun
〈검은 태양〉 · 1985FŪDO 070
〈노송과 노인〉 · 1987 / The Old Pine and the Old Man
〈노송과 노인〉 · 1987FŪDO 079

원 안이 비어 있는 해

〈한라산〉(1987)의 왼쪽 위에는 둥근 해가 있다. 검은 선으로 둘렀지만 안을 별도의 밝은 물감으로 채우지는 않았다. 원 안과 밖에 비슷한 바탕색이 이어진다. 주위의 짧은 획들이 이 형상을 해로 읽게 한다. 빛을 내는 사물을 그리기 위해 반드시 그 자리를 가장 밝게 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먼저 둥근 형상을 알아보고, 그다음 그 형상 때문에 주위의 색을 다시 본다. 해가 없는 바탕과 해가 놓인 하늘은 같은 색이라도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물감이 갑자기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작은 표시가 그것을 둘러싼 넓은 면을 읽는 방식을 바꾼 것이다. 태양은 그 면 위의 사물이면서 그 면을 해석하게 하는 단서다.

이 장에서 태양의 현상학이라 부르는 것은 태양의 궁극적인 뜻을 정하는 일이 아니다. 둥근 형상이 어디에 놓이고 무엇과 대비될 때 해로 보이는지, 그 해를 알아본 뒤 화면의 밝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피는 일이다. 태양을 미리 정해진 상징으로 읽기 전에,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이 짧은 과정을 따라가 보려 한다.

검은 해 아래의 밝은 바탕

〈검은 태양〉(1985)은 다른 출발점을 준다. 화면 위쪽에 어두운 원형이 있고, 그 주변에는 밝고 탁한 색의 붓자국들이 겹친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도 바탕의 밝음은 이어진다. 제목이 태양이라고 부르는 곳은 어둡지만 그림 전체가 밤처럼 검어진 것은 아니다. 태양의 색과 화면의 밝기가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검은 원은 주위의 밝음을 눈에 띄게 하고, 넓은 바탕은 검은 원의 무게를 더한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방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해를 검게 칠했다고 모든 빛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바탕이 밝다고 불안한 느낌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림의 밝고 어두움은 하나의 광원을 따라 정리되기보다 서로를 밀고 당기는 면과 획 속에서 생긴다.

작은 배의 형상도 이 밝은 면 안에 있다. 배가 어디를 향하는지는 화면만으로 결정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놓인 자리는 보인다. 검은 해 아래 왼편에 떨어져 있고, 그 주위로 흐르는 붓자국은 배의 크기보다 넓다. 해와 배를 함께 보면 화면의 위쪽도 비어 있는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작은 존재가 놓인 넓이가 된다.

여기서 검은 태양을 곧바로 죽음이나 일식의 기록으로 바꾸어 읽으면, 이미지는 너무 빨리 하나의 사건에 묶인다. 그림은 그런 연상을 허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연상이 가능하다는 것과 특정 사건이 그려졌다는 것은 다르다. 먼저 남는 것은 어두운 해가 밝은 바탕과 함께 있다는 긴장이다. 그 긴장을 풀지 않고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작은 형상이 바꾸는 넓이

〈한라산〉의 고리 같은 해와 〈검은 태양〉의 어두운 덩어리는 똑같은 기호가 아니다. 하나는 안쪽을 바탕에 열어 두고, 다른 하나는 주변보다 짙은 면을 만든다. 둥글다는 공통점보다 어떻게 그 원이 이루어졌는지가 중요해진다. 둘레와 안쪽을 다르게 처리하는 일만으로도, 시선이 머무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작다는 것도 그 자체로 겸손이나 약함을 뜻하지 않는다. 작지만 짙은 형상은 넓은 면에서 강하게 눈을 붙잡을 수 있다. 반대로 큰 형상도 주변의 색과 가까우면 천천히 드러난다. 태양의 중요성은 실제 우주에서의 크기를 그림에 줄여 옮긴 결과가 아니다. 화면 안에서 생기는 대비와 위치의 문제다.

제2장에서 마른 풀잎색을 화면을 이어 주는 바탕으로 읽었다면, 여기서는 그 바탕 위에 놓인 한 형상이 전체를 다시 읽게 하는 방식을 본다. 같은 색면도 어디에 둥근 획이 있는지에 따라 하늘이 되고, 공기가 되고, 빛이 머문 자리처럼 보인다. 색이 형상을 받쳐 주는 동안 형상도 색의 뜻을 바꾼다.

한낮과 저녁 사이

〈노송과 노인〉(1987)에서는 수평선에 걸친 반원과 그 위의 짧은 획들이 보인다. 이 배치는 해가 뜨거나 지는 때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한 장면만으로 두 방향 중 하나를 확정할 수는 없다. 같은 반원이 시작과 끝을 모두 연상시키는 까닭은 그림이 앞뒤의 시간을 보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여지는 결핍이라기보다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다. 우리는 노인의 몸과 먼 해를 번갈아 보면서 하루의 어느 지점인지를 생각한다. 그림이 시간을 정확히 알려 주지 않기 때문에, 해는 시계의 숫자처럼 읽히지 않는다. 몸이 가까이에 있고 해가 멀리 있다는 관계가 먼저 남는다.

해가 다시 뜬다는 말은 삶의 지속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이 그림 속 인물에게 반드시 위로가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또 하루는 기회일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노동일 수도 있다. 변시지의 해를 희망 하나로 부르지 않고 바라보면, 밝아오는 시간과 그 시간을 살아야 하는 몸 사이의 거리가 보인다.

형상보다 먼저 뜻을 정하지 않는다

태양을 생명의 기원으로 생각하거나 둥근 형상에서 순환을 떠올리는 것은 가능한 읽기다. 다만 그런 뜻을 모든 문화와 관람자가 똑같이 지닌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이 그림의 해가 어디에 있고 어떤 모양인지가 먼저다. 같은 둥근 형상도 날카로운 선들 사이에 있는지, 넓은 면에 홀로 놓였는지에 따라 다른 긴장을 만든다.

해가 흐릿하면 체험한 해이고 또렷하면 관찰한 해라는 구별도 성립하기 어렵다. 관찰과 체험은 나뉘어 작동하지 않으며, 또렷한 윤곽으로도 긴 기억을 그릴 수 있다. 검은 고리의 가장자리를 따라가는 눈 역시 하나의 경험을 한다. 해석을 깊게 만드는 것은 흐릿함이라는 조건보다 형상에 오래 주의를 두는 일이다.

그러므로 화면이 빛나는 듯하다는 인상을 사물 안에서 실제 빛이 나온다는 설명으로 바꾸지 않아야 한다. 내광이라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우선 그림에서 느껴지는 밝음의 성질을 가리키는 비평적 표현일 것이다. 물감의 물리적 성질이나 화가의 종교관을 확정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느낌을 존중하면서도 그 느낌이 무엇을 증명하는지 구별할 수 있다.

검은 원을 다시 본다

〈검은 태양〉으로 돌아오면 처음 보았던 어두운 원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밝은 바탕을 막고 있는 구멍처럼 보였다가, 주변의 흔들리는 획들을 모으는 지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어디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주위와 함께 읽을 때 한 형상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이다.

태양은 세계의 모든 뜻을 혼자 짊어질 필요가 없다. 배와 사람, 말과 넓은 바탕이 함께 그 뜻을 나눈다. 이 관계 속에서 검은 해는 단순한 불길함보다 오래 남고, 열린 고리의 해는 단순한 낙관보다 복잡해진다. 태양을 상징의 사전에서 꺼내 화면으로 돌려놓을 때, 그림은 다시 구체적인 밝고 어두움을 얻는다.

검은 원 아래로 눈을 내린다. 밝은 붓자국 사이에 배가 작게 놓여 있다. 그 주위의 면은 한 번에 다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