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Ⅰ 자연과 풍토

Ⅰ 자연과 풍토 · 7 / 100

한라산의 침묵

먼 산을 남기는 선

The Silence of Hallasan

〈한라산〉 · 1987 / Hallasan
〈한라산〉 · 1987FŪDO 009

희미하지 않은 산

〈한라산〉(1987)의 산은 희미하지 않다. 검은 윤곽이 화면 위쪽을 길게 가로지른다. 선은 몇 번 솟았다가 낮아지며 능선을 이룬다. 산 안쪽을 채우는 나무나 바위의 세부는 드물지만, 산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그림에서 침묵을 찾는다면 선이 사라진 자리보다, 선이 남고 세부가 물러난 자리를 보아야 한다.

그 아래에는 언덕의 굴곡이 이어지고, 더 아래에 담과 집, 말과 사람이 있다. 눈은 높은 윤곽에서 낮은 형상으로 내려온다. 다시 올라가 보면 산 안의 넓은 면이 보인다. 산은 많은 것을 그려 넣어서 커 보이는 것이 아니다. 적게 나뉜 면과 길게 이어진 선이 아래쪽의 작은 형상들과 다른 크기의 시간을 갖게 한다.

따라서 침묵은 산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산의 선은 화면의 윗부분을 묶고, 아래의 생활 장면을 어느 거리에서 보게 할지 바꾼다.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역할까지 작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산이 사람의 삶을 모두 떠받치는 절대적 근거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이 한 화면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거리에는 여러 방향이 있다

산수화의 거리와 비교할 때에는 용어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곽희의 화론을 전하는 『임천고치』의 삼원은 모두 같은 먼 경치를 뜻하지 않는다. 산 아래에서 정상을 올려다보는 고원, 앞쪽 산에서 그 뒤를 들여다보는 심원,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평원은 시선의 방향이 서로 다르다. 산을 멀리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고원이라 부를 수는 없다.

이 구별은 변시지가 그 화론을 따랐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눈앞의 그림에 더 정확한 질문을 하게 한다. 우리는 산을 올려다보는가, 산 너머를 들여다보는가, 낮은 땅에서 먼 능선으로 눈길을 보내는가. 산이 화면 위쪽에 있다는 사실과, 산 아래에서 위를 보는 경험도 같지 않다. 캔버스의 위치를 곧바로 관람자의 자세로 바꾸어 읽지 않아야 한다.

〈한라산〉에서는 산과 언덕의 선이 위아래로 포개지고, 집과 몸의 형상은 아래쪽에 모인다. 그러나 사진처럼 한눈에 측정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다. 가까운 사람을 보는 눈과 먼 산을 따라가는 눈이 화면 안에서 함께 움직인다. 우리는 한 곳에 발을 고정한 채 모든 것을 재는 대신, 서로 다른 거리의 단서를 오가며 풍경을 읽는다.

생략은 소멸이 아니다

곽희의 화론에는 먼 산의 준법과 먼 물의 물결, 먼 사람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 없어서가 아니라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모든 부분을 같은 정도로 채워야 풍경이 충실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거리에 따라 생략되는 것은 사물 자체보다 그 사물을 보는 방식과 관계된다.

이 관점으로 〈한라산〉을 다시 보면, 내부의 세부가 줄어든 산은 빈껍데기가 아니다. 윤곽 안의 넓은 면이 아래쪽의 돌과 집을 다른 밀도로 만나게 한다. 세부의 부족이 아니라 세부를 나누어 놓은 차이가 화면을 움직인다. 먼 곳을 덜 나누었기 때문에 가까운 곳의 작은 구분들이 더 잘 보인다.

여기서 산을 지우면 다른 그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산 없는 그림은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 그림의 산은 이 그림의 다른 요소들과 함께 작용한다. 침묵을 모든 화면에 필요한 하나의 공식으로 만들기보다, 특정한 선과 면이 어떤 균형을 이루는지 살펴야 한다. 생략의 뜻도 남겨진 것들과의 관계에서 달라진다.

같은 색, 남아 있는 거리

산과 하늘, 언덕과 사람의 몸에는 비슷한 바탕색이 이어진다. 그러나 산과 사람을 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위아래의 배치, 겹치는 윤곽, 크기의 차이가 여전히 거리를 읽게 한다. 색이 이어진다는 사실만으로 원근이 사라졌다고 말하면, 화면에서 실제로 작용하는 다른 단서를 놓치게 된다.

이 그림의 긴장은 평면과 깊이 중 하나를 고르는 데 있지 않다. 넓게 이어진 색면을 볼 때에는 물감이 놓인 표면이 가까워진다. 집과 산의 관계를 볼 때에는 다시 거리감이 생긴다. 우리는 표면을 보는 눈과 풍경을 보는 눈 사이를 오간다. 같은 그림이 두 방식의 보기를 함께 허락한다.

마른 풀잎색은 그래서 거리를 없애는 색이라기보다, 떨어진 것들을 한 화면에서 계속 만나게 하는 바탕으로 읽힌다. 산은 여전히 멀고 사람은 가까이에 있다. 다만 그 둘을 구분하는 선의 안팎에서 같은 빛깔이 이어진다. 거리가 남아 있으면서도 완전히 끊어지지 않는 관계. 풍토를 읽을 자리는 이 두 조건이 함께 있는 곳이다.

산의 이름과 산의 형상

이 작품의 산을 한라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작품에 붙은 제목에도 있다. 그러나 다른 제주 그림에 산이 보인다고 모두 한라산으로 이름 붙일 수는 없다. 알아볼 수 있는 지형과 화가가 바꾼 형상, 작품 기록이 서로 맞는지 살펴야 한다. 지명은 해석을 도울 수 있지만 화면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한라산이라는 이름을 안 뒤에도 볼 일은 남는다. 봉우리를 몇 번 굽혀 놓았는지, 능선의 한쪽을 얼마나 길게 뻗게 했는지, 그 아래를 어느 정도 비웠는지 살펴야 한다. 장소를 알아보는 순간이 감상의 끝이 되면 풍경화는 지명 맞히기가 된다. 변시지의 산은 실제 장소를 가리키면서도 선과 면의 선택으로 다시 이루어진 산이다.

이러한 선택을 노년의 평정으로 곧바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한 작품의 줄어든 세부가 화가의 마음속 화해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침묵은 심리 진단보다 조형적 관계로 먼저 읽을 수 있다. 무엇을 덜 그렸는가뿐 아니라, 덜 그린 곳 때문에 다른 부분이 어떻게 보이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먼 곳이 가까운 것을 바꾼다

〈한라산〉을 보고 난 뒤 아래쪽의 사람에게 눈을 돌리면, 처음보다 넓은 자리에 서 있는 듯 느껴진다. 사람의 크기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눈이 산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동안 그 주위의 거리가 생긴 것이다. 먼 산은 사람을 지워 버리지 않는다. 그 작은 몸이 놓인 자리의 넓이를 다시 느끼게 한다.

이때 침묵은 소리 없는 자연이 인간을 위로한다는 약속보다 절제된 무엇이다. 산은 사람의 일을 대신 해결하지 않는다. 사람 역시 산 전체를 차지하지 않는다. 다른 크기의 존재가 한 화면에 함께 놓이고, 보는 눈이 그 사이를 오간다. 큰 것을 보았다고 작은 것을 잊지 않는 거리의 감각이 남는다.

산의 선은 화면 끝까지 이어진다. 그 아래 집은 낮다. 눈은 먼 능선을 한 번 더 따라가고, 다시 사람 곁으로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