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자연과 풍토 · 6 / 100
돌담의 기하학
서로 다른 돌이 만드는 자리
The Geometry of Stone Walls
먼 산 아래의 낮은 담
〈한라산〉(1987)에서 눈은 먼저 산의 긴 윤곽을 따라간다. 그 아래로 내려오면 크기가 다른 돌들이 이어진 담이 보인다. 담은 화면 왼편에서 초가집 쪽으로 낮게 굽어 간다. 큰 산과 작은 사람 사이에서, 이 낮은 구조가 사람이 살아가는 땅의 구획을 드러낸다. 산의 선이 먼 곳을 열어 준다면 돌담은 가까운 곳에 생활의 자리를 만든다.
담을 이루는 작은 형상들은 같은 크기의 벽돌처럼 정렬되어 있지 않다. 검은 가장자리와 어두운 면이 이어지다가 밝은 바탕을 남긴다. 위쪽의 산줄기는 길게 이어지고, 아래쪽의 담은 짧은 단위로 나뉜다. 한 화면에 서로 다른 두 리듬이 놓인다. 이 차이 때문에 우리는 산을 훑어보던 속도로 담을 읽지 않게 된다.
돌담의 기하학은 반듯한 도형을 찾는 일이 아니다. 모양이 다른 것들이 어떻게 이어져 하나의 경계를 이루는지 살피는 일이다. 각각의 돌을 보면서도 담의 방향을 잃지 않는 것. 전체를 보면서도 돌 하나의 차이를 놓치지 않는 것. 이 두 시선이 함께 움직일 때, 낮은 담은 작은 장식에서 화면을 짜는 구조로 바뀐다.
틈과 받침
제주의 밭담은 농경지에서 나온 돌을 쌓아 만든 경계이자 바람을 누그러뜨리는 구조다.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밭담이 작물을 바람에서 보호하고 토양의 유실을 줄이며 가축의 출입을 제한하는 기능을 설명한다. 여기서 밭담은 돌담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밭과 관계된 돌담이다. 생활의 용도를 알면, 그림 속 담도 막연한 향토적 표지로만 남지 않는다.
이 구조를 볼 때 빈틈만 칭송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돌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틈과 돌끼리 무게를 받치는 자리는 함께 있어야 한다. 틈을 많이 남기는 일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서로 떨어져 있던 돌들이 자리를 얻어 서 있는 담을 이루는 일이 먼저다. 통과와 지탱은 같은 구조 안에서 조정된다.
그래서 돌담을 모든 벽보다 우월한 해법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담의 높이와 두께, 돌을 놓는 방식은 쓰임과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국립제주박물관이 밭담을 소개하며 강조하는 것도 작물을 지키고 동물의 접근을 막는 구체적인 역할이다. 견딤은 틈 하나가 마술처럼 만들어 내는 결과가 아니다. 필요한 경계를 만들기 위해 재료와 장소를 살피는 일에 가깝다.
이 실용적인 구조에서 회화를 읽을 실마리가 나온다. 한 부분을 비운다고 화면 전체가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남겨 둔 선이 있어야 여백의 넓이도 달라진다. 〈한라산〉의 담에서 작은 돌의 가장자리와 그 사이의 바탕은 서로를 보이게 한다. 차이를 잇는 일과 차이를 남기는 일이 같은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경계를 만든다는 것
돌담은 막는 동시에 길을 드러낸다. 어느 쪽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어디에 집이 있는지, 어떤 땅이 나뉘는지 알려 준다. 그렇다고 담 안을 사람의 세계, 담 밖을 순수한 자연으로 갈라 놓을 수는 없다. 밭도 날씨와 흙에 놓여 있고 집도 바람을 받는다. 돌담은 자연을 인간의 생활에서 떼어 내는 선보다, 그 안에서 생활의 범위를 조정하는 선으로 읽힌다.
〈한라산〉에서 담은 집을 화면의 다른 것들로부터 완전히 가두지 않는다. 산줄기와 언덕의 긴 선들, 말과 사람의 형상 사이에서 집으로 눈을 이끈다. 담에 수직의 높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이어지는 방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 있는 구조이면서, 시선이 따라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낮은 경계가 언제나 화목한 공동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경계에는 땅의 사용과 구분이라는 현실이 있다. 다만 그림에서는 그 현실이 선의 배치로 다시 나타난다. 구획된 땅과 열린 바탕이 함께 보일 때, 우리는 여기가 누군가의 자리이면서 그 사람만의 세계는 아니라는 감각을 얻는다. 거주는 소유의 표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손이 남긴 차이
돌담을 그린다는 것은 돌을 쌓는 행위를 그대로 반복하는 일이 아니다. 실제 담은 무게를 견뎌야 하지만 그려진 담은 물감의 배치로 서 있다. 화가는 돌 하나하나의 구조를 모두 설명하지 않고도 담을 알아보게 할 수 있다. 다만 어느 부분을 이어 주고 어느 부분을 끊을지는 골라야 한다. 건축의 기술과 회화의 기술이 만나는 지점은 같은 결과가 아니라 이런 선택에 있다.
〈한라산〉의 담에는 고른 띠와 다른 감촉이 있다. 돌을 나누는 작은 선들이 그때마다 다른 방향을 향한다. 어두운 부분이 모인 곳과 바탕이 드러나는 곳도 일정하지 않다. 이런 차이를 따라가면, 담은 하나의 기호로 단숨에 읽히지 않는다. 시선이 몇 번 멈추어야 그 길이가 생긴다.
거친 선을 보고 화가의 손이 실제 바람에 떨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화면에 남은 필치와 작업 당시의 사정은 다른 종류의 자료다. 그러나 선의 끊김과 두께가 눈의 속도를 바꾼다는 것은 그림 앞에서 살필 수 있다. 손의 전기를 상상하지 않고도 손이 남긴 결과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 결과 안에는 매끈한 반복으로 대체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다시 쌓는 일보다 먼저
담을 다시 세우는 일은 무너짐을 찬양하는 일이 아니다. 무너지지 않도록 살피고, 느슨한 곳을 고치고, 필요한 자리를 보태는 일도 담의 시간에 속한다. 무너진 뒤의 극적인 재건만 바라보면, 무너지기 전에 이어져 온 작은 노동을 놓치게 된다. 오래 남은 구조에는 처음 만든 순간뿐 아니라 계속 손본 시간이 있다.
시시포스의 바위를 떠올리는 비유는 반복의 무게를 말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밭담을 돌보는 노동은 언제나 원점으로 돌아가는 형벌과 같지 않다. 그것은 실제로 작물과 생활을 지키는 쓰임을 가진다. 반복이 삶에 뜻을 주는지 묻기 전에, 그 노동이 무엇을 지키며 누구에게 필요한지 보아야 한다. 생활의 구체적인 목적을 지운 뒤에야 철학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회화의 반복도 같은 그림을 성실하게 많이 그렸다는 말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같은 소재를 다시 다루면서 무엇을 보았는지가 중요하다. 담의 길이, 선의 밀도, 집과의 간격이 달라지면 같은 돌담도 다른 화면의 일부가 된다. 반복은 이미 얻은 답을 확인하는 시간일 수도 있지만, 답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다시 알아보는 시간일 수도 있다.
한 돌의 자리
변시지의 돌담을 자기 땅의 돌만으로 세운 순수한 예술의 비유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화가가 다른 곳에서 배우고 익힌 시간을 지워 버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돌이 어디에서 왔는가만이 아니라, 지금 어느 돌을 받치며 어떤 자리에 놓이는가다. 받아들인 것을 새 관계 안에서 다시 쓰는 일 역시 자기 그림을 만드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돌담의 기하학에는 거창한 완성보다 조정이 있다. 한 돌을 놓으면 옆의 돌과 만나는 자리가 달라진다. 작은 부분의 변화가 전체의 방향을 건드린다. 그림에서도 선 하나의 두께와 빈 곳 하나의 넓이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낮은 담은 이 서로 의존하는 형식을 가까운 크기로 보여 준다.
먼 산 아래에 담이 이어진다. 검은 돌의 가장자리 사이로 밝은 바탕이 조금씩 남아 있다. 눈은 돌 하나에서 다음 돌로 건너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