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Ⅰ 자연과 풍토

Ⅰ 자연과 풍토 · 5 / 100

섬이라는 우주

고립의 이미지에서 관계의 장소로

The Island as Universe

절도라는 제목 앞에서

변시지의 작품 가운데 1981년의 〈절도〉가 있다. 이 제목은 섬을 바라보는 눈에 하나의 질문을 놓는다. 무엇으로부터 떨어져 있는가. 그 떨어짐은 누구의 자리에서 보이는가. 절도라는 말을 곧 완전한 단절의 증거로 읽기보다, 연결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의 눈이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지 물을 수 있다.

육지에서 바라보면 섬은 물 건너에 있다. 그러나 섬에 서 있는 사람에게 발아래 땅은 먼 곳이 아니다. 여기다. 먼 것은 오히려 물 건너의 다른 육지다. 중심이 바뀌면 같은 거리의 뜻도 달라진다. 섬을 하나의 우주로 읽는 일은 우선 그 안에 선 사람에게도 세계의 중심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렇다고 섬을 부족함이 전혀 없는 완결된 세계로 바꿀 필요는 없다. 작은 장소에도 필요한 것이 있고, 다른 곳과 나누어야 할 것이 있다. 섬을 결핍으로만 보는 시선과 자족으로만 보는 시선은 반대처럼 보이지만, 둘 다 그곳의 구체적인 관계를 지워 버릴 수 있다. 그림은 그 두 결론 사이에서 다시 보아야 한다.

화면의 끝은 세계의 끝이 아니다

섬의 형상은 둘레를 갖는다. 물과 땅이 만나는 선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덩어리로 알아본다. 그러나 그 선은 막힌 벽과 다르다. 물은 둘러싸면서 다른 장소로 이어질 수 있다. 섬의 경계는 나뉨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는 자리를 보여 준다.

회화의 가장자리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화면에 배가 없다고 바다가 길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섬이 그려지지 않았다고 다른 섬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화가는 하나의 장면을 선택한다. 선택된 장면의 고요함과 실제 장소의 단절은 같은 사실이 아니다. 그림에 남지 않은 세계를 지워 버리면 화면의 절제가 장소의 빈곤으로 오해된다.

변시지의 화면에서 적은 형상과 넓은 공간이 만날 때, 보이지 않는 연결을 상상할 여지가 생긴다. 집과 물가 사이의 거리, 가까운 땅과 먼 수평선의 간격은 곧바로 하나의 이야기를 주지는 않는다. 다만 무엇이 이곳을 유지하는지 묻게 한다. 그림 안의 작은 세계는 스스로의 경계를 갖되, 그 경계 밖의 세계에 관한 질문도 남긴다.

작은 집의 안과 밖

섬을 거주의 문제로 읽을 때 작은 집은 중요한 형상이 된다. 낮은 지붕은 사람이 몸을 둘 수 있는 안쪽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안이 있다는 것과 안이 완전히 안전하다는 것은 다르다. 집을 에워싼 공간이 넓을수록 집의 존재가 또렷해지는 동시에 그 작음도 드러난다. 보호와 노출은 한 형상에서 함께 느껴질 수 있다.

그 집에 누가 있는지는 그림이 알려 주는 만큼만 말할 수 있다. 사람을 그리지 않은 집 안에 노인 한 사람을 반드시 들여놓을 필요는 없다. 반대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버려진 집으로 단정할 수도 없다. 문과 벽, 지붕의 관계를 보며 안쪽을 생각하는 것과, 그 안의 생활을 확정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이 불확정성은 집을 빈 기호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이 머물 자리를 보는 감각을 열어 둔다. 집은 누군가의 삶을 전부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리를 생각하게 한다. 넓은 풍경 속에 작게 놓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안과 밖의 차이는 선명해진다. 문 하나가 세계와 몸 사이의 거리를 만든다.

모나드의 비유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에서 모나드는 부분을 갖지 않는 단순한 실체다. 창이 없다는 설명도 외부의 물질이 드나드는 지리적 통로의 부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땅과 집과 사람으로 이루어진 섬을 모나드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다. 회화의 작은 세계와 철학의 단순한 실체는 서로 다른 층위에 있다.

그 비유에서 더 생산적인 부분은 하나의 자리에서 세계가 다르게 드러난다는 생각이다. 라이프니츠는 같은 도시도 보는 쪽에 따라 달라 보인다는 예를 든다. 이를 그림을 읽는 비교로 가져오면, 작은 장소가 넓은 세계를 생각하는 하나의 관점이 될 수 있다. 작기 때문에 세계를 덜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세계를 다르게 만나는 것이다.

이 정도의 비교라면 섬을 완전한 자족의 증거로 삼지 않아도 된다. 변시지의 화면이 열어 주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진 장소보다, 적은 형상으로도 세계와의 관계를 묻게 하는 장소다. 철학의 이름은 그 질문을 돕기 위해 쓰인다. 화가가 그 철학을 알고 따랐다는 증거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바다를 사이에 둔 것이 아니라 바다로 이어진 것

에펠리 하우오파는 「우리의 섬들의 바다」에서 태평양의 섬들을 바다에 흩어진 작은 땅으로만 보는 관점을 바꾼다. 그가 환기하는 오세아니아의 세계에서 바다는 사람들이 살고 이동하며 관계를 넓혀 온 공간이다. 육지의 크기를 재는 것만으로 그 세계의 크기를 알 수는 없다.

태평양의 역사와 제주의 역사가 같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빌려올 것은 경계를 보는 방법이다. 물이 사이에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단절을 결정하지 않는 것. 바다는 건너야 할 거리이면서 오갈 수 있는 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섬 주위의 여백은 섬을 지우는 공간이 아니라 다른 곳을 생각하게 하는 공간일 수 있다.

변시지의 그림을 세계와 만나게 하는 일도 고립된 천재의 신화를 세우는 것과는 다르다. 한 장소에 머문 그림이 다른 장소의 사람에게 어떤 질문을 건네는지 살피는 일이다. 떠나고 돌아오는 몸, 머물 자리를 만드는 사람, 크기가 다른 존재들이 같은 공간에 놓인 관계. 제주라는 구체적인 자리에서 생긴 질문은 그 구체성을 잃지 않고 다른 삶과 만날 수 있다.

돌아온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변시지는 제주에서 태어나 일본과 서울을 거친 뒤 제주에 정착했다. 그 이동의 순서만 보아도 그의 섬을 외부와 아무 관계 없는 폐쇄된 공간으로 읽기는 어렵다. 장소를 옮기는 동안 익힌 시선과 손의 기술은 고향에 닿았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귀향한 몸 안에는 이미 여러 장소의 시간이 있다.

이것은 모든 이동이 마지막 귀향을 준비했다는 뜻도 아니다. 어느 시기의 삶도 뒤의 결말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곳에 머물러 그릴 때에도 이동의 경험은 새로운 선택의 자원이 될 수 있다. 섬을 그리는 눈은 섬에서만 만들어진 눈이 아니다. 그 눈이 다시 섬의 빛과 바람을 만난다.

그래서 오래 머무는 일과 세계로부터 물러나는 일은 같지 않다. 같은 장소를 다시 그리며 구도와 간격을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반복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그림이 이전보다 깊어졌다고 말할 수도 없다.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아야 한다. 머문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이 형식 안에서 어떻게 쓰였는지가 중요하다.

작은 세계를 닫지 않는 일

섬이라는 우주는 모든 것이 충족된 이상향의 이름일 필요가 없다. 한정된 자리에서 어떻게 다른 존재들과 관계 맺으며 사는가를 묻는 이름일 수 있다. 작음은 결핍의 증거도 완전함의 증거도 아니다. 작은 집이 있다는 사실은 그 집의 삶이 가난하다는 뜻도, 충분하다는 뜻도 아니다. 그 사이에서 거주의 구체적인 조건이 보이기 시작한다.

변시지의 섬을 이처럼 읽으면 고독도 폐쇄로만 남지 않는다. 다른 존재와의 거리를 아는 감각이 될 수 있다. 몸을 둘 땅은 좁고, 눈이 닿는 곳은 멀다. 그 사이에 생활이 있고 이동이 있으며, 그림 밖으로 이어질 길이 있다. 섬은 세상을 모두 안에 가두어서가 아니라, 작은 자리에서 넓은 관계를 느끼게 해서 하나의 우주가 된다.

집을 보던 눈이 물가로 간다. 물가를 지나 먼 선에 닿는다. 화면의 가장자리에서 바다는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