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Ⅰ 자연과 풍토

Ⅰ 자연과 풍토 · 4 / 100

바다의 두 얼굴

같은 수면, 다른 삶의 자리

The Two Faces of the Sea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Where Do We Come From, and Where Are We Going? · 1992. 큰 절벽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른쪽 아래 바위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인 사람과 그 곁의 말이 있다. 왼쪽 먼 수면에 작은 배가 보인다. / A large cliff occupies most of the picture. At lower right a seated figure bows its head, with a pony beside it. A tiny boat appears on the distant water at left.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1992

같은 바다를 다르게 보는 일

변시지의 바다를 고요한 바다와 격렬한 바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요함은 곧 평안이고 격렬함은 곧 절망이라는 뜻은 아니다. 잔잔한 수면이 사람과 배 사이의 거리를 더 멀게 느끼게 할 수 있다. 반대로 물결이 많은 화면에서도 작은 형상이 또렷이 남아 눈을 붙잡을 수 있다. 바다의 표정과 사람의 감정은 일대일로 맞물리지 않는다.

두 얼굴이라는 말이 유효한 것은 바다를 두 종류로 분류해서가 아니다. 하나의 장소가 서로 다른 경험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같은 수면도 어디에서 바라보는지, 무엇을 기다리는지, 물로 들어가야 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바다는 눈앞의 대상이면서 그 눈을 가진 사람의 생활과 떨어질 수 없는 장소다.

이 장에서 묻는 것은 바다가 어떤 감정을 상징하는가보다, 바다와 사람이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이다. 앞 장이 화면을 흔드는 힘을 살폈다면, 여기서는 그 힘을 겪는 자리를 살핀다. 해안과 수평선, 배와 육지, 보는 사람과 물로 들어가는 사람의 차이가 그 출발점이다.

고요한 수면에도 거리는 남는다

수면을 가로지르는 선이 적으면 시선은 멀리 갈 수 있다. 밝은 색면이 넓게 이어지고, 작은 배 하나가 그 가운데 놓이면 배를 둘러싼 공간이 먼저 커진다. 선을 덜 그린 자리가 반드시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넓이 때문에 배가 얼마나 작은지, 육지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 느끼게 된다.

그 거리는 해방감이 될 수도 있고 닿을 수 없음의 감각이 될 수도 있다. 이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수면의 평온함만이 아니다. 배와 사람의 위치, 화면의 가장자리, 눈이 돌아갈 가까운 형상이 있는지가 함께 작용한다. 같은 고요도 구도 안에서 다른 무게를 얻는다. 감정은 바다의 색 하나보다 이런 관계 속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고요한 그림을 모두 폭풍이 지나간 뒤의 풍경이라고 정할 필요는 없다. 그림 안에 그 시간을 가리키는 단서가 없다면, 전후의 사건은 열려 있다. 어떤 고요는 기다림에 가까울 수 있고, 어떤 고요는 일의 틈이나 긴 오후처럼 다가올 수 있다. 사연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관람자의 기억도 그 앞에서 움직일 수 있다.

물결이 시선을 되돌려 보낼 때

격렬한 바다에서는 눈이 멀리 가기 전에 가까운 선에 붙잡힌다. 겹친 붓자국이 통로를 막고, 서로 다른 방향의 선이 시선을 돌아오게 한다. 바다의 넓이는 줄지 않았는데 그 넓이를 한 번에 읽기는 어려워진다. 고요한 수면에서 거리가 길게 열렸다면, 여기서는 거리를 통과하는 일 자체가 힘을 요구한다.

그럴수록 작은 배나 낮은 해안은 다른 역할을 얻는다. 그것들은 단순히 큰 바다와 대비되는 작은 물체가 아니다. 시선이 잠시 위치를 확인하는 자리다. 무엇이 물 위에 있고 무엇이 물가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다시 짐작하게 한다. 거친 선 사이에서 형상을 알아보는 일은 화면 안에서 방향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이때 관람자는 바다를 바라보는 편안한 거리를 잠시 잃는다. 그렇다고 그림 속 사람과 실제로 같은 위험을 겪는 것은 아니다. 회화는 그 차이를 남겨 둔 채 다른 사람의 자리를 생각하게 한다. 멀리서 아름다워 보이는 물이 가까이에서는 통과해야 할 힘이라는 사실. 바다의 두 얼굴은 보는 거리의 차이이기도 하다.

바다를 보는 일과 바다에서 일하는 일

제주 바다를 생계의 장소로 읽으면 이 차이는 더 구체적이 된다. 해녀의 물질에는 해산물을 채취하는 노동과 바다에 관한 지식이 함께 있다. 유네스코가 기록한 해녀의 증언에서도 자기 호흡의 한계를 살피며 일하는 일이 중요하게 다뤄진다. 물은 아름다움이나 공포에 앞서, 몸의 능력과 판단을 계속 요구하는 생활의 조건이다.

이런 맥락은 변시지의 해양 회화를 읽는 시선을 바꾼다. 화면에 바다가 있다고 언제나 풍경을 즐기는 사람의 자리에서 볼 필요는 없다. 해안에 가까운 몸, 바다 쪽으로 향한 자세, 육지와 떨어진 배를 생활의 관계 안에서 살펴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수면 아래로, 그 물을 오가야 하는 사람들의 시간이 생각에 들어온다.

그러나 생계를 곧 비극으로 바꾸어서도 안 된다.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숙련과 판단이 있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지식이 있다. 위험을 안다는 것이 오직 두려움 속에서 산다는 뜻은 아니다. 인물의 자세를 상실의 상징으로만 고정하면 그가 지닌 능력과 일상의 폭이 좁아진다. 그림의 사람을 동정의 대상에 앞서 생활하는 존재로 보아야 한다.

물의 상상력은 두 갈래보다 넓다

바슐라르의 『물과 꿈』은 물의 이미지를 읽는 비교의 한 길을 열어 준다. 그 책의 구성만 보아도 맑은 물과 흐르는 물, 깊고 잠든 물, 죽은 물, 격렬한 물이 서로 다른 문제로 다뤄진다. 이를 고요하면 자아를 찾고 격렬하면 자아를 잃는다는 두 공식으로 줄일 수는 없다. 물의 물질적 성질은 기억과 꿈 속에서 여러 방향으로 펼쳐진다.

이 관점을 변시지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그의 그림을 바슐라르 이론의 사례로 배치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한 이름 아래 감춰진 차이를 더 보자는 것이다. 수면의 밝음과 깊이, 물과 땅의 경계, 반사되는 듯한 색과 그 반사를 끊는 선을 살핀다. 바다라는 소재가 같아도 이런 차이가 다른 상상력을 부른다.

우리는 물을 보고 자기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렇지만 바다가 그 기억만을 비추는 거울이 되면 그림의 낯선 부분은 사라진다. 내가 느낀 슬픔이 화가의 슬픔과 같을 필요는 없다. 나의 기억을 허용하면서도 그것과 다른 장면을 보게 하는 것. 좋은 해석은 그 두 움직임 사이를 오간다.

빈 배가 남겨 두는 질문

배에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곧 누가 떠났는지 묻게 된다. 그러나 빈 배는 아직 출항하지 않은 배일 수도 있고, 일을 마치고 매어 둔 배일 수도 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떠올리는 읽기는 가능하지만 그것만이 화면의 사실은 아니다. 배의 방향과 육지와의 거리, 주위의 형상을 먼저 보아야 한다. 무엇이 비어 있는지와 왜 비었는지는 다른 질문이다.

부재의 감각은 이렇게 확정되지 않은 자리에서 더 오래 남기도 한다. 그림이 한 사람의 운명을 결론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배는 노동의 사물이면서 기다림의 사물이 될 수 있다. 바다는 통로이면서 거리가 된다. 하나의 의미를 얻기 위해 다른 의미를 지울 필요가 없다. 같은 형상 안에 서로 다른 생활의 시간이 겹쳐질 수 있다.

다시 같은 바다 앞에서

같은 바다를 다시 그리는 일은 같은 감정을 복사하는 일이 아니다. 배를 조금 옮기고 수평선의 높이를 달리하면, 사람이 놓이는 세계도 달라진다. 선 하나를 덜어 내는 일은 물의 움직임을 줄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물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새롭게 만든다. 반복해서 그릴 수 있는 것은 소재가 바뀌지 않아도 그 관계를 다시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바다의 두 얼굴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두 감정이 아니다. 바라보는 곳과 살아가는 일이 달라질 때 나타나는 같은 세계의 다른 모습이다. 어느 하나를 진짜 바다라 부를 수는 없다. 물은 그 사이에서 계속 넓어지고, 그림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조금씩 바꾼다.

수평선까지 선 하나가 이어진다. 먼 배는 작다. 그 배가 오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는, 조금 더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