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Ⅰ 자연과 풍토

Ⅰ 자연과 풍토 · 3 / 100

폭풍의 형이상학

흔들리는 질서와, 자리를 찾는 몸

The Metaphysics of the Storm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Where Do We Come From, and Where Are We Going? · 1992. 큰 절벽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른쪽 아래 바위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인 사람과 그 곁의 말이 있다. 왼쪽 먼 수면에 작은 배가 보인다. / A large cliff occupies most of the picture. At lower right a seated figure bows its head, with a pony beside it. A tiny boat appears on the distant water at left.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1992

바람이 화면 전체의 문제가 될 때

바람의 기척을 느끼는 것과 폭풍 앞에 서는 것은 다르다. 바람은 한 가지의 기울기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폭풍에서는 그 기울기가 다른 형상과 다른 거리로 번져 간다. 눈을 붙잡을 안정된 자리가 줄어들고, 나무를 보던 시선이 하늘의 선으로, 다시 땅의 거친 결로 밀려난다. 이때 폭풍은 거친 붓질의 양보다 화면 전체의 불안정한 관계에서 생긴다.

변시지의 폭풍을 읽을 때에도 먼저 그 관계를 보아야 한다. 선이 굵다는 이유만으로 폭풍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선이 같은 방향으로 힘을 모으는지, 서로 부딪쳐 시선을 막는지, 작은 형상을 남겨 둔 채 그 주위를 에워싸는지가 중요하다. 거칠음에는 방향이 있고, 밀도에는 차이가 있다. 화면을 채우는 힘과 그 힘이 비켜 간 자리가 함께 작용한다.

그래서 폭풍의 화면은 무질서의 복사본이 아니다. 무질서를 느끼게 하는 회화의 질서다. 화가는 선을 놓고 멈추며, 밀어붙이는 부분과 남겨 두는 부분을 정한다. 우리가 격렬함을 느끼는 동안에도 그림은 그 격렬함을 지탱할 형식을 갖고 있다. 그 형식을 놓치면 화가의 작업은 자연이 남긴 자국으로만 축소된다.

귀향은 한순간의 기적이 아니다

변시지는 1975년 제주에 정착했다. 그 이전에는 오사카와 도쿄, 서울에서 살고 작업했다. 이 이동은 제주 회화를 읽는 중요한 바탕이다. 그러나 정착의 해를 안다는 것과 한 화풍이 만들어진 순간을 안다는 것은 다르다. 어느 날의 태풍 하나가 이전의 기법을 모두 무너뜨렸다고 말하면, 그 사이에 있었을 관찰과 선택의 시간이 사라진다.

형식의 변화는 배운 것을 전부 잃는 일보다, 배운 것의 쓰임이 달라지는 일에 가까울 수 있다. 정확하게 형태를 잡던 능력은 적은 선으로 몸을 남기는 데 쓰일 수 있다. 복잡한 구도를 다루던 감각은 넓게 비워 둔 화면의 균형을 잡는 데 작용할 수 있다. 제주에서의 변화는 앞선 시절을 무효로 만들기보다 다른 관계 속에서 다시 사용한다.

일본과 서울의 그림을 뒤에 올 제주 회화를 위한 미완성 단계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각 시기의 작업에는 그때의 문제와 성취가 있다. 폭풍의 화가라는 후대의 이름이 그 차이를 한꺼번에 지워서는 안 된다. 귀향은 하나의 예정된 결말이 아니라, 이미 오랜 작업을 해 온 사람이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선택하기 시작한 계기다.

검은 선과 남겨진 바탕

거친 선이 겹치는 화면에서 밝은 바탕은 잠시 쉬어 갈 자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있다고 폭풍이 곧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비어 있는 부분이 오히려 작은 몸의 노출을 더 뚜렷하게 할 수도 있다. 같은 여백이 안정과 불안을 함께 품는다. 주변의 선이 얼마나 가까이 밀려오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마른 풀잎색의 바탕과 검은 선은 따라서 따뜻함과 차가움으로 간단히 나뉘지 않는다. 바탕이 밝아도 화면은 고단할 수 있고, 검은 선이 많아도 그 선이 형상을 붙잡아 주는 듯 보일 수 있다. 무엇이 파괴하고 무엇이 보호하는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색과 선은 서로의 작용을 바꾸며 폭풍의 감각을 만든다.

이 점에서 폭풍의 형식은 지우는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남기는 힘도 있다. 집을 알아볼 수 있는 몇 개의 선, 몸의 방향을 짐작하게 하는 윤곽이 끝까지 읽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무너져 아무것도 구별되지 않는 화면과는 다르다. 흔들림이 무엇을 위태롭게 하는지 알려면, 위태롭게 놓인 형상이 여전히 남아 있어야 한다.

숭고를 보는 자리와 바람을 맞는 자리

칸트는 『판단력 비판』 제28절에서 위력적인 자연을 논하면서, 실제 위험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와 안전한 자리에서 그 위력을 판단하는 상태를 구별한다. 이 구별은 폭풍 그림을 읽을 때 유용하다. 관람자는 그림 앞에 서 있고, 그림 속 인물은 그려진 폭풍 안에 있다. 두 자리는 같지 않다.

변시지의 작은 인물을 보고 곧바로 자연을 이긴 정신의 승리를 읽으면 그 차이를 잊게 된다. 화면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거대한 힘 앞에 놓인 작은 몸이다. 그 몸이 다음 순간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림은 승리의 결과보다 노출되어 있는 현재를 붙들고 있다. 장엄한 풍경을 보는 눈은 그 안의 몸이 딛고 있는 작은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숭고의 경험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경이와 두려움이 생길 수 있다. 다만 그림의 크기와 격렬함을 감탄하는 데 그치지 말자는 것이다. 같은 화면 안에 집과 사람, 머물러야 할 장소가 있다. 그들의 취약함을 보는 일은 장관을 즐기는 일과 나란히 놓이되, 서로를 대신하지 않는다.

견딤을 명령하지 않는 그림

몸을 낮추는 자세를 견딤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곧게 서 있는 몸보다 굽은 몸이 더 훌륭하다는 뜻은 아니다.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기대어 있는 사람의 존엄을 자세 하나로 평가할 수는 없다. 폭풍을 견뎌 냈다는 결과만이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림이 몸을 작게 남겼다면, 먼저 그 작은 몸의 사정을 헤아려야 한다.

견딤은 완강하게 버티는 한 가지 행동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힘을 덜 받는 곳으로 몸을 옮기고, 다른 것에 기대고, 잠시 움직임을 멈추는 일도 포함할 수 있다. 화면에서 이런 가능성을 읽으면 인간은 무력한 물체도 영웅도 아닌 존재로 남는다. 주어진 힘 안에서 자신의 다음 자세를 찾는 몸이다.

폭풍을 삶의 비유로 받아들이는 일도 여기서 깊어진다. 고난이 예술을 만들기 위해 필요했다고 말하는 대신, 이미 닥친 조건 안에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게 된다. 재난은 예술의 선물이 아니다. 그 뒤에도 살아가야 하는 삶을 놓치지 않는 시선이 그림의 문제가 된다.

경험은 날씨와 같지 않다

한 화가의 폭풍에는 기상에 대한 관찰만이 아니라 살아온 기억이 겹쳐질 수 있다. 이동과 생계, 몸의 불편함, 사람들과 맺은 관계는 같은 풍경을 다르게 보게 한다. 그러나 특정 사건과 특정 화면의 관계는 각각의 근거를 따라 살펴야 한다. 모든 검은 선을 같은 역사적 상처의 암호로 읽으면 작품마다 다른 형식이 사라진다.

반대로 화면의 역사성을 모두 지우고 순수한 자연만 남길 필요도 없다. 그림은 삶과 떨어진 곳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자연의 폭풍, 개인이 겪은 압박, 사회적 경험을 한 단어로 합쳐 버리지 않는 일이다. 서로 만날 수 있지만 서로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 층위들이다. 그 사이를 이어 주는 것은 구체적인 기록과 작품을 함께 읽는 작업이다.

그 구별을 지킬 때 폭풍의 형이상학은 사물 뒤의 거대한 운명을 선언하는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안정되어 있다고 믿는 질서는 무엇에 기대고 있는가. 그것이 흔들릴 때 몸은 어디에 자리를 찾는가. 화면은 그 질문을 선의 겹침과 작은 형상의 간격으로 돌려준다. 눈을 다시 내리면, 몸 아래 남아 있는 땅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