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Ⅰ 자연과 풍토

Ⅰ 자연과 풍토 · 2 / 100

마른 풀잎색의 존재론

하나의 색 안에서 달라지는 것들

The Ontology of Dried-Grass Colour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Where Do We Come From, and Where Are We Going? · 1992. 큰 절벽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른쪽 아래 바위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인 사람과 그 곁의 말이 있다. 왼쪽 먼 수면에 작은 배가 보인다. / A large cliff occupies most of the picture. At lower right a seated figure bows its head, with a pony beside it. A tiny boat appears on the distant water at left.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1992

먼저 하나로 보이는 세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1992)를 조금 떨어져 보면 화면이 하나의 누런 빛으로 다가온다. 하늘과 바다, 거대한 암벽과 그 아래의 작은 몸들이 서로 다른 색의 구역으로 분명하게 갈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가까이 보면 같지 않다. 암벽에는 짙은 결이 모이고, 수면에는 밝은 붓자국이 길게 퍼진다. 같은 계열의 색이 서로 다른 표면을 만든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변시지의 색을 하나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한 종류의 물감만 썼다는 뜻이 아니다. 밝기와 짙음, 두께와 붓자국의 방향이 화면 안에서 계속 달라진다. 색의 수를 줄여 보이게 하는 화면일수록 그 안의 작은 차이가 더 크게 작용한다. 처음에 하나로 보이던 세계는 오래 볼수록 여러 결로 나뉜다.

이 글에서 그 색을 마른 풀잎색이라 부르는 것은 안료를 새로 분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햇볕을 받고 바람에 말라 가는 풀잎을 떠올리며, 화면의 색을 시간의 감각으로 읽기 위해서다. 황토색이라는 색 이름을 틀렸다고 지우는 대신, 그 이름만으로는 다 전해지지 않는 경험을 덧붙이는 것이다.

사물마다 다른 색을 주지 않을 때

풀은 초록, 바다는 파랑이라는 구별은 사물을 빠르게 알아보게 한다. 변시지의 화면에서는 그 익숙한 길이 약해진다. 비슷한 색의 바다와 땅을 구별하기 위해 우리는 선의 방향, 붓자국의 밀도, 형상의 크기를 본다. 색이 나누던 역할의 일부를 선과 공간이 맡는다. 색채의 절제는 다른 조형 요소의 일을 늘린다.

그렇다고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앞의 작품에서 사람과 말은 암벽과 비슷한 빛 안에 있지만, 서로 같은 존재로 녹아들지 않는다. 작은 몸의 윤곽은 여전히 남고, 거대한 바위의 무게와도 구별된다. 공통의 바탕은 차이를 지우기보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다시 보게 한다.

이 관계를 모든 존재의 평등이라고 곧바로 부를 수는 없다. 같은 색을 나누어 가진다고 크기나 무게, 취약함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작고 암벽은 크다. 색은 둘을 한 세계에 놓지만, 둘 사이의 비대칭은 남겨 둔다. 오히려 같은 빛 안에 있기 때문에 그 크기의 차이가 더 가까이 느껴진다.

그러므로 한 색의 세계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된 세계와 다르다. 서로 다른 것들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완전히 분리되어 보이지 않는 세계다. 인간이 자연에 흡수되어 없어지는 장면보다, 자연과 다른 몸을 지닌 채 그 안에 머무는 장면에 가깝다. 이 색의 힘은 통합과 구별을 동시에 유지하는 데 있다.

풀잎에 남은 시간

마른 풀잎은 살아 있던 것의 흔적을 지닌다. 한때 물을 머금었고 자랐던 모양이 마른 뒤에도 남는다. 그래서 마른 풀잎색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낡았다는 느낌보다 변화의 시간이 들어 있다. 막 생겨난 빛이 아니라, 여러 날을 거쳐 달라진 빛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 비유가 그림의 색이 실제로 햇볕에 바랬다는 뜻은 아니다. 풀잎이 마르는 일과 물감으로 마른 느낌을 만드는 일은 다르다. 여기서 시간은 작품의 손상이나 변색을 설명하는 정보가 아니라, 색과 표면을 마주하며 생기는 감각이다. 화가는 물질을 통해 물질의 실제 나이와 다른 시간을 보이게 할 수 있다.

그 시간은 언제나 죽음만을 뜻하지도 않는다. 마른 풀잎 앞에서 어떤 이는 메마름을, 다른 이는 지난 계절을, 또 다른 이는 오래 남아 있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하나의 색이 특정 감정을 지시하지 않을 때 기억이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색은 슬픔을 명령하기보다 각자의 시간이 닿을 바탕이 된다.

눈이 촉감을 떠올리는 자리

이 색을 보고 거칠다거나 따뜻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미 시각의 어휘만을 쓰고 있지 않다. 눈앞의 표면에서 손의 감각을 떠올린다. 풀잎을 쥐었을 때의 가벼움, 마른 종이를 넘길 때의 소리, 오래된 벽에 손을 대었을 때의 서늘함 같은 기억이 색과 이어질 수 있다. 그림을 만지지 않아도 보는 일은 촉각의 상상을 불러온다.

이것을 모든 관람자가 함께 가진 하나의 민족적 기억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는 온돌방의 종이 바닥을 기억할 수 있고, 다른 누군가는 여름이 지난 들판을 떠올릴 수 있다. 서로 다른 기억이 같은 표면 앞에서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제주의 구체적인 풍토는 관람자의 삶과 만나면서 다른 감각의 길을 연다.

그렇다고 장소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마른 풀, 바다, 돌, 낮은 몸이라는 화면의 관계가 연상의 방향을 잡아 준다.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는 막연한 따뜻함과는 다르다. 그림은 기억을 자유롭게 열어 주면서도 눈앞의 선과 사물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 보는 사람의 삶과 화가가 만든 세계는 겹치되 하나로 같아지지 않는다.

빛과 검은 선의 역할

밝은 바탕이 넓게 이어질 때 화면은 어느 한 방향에서만 조명을 받는 풍경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빛이 사물 사이에도 머물러, 한 부분의 명암만으로 전체 공간을 설명하기 어렵게 한다. 이런 인상을 안에서 배어 나오는 빛이라 부를 수 있다. 다만 그것은 화면의 효과를 설명하는 비유이지, 사물이 실제로 스스로 빛난다는 주장은 아니다.

여기에 검은 선이 놓이면 눈의 움직임이 달라진다. 넓은 색면을 지나던 시선이 선의 가장자리에서 멈춘다. 나무와 몸, 배와 바위의 위치를 짚게 된다. 색이 화면을 이어 주는 동안 선은 그 안의 차이를 되살린다. 두 요소는 서로 반대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읽을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색을 줄이는 일이 언제나 화면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사물마다 다른 색을 주지 않으면, 선 하나가 맡아야 할 역할은 더 많아진다. 위치를 가르고 무게를 만들며 거리까지 전해야 한다. 적어진 색은 빈곤의 징표도, 저절로 깊이를 보장하는 표지도 아니다. 제한 속에서 형식이 얼마나 세밀하게 작동하는지가 관건이다.

색의 이름에서 화면의 관계로

마른 풀잎색을 제주의 흙과 그대로 일치시키면 이 선택의 복잡함을 놓친다. 실제 풍경에는 여러 색이 있고, 한 장소를 그리는 방법도 여럿이다. 풍토가 주어진 색을 그대로 옮기는 일과 풍토의 경험을 제한된 색으로 다시 구성하는 일은 다르다. 변시지의 색은 장소의 복사본보다 장소를 다시 보는 방법으로 읽을 때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그 색을 고향의 원래 색으로 되돌아간 결과라고만 말할 수도 없다. 화가는 이미 다른 장소의 빛과 다른 회화의 방법을 거쳐 왔다. 돌아온 자리에서 생긴 색에는 그 이동의 시간도 들어갈 수 있다. 귀환은 배운 것을 없애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배운 것의 관계가 달라지는 계기가 된다.

이 장에서 색의 존재론을 묻는 것은 누런 빛을 우주의 근원 물질로 세우려는 일이 아니다. 하나의 색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존재로 남는다는 것이 화면에서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 일이다. 그 질문은 거창한 색의 상징보다 사람과 바위의 크기, 바다와 하늘 사이의 선, 같은 빛 안에 놓인 거리에서 더 분명해진다.

다시 1992년의 화면을 본다. 암벽의 짙은 결 아래로 밝은 수면이 펼쳐져 있다. 멀리 작은 배 한 척이 보인다. 바다가 파랗지 않아도, 배가 놓인 물의 자리는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