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Ⅰ 자연과 풍토

Ⅰ 자연과 풍토 · 1 / 100

바람의 존재론

보이지 않는 힘과, 그 안에 있는 몸

The Ontology of Wind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Where Do We Come From, and Where Are We Going? · 1992. 큰 절벽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른쪽 아래 바위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인 사람과 그 곁의 말이 있다. 왼쪽 먼 수면에 작은 배가 보인다. / A large cliff occupies most of the picture. At lower right a seated figure bows its head, with a pony beside it. A tiny boat appears on the distant water at left.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1992

바람은 어디에 있는가

변시지의 제주 회화에서 바람을 찾으려면 사물의 자세를 먼저 보아야 한다. 나무가 기운 각도, 말이 고개를 낮춘 모양, 사람이 몸을 두고 있는 자리. 바람이라는 별도의 형체보다, 바람을 받고 있는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 대상을 보고 있던 눈은 곧 그 주위로 움직인다. 나무를 기울게 한 것이 사람의 자세에도 닿아 있는지 살피게 된다.

그림 속 나무는 실제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움직임을 느낀다. 사선이 시선을 한쪽으로 이끌고, 서로 다른 형상에서 비슷한 방향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향의 반복은 사물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떨어져 있는 것들을 하나의 힘 안에 놓이게 한다. 화면에 그려진 것은 멈춘 형상이지만, 그 형상들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따라서 바람은 나무 한 그루에 붙은 표시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나무와 집의 크기, 사람과 말의 간격, 그들 위에 펼쳐진 공간을 함께 보아야 한다. 같은 기울기도 주위가 좁으면 눌림으로, 넓으면 노출로 느껴질 수 있다. 바람의 세기는 선의 거침에만 있지 않다. 형상이 놓인 자리와 여백이 그 감각을 달라지게 한다.

보이지 않는 것과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바람은 고정된 윤곽을 내놓지 않지만, 그 작용은 몸과 사물을 통해 드러난다. 그렇다고 그림 안에 실제 바람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화가는 물감으로 바람의 효과를 느낄 조건을 만든다. 자연의 힘과 그 힘을 그리는 형식은 서로 연결되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이 구별은 작아 보이지만 중요하다. 바람을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부르면 어느 그림이나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고요한 화면의 가는 선과 격렬한 화면의 겹친 선은 다른 일을 한다. 전자는 조금만 움직여도 깨질 듯한 균형을, 후자는 이미 흔들리고 있는 질서를 느끼게 할 수 있다. 하나의 이름으로 묶기 전에 그 차이를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 바람의 존재를 묻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현상을 곧바로 철학의 궁극적 존재와 동일시하는 일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알아차리기 위해 반드시 그것을 정면에서 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다른 몸에 생긴 변화를 통해서도 세계를 알게 되는가.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보이는 사물의 배후에 또 하나의 실체를 세우기보다, 사물과 몸이 맺는 관계를 더 세밀하게 읽는 것이다.

풍토 안에서 자신을 만나는 일

바람은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의 일부이면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닿는 힘이다. 먼 산을 볼 때에도 발은 땅을 딛고 있다. 추위를 느끼는 몸과 추운 풍경을 보는 눈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변시지의 인물을 풍토 안에서 읽는다는 것은 그 몸을 화면 속 장식에서 꺼내, 이미 세계와 관계 맺고 있는 존재로 보는 일이다.

와쓰지 데쓰로의 『풍토』는 이러한 읽기에 한 가지 길을 열어 준다. 추위의 경험은 독립된 주체가 바깥의 온도를 관찰하는 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추위 속에 있고, 다른 사람들과 그 추위를 겪는다. 이 관점에서 풍토는 자연환경과 인간의 삶이 따로 존재하다가 나중에 만나는 무대가 아니다. 삶이 처음부터 펼쳐지는 관계의 자리다.

이 생각을 변시지에게 적용할 때 중요한 것은 기후가 민족의 성격이나 화가의 형식을 결정한다는 결론이 아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같은 바람을 맞는다고 같은 그림이 나오지도 않는다. 여기서 와쓰지는 직접 영향의 증거로 호출되는 스승이 아니라, 몸과 장소를 함께 생각하도록 돕는 비교의 상대다.

풍토와 그림 사이에는 화가의 작업이 있다. 그가 익힌 기법, 눈에 오래 남은 장면, 되풀이하여 바꾼 구도가 있다. 바람이 붓을 대신 움직인 것은 아니다. 화가는 겪은 세계를 다시 보면서 무엇을 줄이고 어디에 선을 남길지 선택했다. 풍토를 삶의 조건으로 읽을수록, 그 조건 안에서 이루어진 선택도 함께 보아야 한다.

형태와 힘이 만나는 선

변시지의 검은 선은 사물의 윤곽을 만들면서 그 사물에 작용하는 힘을 느끼게 한다. 나무를 이루는 선이 동시에 기울어짐을 드러낸다. 사람의 등을 그은 선은 몸의 무게를 전한다. 선을 윤곽이 아니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윤곽을 그리는 일이 그 윤곽에 가해지는 힘을 나타내는 일과 겹친다는 점이다.

거칠고 성긴 부분에서는 바탕이 붓자국 사이로 드러난다. 선은 고른 띠처럼 이어지지 않고 끊겼다가 다시 닿는다. 굵기의 변화와 번짐, 멎은 자리 때문에 우리의 눈도 일정한 속도로 지나가지 못한다. 그림이 움직이는 대신 보는 일이 움직인다. 바람의 감각은 그 눈의 속도 안에서도 생겨난다.

이러한 필치에서 서예의 붓놀림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비슷한 인상만으로 계보를 확정할 수는 없다. 또 화면이 건조하게 느껴진다는 사실과 실제 물감의 배합은 구별해야 한다. 우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선이 형태를 알아보게 하면서, 그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듯한 감각도 만든다는 것이다.

몸이 감정에 앞설 때

기울어진 몸 앞에서 우리는 피로를 떠올릴 수 있다. 낮아진 말의 머리에서 오래 머무는 시간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개를 숙였다고 곧 슬픈 것은 아니다. 균형을 잡는 자세일 수도 있고, 잠시 쉬는 자세일 수도 있다. 감정은 몸에 적힌 이름표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몸과 주위 공간을 오가며 조금씩 생겨난다.

같은 자세라도 곁에 누가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가까운 말이 몸의 작음을 더 두드러지게 할 수도 있고, 함께 머무는 거리가 될 수도 있다. 멀리 있는 배 역시 이별의 증거로만 읽히지 않는다. 기다림일 수도, 생활의 길일 수도 있다. 그림의 적은 요소들은 정해진 감정을 반복하는 대신 서로의 뜻을 바꾼다.

바람이 감정과 만나는 지점은 바로 이 불확실함에 있다. 보이지 않는 힘을 몸의 변화로 느끼듯, 말해지지 않은 마음을 자세와 간격으로 헤아리는 것이다. 다만 두 경험은 닮았을 뿐 서로의 증명이 아니다. 폭풍이 있다고 분노를 확정할 수 없고, 고요하다고 마음이 평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림 앞에 남는 시간

이렇게 읽을 때 바람은 단순한 소재를 넘어선다. 나무의 옆에 추가된 기상 정보가 아니라, 화면의 여러 존재를 서로 관련짓는 방식이 된다. 작은 사람을 보기 위해 넓은 공간을 함께 보고, 한 줄의 기울기를 느끼기 위해 다른 선들의 방향을 돌아보게 한다. 보는 일은 사물의 목록에서 관계의 경험으로 옮겨 간다.

그 관계 안에서 인간은 세계의 주인으로 홀로 서 있지 않다. 그렇다고 자연의 힘을 받는 수동적인 물체로만 남는 것도 아니다. 몸은 힘을 받으며 자세를 바꾼다. 화가는 그 자세를 보고 선을 바꾼다. 관람자는 선을 따라가며 자신의 몸을 의식한다. 바람은 이 서로 다른 움직임을 하나의 말로 덮지 않고 연결하는 이름이 될 수 있다.

그림은 움직이지 않는다. 나무의 선은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조금 더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