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Ⅳ 기법과 매체

Ⅳ 기법과 매체 · 55 / 100

물감과 흙

닮은 감각과 다른 물질

Paint and Earth

풍랑 / Stormy Seas · 1983. 비스듬한 밝은 획들 아래 가까이 선 사람과 말, 뒤쪽의 작은 집. / A person and pony close together beneath diagonal light strokes, with a small house behind.
〈풍랑〉 · 1983FŪDO 067
풍랑 — 표면 부분 / Stormy Seas — Surface Detail · 1983
〈풍랑 — 표면 부분〉 · 1983FŪDO 067
열대의 태양 / The Tropical Sun · 1983
〈열대의 태양〉 · 1983FŪDO 008

흙을 그리는 것, 흙을 넣는 것

〈풍랑〉의 바탕을 가까이 보면 밝고 어두운 자국이 거칠게 만난다. 그 표면에서 마른 땅이나 바람에 바랜 풀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흙처럼 느껴지는 것과 실제 흙을 재료로 넣은 것은 다르다. 이 차이가 물감과 흙을 함께 말하는 출발점이다.

흙의 모양을 그릴 수 있다. 흙에서 얻은 안료를 쓸 수도 있다. 특정 장소의 흙을 물감에 섞을 수도 있고, 그런 첨가 없이 흙의 감각을 불러올 수도 있다. 이 일들은 겹칠 수 있지만 같은 사실은 아니다. 어느 경우에 해당하는지는 작품별 기록과 재료의 확인을 필요로 한다.

변시지의 회화에서 먼저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은 감각의 관계다. 물감의 색과 끊긴 듯한 획, 바탕이 남은 자리가 함께 건조한 인상을 만든다. 그 인상을 말하기 위해 확인되지 않은 배합법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물감이 흙과 다르다는 사실을 남겨두어도 풍토의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름은 단지 덜어낼 윤기가 아니다

캐나다 보존연구소는 유화 물감을 건성유에 안료가 분산된 재료로 설명한다. 기름은 그저 표면을 번들거리게 하는 불필요한 성분이 아니다. 따라서 작품의 광택이 적다는 관찰을 기름이 제거되었다는 결론으로 곧바로 옮길 수 없다. 재료의 구조와 보이는 효과는 나누어 살펴야 한다.

〈풍랑〉의 밝은 획에도 고르게 덮인 곳과 바탕이 드러나는 곳이 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붓과 물감, 밑바탕이 그 효과를 만들었는지는 별도의 문제다. 사진 속의 질감이 제작 순서를 모두 되돌려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 구별은 기술을 축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을 더 정확히 묻기 위한 것이다. 거칠다는 한마디로 서로 다른 재료의 작용을 덮지 않는 것. 화가의 손이 만난 조건을 존중하려면, 효과를 느끼는 말과 공정을 설명하는 말을 같은 속도로 쓰지 않아야 한다.

마른 획 안에도 기다린 시간이 있다

갈필이라는 말은 화면에서 고르게 채워지지 않은 획의 성격을 읽는 데 도움이 된다. 선 안에 남은 밝은 틈이 방향을 나누고, 같은 획의 시작과 끝이 달리 느껴진다. 다만 그 말이 유화 물감의 기름을 모두 뺐다는 뜻으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보이는 붓질의 효과를 가리킨다.

변시지는 구술에서 유화가 어느 정도 마른 뒤 다시 손대는 작업을 설명했다. 크기에 따라 오래 걸리는 작품도 있었다고 말했다. 빠르게 지나간 것 같은 표면에도 칠하고 기다리고 다시 보는 시간이 있을 수 있다. 즉흥적으로 보이는 한 획이 작품 전체의 제작 시간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물감은 손이 원하는 모습만을 곧바로 내주지 않는다. 화가의 판단도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기다리는 동안 화면을 다시 보게 되고, 먼저 세운 구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 풍토의 감각이 작품이 되는 과정에는 바람을 겪은 시간뿐 아니라 물감과 함께 보낸 시간도 있다.

모래를 말한 사람은 누구의 작업을 설명했는가

제공된 구술채록에는 유화 물감과 모래를 섞어 두껍게 칠한다는 설명이 있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 변시지는 자신의 제작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추상화를 이야기한다. 문장만 떼어놓으면 달라지는 사실이다. 누가 말했는가와 누구의 작업을 말했는가는 함께 확인해야 한다.

이 대목은 변시지가 흙이나 모래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증거도 아니다. 그것을 확인하려면 해당 작품과 제작 기록을 따로 살펴야 한다. 다만 이 구술을 그의 첨가 기법을 입증하는 직접 증언으로 삼을 수는 없다. 알지 못하는 부분을 남기는 편이 사실과 해석을 모두 지킨다.

재료의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비평까지 멈출 필요는 없다. 〈풍랑〉의 표면이 왜 마른 땅을 떠올리게 하는지, 밝은 자국과 검은 선이 어떤 마찰을 만드는지는 여전히 읽을 수 있다. 감각의 정확함은 확인되지 않은 물질의 이름을 붙이는 데서 오지 않는다.

풍토의 물질을 옮기기보다 감각을 다시 만들기

제주를 그리기 위해 반드시 제주의 흙을 넣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장소를 떠올리게 하는 일과 그 장소의 물질을 직접 가져오는 일은 다른 방식의 작업이다. 변시지의 경우 색과 선, 낮은 집과 기운 몸이 서로 만나 풍토를 느끼게 한다. 물질의 이동만이 장소를 잇는 길은 아니다.

물감을 서양의 산업, 흙을 동양의 근원으로 나누는 구분도 충분하지 않다. 그런 이름은 실제 화면에서 물감이 하는 일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어느 면을 덮고 어느 틈을 남기는가. 선이 바탕과 어디서 떨어지고 어디서 섞여 보이는가. 물질의 차이는 그 구체적인 작용에서 읽어야 한다.

풍토는 색의 출처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조건의 얽힘으로 읽힌다. 몸이 바람을 받고, 집이 낮게 자리하며, 밝은 면에 작은 배가 남는다. 그 관계를 만들어내는 물감은 흙과 같아지지 않아도 충분히 무겁고 건조하게 느껴질 수 있다. 닮음은 동일해지는 일보다 넓다.

균열은 모두 아름다운 시간이 아니다

오래된 표면의 흔적은 시간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물감의 균열을 모두 해가 없는 자서전이라고 부르면 작품의 상태를 놓칠 수 있다. 캐나다 보존연구소는 안정된 균열과 들뜨거나 떨어질 위험이 있는 상태를 구별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시간의 비유가 보존의 판단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이 글에 실린 복제 도판에서는 붓질의 끊김을 볼 수 있으나, 그것을 실제 균열이나 박락으로 판정하지 않았다. 화면을 확대해 생긴 거친 인상과 원화 표면의 손상도 같은 것이 아니다. 재료의 시간은 원화의 상태 기록과 적절한 검사를 통해 더 분명해질 수 있다.

화가가 남긴 거침을 존중하는 일과 진행되는 손상을 방치하는 일은 다르다. 둘을 구별하려는 관심도 작품을 읽는 태도의 일부다. 풍화된 땅을 떠올리는 감상은 남길 수 있다. 다만 그 감상 때문에 실제 물감이 잃어버리는 것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복제 이미지에서 원화로 돌아가는 길

복제 이미지는 작품에 접근하는 중요한 문이다. 그러나 빛의 방향과 촬영, 화면의 밝기에 따라 표면의 인상은 달라질 수 있다. 여기서 본 것은 제공 도판의 색과 획이다. 원화의 실제 광택과 안료 성분까지 확인한 것은 아니다. 보여주는 매체의 한계를 함께 적는 이유다.

앞으로 재료 분석과 제작 기록이 더해지면 해설은 더 정확해질 수 있다. 무엇이 밝혀졌는지뿐 아니라 어떤 작품의 어느 부분을 확인했는지도 남겨야 한다. 한 점에서 확인한 재료를 모든 작품으로 넓히지 않는 것이다. 같은 마른 풀잎색 안에도 서로 다른 제작의 시간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기록은 그림의 시적 울림을 없애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을 믿고 오래 볼 수 있게 한다. 흙을 닮았다고 말할 때 그것이 관객의 경험인지, 재료의 확인인지 분명해진다. 서로 다른 종류의 말이 자기 자리를 가지면 작품은 설명보다 더 넓게 남는다.

물감은 물감으로 남아 풍토를 부른다

물감과 흙을 함께 읽는 일의 끝은 둘이 같아졌다고 선언하는 데 있지 않다. 다른 물질을 통해 한 장소의 감각이 다시 생기는 일을 보는 데 있다. 눈으로 본 빛과 몸으로 겪은 바람, 손이 다룬 물감이 같은 화면에서 만나되 서로의 차이를 잃지 않는다.

그 차이 안에 화가의 일이 있다. 세계를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므로 고르고, 옮기고, 다시 보아야 한다. 물감은 단순히 마음의 명령을 전달하는 통로가 아니다. 기다려야 하고 손을 다시 대야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풍토가 그림이 될 때에는 그 조건까지 함께 남는다.

〈풍랑〉의 작은 몸들 위로 밝은 획이 지나간다. 가까이 보면 그 획 안에도 바탕이 남아 있다. 눈이 물감의 끝에 머문다. 조금 물러서면 다시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