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풍토는 풍경이 아니다/논증 IX/제20장

학술판 ·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 제20장 · 31 / 34

풍토의 번역

pungto, fūdo, milieu와 번역의 비대칭

논증 IX · 근대성은 병렬적 비교와 비대칭 번역 속에 위치한다

변시지, 〈이대로 가는 길〉, 2006
도판 29. 변시지, 〈이대로 가는 길〉, 2006. 작품 100 · FŪDO 054 작품 보기 →
변시지, 〈난무〉, 1997
도판 30. 변시지, 〈난무〉, 1997. 작품 100 · FŪDO 097 작품 보기 →

1워싱턴의 두 그림

2007년, 미국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국립자연사박물관 한국관에 변시지의 그림 두 점이 걸렸다. 〈난무〉와 〈이대로 가는 길〉(2006)이다. 〈이대로 가는 길〉에는 소나무 여러 그루가 선 낮은 언덕이 있고, 그 아래 흰 길을 지팡이 짚은 사람이 걷는다. 말 한 마리가 그 앞쪽, 화면 왼쪽에 서 있고, 먼바다에 배 한 척이 떠 있다. 두 점은 열 해 동안 그 자리에 있다가 2017년에 돌아왔다.1 대여가 어떤 경위로 이루어졌는지는 당시 기사들이 자세히 적지 않는다.2

두 그림은 영어로 'Boisterous Dance'와 'Going the Way as It Is'라 소개되었다.3 '이대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에는 받아들임과 이어 감이 함께 들어 있다. 영어 제목은 그 두 뜻을 'as it is'와 'going'에 나누어 담았다.

그 앞에 선 사람들 대부분은 '풍토'라는 말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림은 그 말 없이도 그들 앞에 있었다. 풍토는 번역될 수 있을까.

2pungto와 fūdo, milieu: 번역의 정치와 개념의 범위

풍토(風土)는 한국어와 일본어에서 공유되는 한자어지만, 와쓰지 데쓰로가 1935년 『풍토』에서 철학적 개념으로 전개한 fūdo는 단순한 기후나 자연환경을 뜻하지 않는다.4 그것은 인간의 공간적·사회적 존재와 환경이 분리되지 않는 관계 구조를 가리킨다.

영어 번역의 climate는 이 관계를 기후 쪽으로 좁힐 위험이 있다.5 아우구스탱 베르크는 와쓰지의 fūdo를 설명하면서 milieu가 더 적절한 번역이라고 제안했다. milieu는 인간과 환경의 상호구성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이 번역 문제는 단순한 어휘 선택이 아니다. climate로 옮기면 자연환경의 영향이 강조되고, milieu로 옮기면 인간·사물·사회·장소가 함께 구성되는 관계가 강조된다. 이 책이 풍토를 '삶의 조건'이자 '형식의 매개'로 읽는 이유도 이 차이에 있다.

다만 변시지의 풍토 개념을 와쓰지의 이론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변시지가 와쓰지를 읽었다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으며, 그의 풍토론은 자신의 이동 경험, 한국의 근대미술, 제주 생활, 작가적 사유 속에서 형성되었다. 와쓰지와 베르크는 설명의 틀이지 기원의 증거가 아니다. 화가는 『예술과 풍토』의 같은 제목 글을 두고 "그 글 자체는 일본에서부터 생각했던 글"이라고 했다.6

3회화적 번역: 낱말 이전의 형식

그림이 국경을 건널 때 가장 먼저 이동하는 것은 개념어가 아니라 형식이다. 기운 선, 마른 풀잎색, 먼 배, 낮은 집, 넓은 여백은 '풍토'라는 말을 모르는 관람자에게도 지각된다.

그러나 보인다는 사실이 곧 같은 의미로 읽힌다는 뜻은 아니다. 캐럴 네비스가 돌담·굽은 소나무·파도에서 바람을 읽은 것은 하나의 번역 사례다.7 그의 해석은 제주의 생활 경험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지만, 형식이 다른 문화권의 언어로 재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마른 풀잎색'을 영어로 the color of dried grass라고 옮기는 선택도 같은 문제를 드러낸다. ochre가 안료와 색상 범주를 강조한다면, dried grass는 햇볕·건조·시간의 과정을 호출한다. 번역은 동일성을 복제하는 작업이 아니라 어떤 의미 층위를 우선할 것인지 결정하는 비평적 행위다. 완전한 등가가 아니라 접촉과 어긋남을 전제로 하는 번역론의 비유도 이 점을 설명한다.8

4지역성과 세계성 사이의 비대칭 번역

변시지는 작품 감상이 지식의 전달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관람자가 자신의 경험을 더한다고 보았다.9 이 관점에서 국제적 수용은 '제주를 정확히 이해했는가'라는 시험으로 환원될 수 없다.

동시에 모든 해석이 동등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작품의 도상, 작가의 기록, 제주 생활사의 맥락과 충돌하는 독해는 비평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세계성은 맥락을 지우는 자유로운 투사가 아니라, 맥락과 관람 경험 사이의 긴장 속에서 형성된다.

"가장 지방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10은 지역성이 자동으로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선언으로 읽기보다, 다른 장소에서 대체될 수 없는 구체성이 오히려 번역의 출발점이 된다는 주장으로 읽는 편이 타당하다.

풍토의 세계성은 동일성의 확장이 아니라 번역 가능성과 번역 불가능성이 함께 남는 상태다.

5풍토모더니즘의 국제적 언어

이 책은 영어에서 한국어 풍토를 로마자로 옮긴 pungto를 먼저 제시하고, 개념 설명에서는 milieu를 사용한다. 분석어 풍토모더니즘도 고유 사조명으로 고정하지 않고, 문맥에 따라 "a modernism of milieu"로 풀어 쓴다. climate는 기후결정론적 의미가 강해 핵심 번역어로 쓰지 않는다. 다만 이 표기는 개념을 다루는 이 책에 한정한다. 같은 저자의 교양판 『싸우지 않는 모더니즘』과 byunshiji.org 아카이브는 Fūdo를 쓴다. 대중 독자와 아카이브 검색에서는 이미 자리 잡은 이름을 지키고, 개념의 출처와 번역을 따지는 학술판에서는 pungto와 milieu를 쓴다. 두 표기는 서로를 고치지 않고 쓰임에 따라 나뉜다.

일본어 음역 fūdo는 와쓰지의 개념을 직접 지칭할 때만 남긴다. 변시지의 풍토를 국제적으로 설명할 때에는 한국어 pungto와 관계론적 의미를 살리는 milieu를 구분하여 사용한다. 번역어를 하나로 고정하지 않는 이유는 개념의 역사적 출처와 작품에서 새로 구성되는 의미를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다.

변시지의 그림이 세계미술사 안에서 갖는 의미도 이 지점에 있다. 그것은 제주라는 지역적 표지를 보편적 양식으로 정제한 결과가 아니라, 지역적 경험이 회화 형식으로 번역되고, 다시 다른 장소에서 해석될 수 있는 과정을 드러내는 사례다.

풍토는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다. 그러나 형식은 번역을 시작하게 한다.

주와 출처

  1. ↑ Kwon Mee-yoo, 「Byun Shi-ji's works return from Smithsonian」, 『The Korea Times』(2017. 8. 22); Park Yuna, 「Modern artist Byun Shi-ji offers comfort revealing severe loneliness in paintings」, 『The Korea Herald』(2020. 10. 21). 두 기사 모두 국립자연사박물관, 2007년부터 10년 대여, 2017년 반환이라 적는다. 한국관(Korea Gallery)이라는 이름은 『The Korea Times』에 있다. 홍성후도 2007년 상설 전시로 적는다. 〈이대로 가는 길〉은 112×162cm(『예술과 풍토』 2022년 재간본의 도판 설명). byunshiji.org 작품 100은 〈난무〉를 1997년 작으로 싣고(FŪDO 097), 〈이대로 가는 길〉(2006)은 FŪDO 054. 〈이대로 가는 길〉의 화면(소나무 선 언덕, 흰 길 위의 지팡이 짚은 사람, 그 앞쪽 왼편의 말, 먼바다의 배)은 그 도판으로 확인.
  2. ↑ 『The Korea Times』(2017. 8. 22). 당시 스미스소니언의 정책분석실장이던 네비스가 제주를 찾았다가 화가를 알게 되었다고 적는다. 전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두 기사 모두 적지 않는다.
  3. ↑ 두 기사의 영어 제목. 『The Korea Times』는 'Going the way as it is'로 적는다.
  4. ↑ 和辻哲郎, 『風土 — 人間学的考察』(岩波書店, 1935). 첫머리의 "ある土地の気候、気象、地質、地味、地形、景観などの総称"을 풀어 쓴 것이다. 본문의 '날씨'는 기상(気象), '땅과 흙의 성질'은 지질(地質)과 지미(地味), '땅의 생김새와 경치'는 지형(地形)과 경관(景観)을 옮긴 말이다. '지미'는 땅의 기름진 정도를 말한다. 자연환경이 아니라 '일상의 직접적인 사실'로서의 풍토를 다룬다는 점은 교토대학 문학연구과의 심포지엄 기록(「和辻哲郎「風土」論の可能性と問題性」)을 참고.
  5. ↑ Watsuji Tetsurō, A Climate: A Philosophical Study, trans. Geoffrey Bownas (Tokyo: Ministry of Education, 1961); 개정판 Climate and Culture: A Philosophical Study (New York: Greenwood Press, 1988). Watsuji Tetsurô, Fûdo, le milieu humain, commentaire et traduction par Augustin Berque (Paris: CNRS Éditions, 2011). 영어 번역 서지는 『스탠퍼드 철학 백과』 「Watsuji Tetsurō」를 따름. 한국어 로마자 표기로는 pungto다.
  6. ↑ 『변시지 구술채록문』(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 채록연구 이인범) 제6차 구술(2005년 1월 19일), 255쪽. 『예술과 풍토』에 실린 같은 제목의 글을 두고 "그 글 자체는 일본에서부터 생각했던 글이에요"라고 했다. 채록자는 이폴리트 텐(Hippolyte Taine, 1828~1893)의 책이 1930년대 일본에서 번역되어 많이 읽혔다며 풍토에 관한 것이냐고 물었고, 그는 "프랑스? 잘 모르겠어"라고 답했다. 텐은 『예술철학』에서 예술을 인종·환경·시대로 설명했다.
  7. ↑ 캐럴 네비스(Carole Neves, 스미스소니언 연구소 정책분석실장), 「화가와 바다: 변시지」. 영어 원문: "well worn stone walls, crooked pine trees, and assorted patterns of waves"; 색은 "The color ochre, Byun noted, is the color of the sea when the natural light reaches a peak"; 화가의 말은 "To appreciate art, the viewer needs to look at a work of art and add his or her meaning. In sum, works of art are co-created by artists and spectators".
  8. ↑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번역가의 과제(Die Aufgabe des Übersetzers)」(1923). 본문은 다음 대목을 풀어 쓴 것이다. "Wie die Tangente den Kreis flüchtig und nur in einem Punkte berührt... so berührt die Übersetzung flüchtig und nur in dem unendlich kleinen Punkte des Sinnes das Original, um... ihre eigenste Bahn zu verfolgen."
  9. ↑ 변시지, 『예술과 풍토』(열화당, 1988), 「작품을 아는 것과 맛보는 것」.
  10. ↑ 『변시지 구술채록문』 제6차 구술, 275쪽. 채록자가 한 평론의 요지를 말한 뒤의 대답으로, "...가장 지방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런 이야기겠지 뭐"로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