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풍토는 풍경이 아니다/결론

학술판 ·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 결론 · 32 / 34

풍토가 형식이 될 때

유배·축복·회화의 자리

변시지, 〈어느 흥겨운 바닷가의 한나절〉, 1979
도판 31. 변시지, 〈어느 흥겨운 바닷가의 한나절〉, 1979. 작품 100 · FŪDO 080 작품 보기 →

1사람 없는 바닷가

1979년에 그린 한 그림은 원래 자료에 〈어느 흥겨운 바닷가의 한나절〉이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어 있다.1 작품 목록에는 〈어느 흥겨운 날〉이라는 짧은 제목으로도 올라 있다. 그런데 그림 속에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바닷가가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왼쪽에 마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가지에 까마귀 세 마리가 앉거나 내려앉는다. 오른쪽 물 위에는 해가 낮게 떠서 물결에 빛을 남기고, 그 오른쪽 조금 아래에 작은 배 한 척이 있다. 사람은 없지만 그림은 멈춰 있지 않다.

제목과 화면 사이의 이 어긋남이 결론의 출발점이다.

2유배라는 비유

화가는 자기 삶을 유배라 하고, 그림 그리는 일을 축복이라 했다.2 이 책은 두 낱말 사이의 관계를 하나의 축으로 삼는다.

유배는 본래 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던 형벌이다. 변시지는 그런 벌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니 그가 말한 '유배'는 역사적 사실의 이름이 아니다. 고향을 떠나 있고, 돌아와서도 완전히 닿지 못하는 삶의 상태를 두고 그 자신이 빌려 쓴 비유다.

그의 삶은 제주에서 오사카, 도쿄, 서울을 거쳐 다시 제주로 이어졌다. 어린 시절의 이사, 일본에서의 미술 공부, 서울 생활, 1975년의 제주 정착은 저마다 사정이 다르다. 이것들을 '유배'라는 한 말로 묶은 것은 화가 자신이다. 그 말을 이 삶의 어느 대목에 얼마나 걸쳐 읽을지는 이 책의 해석이다. 이 점을 먼저 밝혀 둔다.

3흥겨움의 주인공

바다는 사람이 없어도 바다다.

그렇다면 제목의 '흥겨움'은 사람의 기분만 가리키는 말이 아닐 수 있다.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도 계속되는 세상의 움직임을 그렇게 부른 것일 수 있다. 이렇게 읽으면 흥겨움의 주인공은 사람만이 아니라 바다와 바람, 곧 풍토로 넓어진다. 그림의 한가운데에서 사람이 한 걸음 물러난다.

사람이 없어도 풍토는 남는다. 서론은 언덕 위의 노인으로 시작했고, 논증 VI~VIII의 여러 장(제12~17장)에서 몸은 굽고 낮아졌다. 이 그림에는 그 사람마저 없다. 다만 이 그림은 제주에 온 지 네 해 만에 그린 것이다. 사람 없는 화면이 말년의 결론인 것은 아니다. 이 책이 그것을 끝에 놓았을 뿐이다.

4유배를 미학화하지 않기

자기 삶을 유배라 하고 그림 그리는 일을 축복이라 한 이 말은 강력하지만 위험하다. 그것을 예술가의 고통이 곧 작품의 가치가 된다는 낭만적 서사로 읽으면, 가족과의 거리, 질병, 시대의 폭력, 노동의 현실이 미학적 자원으로 소비될 수 있다.

이 책의 결론은 반대다. 고생은 형식이 아니다. 고생과 작품 사이에는 반복되는 작업, 관찰의 습관, 재료의 선택, 지우기와 덧칠, 장소에 머무는 시간이 있다. 삶의 조건이 예술이 되는 것은 작업이라는 매개를 통과할 때뿐이다.

따라서 '축복'은 고통의 보상이 아니라 작업이 가능하게 한 변환의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불가피한 조건을 수용하거나 긍정하는 철학적 전통과 병치할 수 있지만,3 4 변시지의 '축복'은 받아들임에서 멈추지 않고 작업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유배의 시간이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간을 선·색·여백·자세로 변형하는 행위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분은 변시지 회화를 신화화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좌우명이 지닌 미학적 의미를 보존한다.

5결론: 풍토가 형식이 될 때

이 책은 변시지의 제주 회화를 '제주를 그린 그림'에서 '제주에서 형성된 회화'로 옮겨 읽었다. 풍토는 도상의 배경이 아니라 지각과 신체, 작업과 기억을 매개하여 형식을 재조직하는 조건이었다.

그 결과 수평선은 고정된 좌표에서 흔들리는 눈높이로, 마른 풀잎색은 장소의 표지에서 시간의 색으로, 검은 선은 윤곽에서 힘과 자세의 기록으로, 여백은 결핍에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장으로 이동한다. 굽은 몸과 낮은 집, 멈춘 말과 빈 배는 이 형식이 서로 다른 존재에 새겨진 변형이다. 자연의 힘을 이기려 들지 않으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형식을 이 책은 '싸우지 않는 미학'이라 부르고, 시대의 힘에 대한 작가의 기억이 그 형식과 만나는 층위를 '저항의 자세'라 부른다.

이러한 형식은 일본에서 배운 근대 회화와 단절함으로써 생긴 것이 아니다. 오사카·도쿄의 인물화, 서울 비원의 세밀한 관찰, 제주에서의 장기적 거주가 서로 겹쳐지며 변형된 결과다. 그러므로 변시지의 모더니즘은 중심의 양식을 지방적으로 수용한 사례가 아니라, 이동한 기술이 특정한 풍토에서 다시 구성된 사례로 보아야 한다.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풍토는 작품 바깥에 있는 설명이 아니라, 작품의 선과 색과 몸과 빈 곳이 그렇게 존재하게 된 관계의 조건이다. 이 조건을 형식으로 바꾸는 지속적인 작업—그것이 이 책이 변시지 회화에서 확인한 모더니즘의 한 형태다.

그는 자기 삶을 유배라 하고, 그림 그리는 일을 축복이라 했다. 그 둘 사이에는 작업이 있었다.

주와 출처

  1. ↑ 〈어느 흥겨운 바닷가의 한나절〉(1979). 화면은 byunshiji.org 작품 100의 도판(FŪDO 080)으로 확인.
  2. ↑ 화가는 생전에 자기 삶을 '유배'라 하고 그림 그리는 일을 '축복'이라 했다. 저자(아들)가 직접 들은 말이다(저자 확인, 2026-09-29). 구술채록문과 『예술과 풍토』에는 '삶은 유배, 예술은 축복'이라는 문장이 글자 그대로 실려 있지 않다. 구술에서 그는 제주를 조선 시대의 유배지로 여러 번 말했고(제7차 303쪽, 306~307쪽), 1975년 제주로 갈 때 사람들이 유배 가는 것처럼 여겼다고도 했다(제3차 140쪽). 육필원고 전사본(편지·구술채록 PDF 제외)에서도 이 문장은 글자 그대로 찾지 못했다. 구술채록 PDF는 쪽마다 옮기지 못했으므로 대조가 남아 있다.
  3. ↑ 『장자』 「인간세(人間世)」. "知其不可奈何而安之若命 德之至也".
  4. ↑ 독일의 철학자 니체(1844~1900)는 『즐거운 학문』 276절에서 '운명애(amor fati)'를 말한다.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까지 긍정하려는 태도라는 점에서 이 장의 문제와 나란히 놓을 수 있다. 변시지와의 영향 관계를 뜻하지 않는다. 다만 육필 노트2(이미지 Image_20240121_0040)에는 니체의 말 「真理로 망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藝術를 가지고 있다」가 옮겨 적혀 있다(판독 상). 화가가 이 말을 노트에 적어 두었다는 데까지만 확인되며, 그것이 이 장의 '축복'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