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비평/풍토는 풍경이 아니다/논증 VIII/제16장
학술판 ·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 제16장 · 26 / 34
폭풍과 굽은 몸
견딘 자세와 굽음의 형식
논증 VIII · 싸우지 않되 사라지지 않는다
〈태풍〉(1983)에서 바위 위의 사람은 등을 둥글게 굽힌 채 바다를 본다. 〈노송과 노인〉(1987)의 노인도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기울었다. 이 장은 폭풍 그림과 굽은 몸을 한 장에 놓고, 바람과 시대의 힘 앞에서 몸이 어떤 형식으로 남는지 묻는다. 서론에서 제안한 두 분석어 '싸우지 않는 미학'과 '저항의 자세'를 작품과 함께 다시 검토하는 자리다.
사례 A폭풍과 시대 — 자연의 힘과 정치적 기억의 중첩
1폭풍의 화가
〈태풍〉(1983)의 제목은 날씨의 이름이다.1 그것도 가장 센 바람의 이름이다. 화면에는 사람이 하나뿐이다. 오른쪽 아래 물가의 검은 바위 위에 웅크리고 앉아, 등을 둥글게 굽힌 채 바다를 본다. 왼쪽 절벽 끝에는 말 한 마리가 서 있고, 절벽 위의 작은 소나무들은 모두 한쪽으로 기울었다. 변시지는 '폭풍의 화가'라 불린다.2 이 그림은 그의 폭풍 그림 가운데 하나다.
이 사례는 그의 폭풍이 날씨일 뿐인지를 묻는다.
2폭풍은 먼저 폭풍이다
제주는 태풍이 자주 지나는 길목에 있다. 변시지의 폭풍은 먼저 이 섬의 폭풍이다.
그 무렵의 사실도 있다. 1980년대 초, 한국은 군인 출신이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 아래에 있었다. 〈태풍〉은 그 시기에 그려졌다.
그리고 화가 자신의 말이 있다. 2005년의 구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바람 속에서 살아남으려 한 제주 사람들의 의지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자신의 마음이 "심리적으로" 소재와 맞아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국을 드러내 그리지 않고 예술로 승화해야 한다고 했다. "태풍도 그냥 태풍이 아니라 그걸 예술로 승화시킨 태풍"이라는 것이다.3
다만 이 구술은 〈태풍〉이 제작된 1983년의 동시대 기록이 아니라 약 이십여 년 뒤의 회고적 진술이다. 따라서 이를 작품의 최초 의도를 직접 증명하는 자료로 사용하기보다, 화가가 말년에 자신의 폭풍 회화를 정치적 기억과 어떻게 다시 연결했는지를 보여 주는 후대의 자기해석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렇다고 폭풍이 시대의 비유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섬의 바람은 그대로 분다. 그 바람 위에 시대가 겹친다.
화가 자신도 『예술과 풍토』에서 예술의 바탕을 이루는 조건으로 민족과 시대와 기후를 함께 꼽았다.4 이 책은 풍토를 날씨만이 아니라, 사람이 그 안에서 살아 낸 시간까지 품는 말로 읽는다. 그래서 한 화면 안에서 섬의 바람과 시대의 바람을 함께 읽을 수 있다.
3이름 없는 폭풍
화면에는 군인도 구호도 없다. 바람과 몸이 있을 뿐이다. 시대는 그림 안에서 이름을 얻지 않는다.
시대는 어디에 있는가. 몸의 자세에 있다. 이 그림의 몸은 바람 앞에서 낮아진다. 낮아진 채로 버틴다.
선도 같은 일을 한다. 한 화면에 바람의 힘을 드러내는 선과 몸을 세우는 선이 함께 있다. 바람은 불고, 몸은 선다.
시대는 이름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자세로 그려졌다.
4그림 밖의 말
서양 회화에도 폭풍의 사건을 화면과 제목의 서사로 결합한 사례가 있다.5 그러나 〈태풍〉의 제목은 날씨의 이름 하나만 남긴다. 작품의 정치적 의미는 화면 안의 표지보다 스무 해 남짓 뒤의 구술에서 명시된다.
5견딘 자세
폭풍 속의 몸은 견딘다. '견딘다'는 이 사례가 따라온 동사다.
구술은 그의 폭풍 그림들을 저항과 잇는다. 화면에서 보이는 것은 몸을 낮추고 남는 모양이다. 이 책은 그 몸을 물러선 몸이 아니라, 이름을 쓰지 않는 저항의 몸으로 읽는다. 견딘 자세는 폭풍이 그친 뒤에도 몸에 있다.
이 사례는 폭풍이 먼저 섬의 폭풍이며, 그 위에 시대의 기억이 겹치되 이름이 아니라 자세로 그려졌다는 것을 보았다. 〈태풍〉의 소나무는 기울었고, 바위 위의 사람은 등을 굽혔다.
견딘 몸은 대개 굽어 있다. 사례 B는 이 굽음을 하나의 형식으로 읽으며, 자연의 힘 앞의 '싸우지 않는 미학'과 시대의 힘 앞의 '저항의 자세'를 두 층위로 함께 세운다.
사례 B굽은 몸의 형식 — 싸우지 않는 미학과 저항의 자세
1도쿄의 굽음, 제주의 굽음
1953년의 〈고개 숙인 나부상〉과 1987년의 〈노송과 노인〉 사이에는 삼십여 년의 시간과 서로 다른 장소가 놓여 있다. 전자는 도쿄 시기의 인물화이고, 후자는 제주 풍토 속의 노인이다. 그럼에도 두 그림의 몸은 곧게 서지 않는다. 한쪽 다리를 접어 옆으로 둔 여인의 몸과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기운 노인의 몸에는 '굽음'이라는 공통된 형식이 있다.
이 반복은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준다. 굽은 몸은 제주 바람이 처음 만들어낸 도상이 아니다. 제주 이전부터 존재하던 신체 감각이 제주라는 풍토를 만나 새로운 형식적 의미를 얻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6
따라서 굽음을 곧바로 고난·패배·제주성의 상징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먼저 시대가 달라도 반복되는 자세와, 그 자세가 제주 시기 들어 검은 선과 넓은 여백 속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아야 한다.
2화가의 언어: 저항과 극복 불가능성
2005년 구술에서 변시지는 제주 사람들의 삶을 "바람에 싸우면서 저항하면서 살아 남을라고 하는 집념"이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자신의 감정이 제주 풍토의 소재와 심리적으로 맞아들었다고 회고했다.7
한편 『예술과 풍토』에서는 부두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인간이 "영원히 대자연을 극복할 수 없으리라"는 감각을 적었다.8
두 진술은 서로를 지우지 않는다.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는 인식은 '싸우지 않는 미학'의 층위를, 정치적 권력에 대한 반감과 저항의 기억은 '저항의 자세'의 층위를 보여 준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데 있지 않다.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한 두 태도가 화면에서 어떻게 겹치고 갈라지는지를 가려 보는 데 있다.
구술의 "싸우면서 저항하면서"라는 말은 '싸우지 않는 미학'이라는 이름을 저항의 부재로 읽으면 안 된다는 점도 일깨운다.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버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연을 이기려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사례의 질문은 싸웠는가 싸우지 않았는가가 아니다. 두 층위의 힘을 겪은 몸이 화면에서 어떤 형식을 얻었는가이다.
3굽되 무너지지 않는 몸
제주 시기의 인물은 바람을 정면으로 밀어내는 영웅적 몸이 아니다. 몸을 낮추고, 중심축을 기울이며, 지팡이나 말·나무와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화면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 몸의 핵심은 이김도 짐도 아니라 지속이다.
굽음과 파괴는 다르다. 굽은 선은 방향을 바꾸면서도 이어지고, 부러진 선은 끊어진다. 변시지의 검은 선은 끊어질 듯 거칠지만 형상을 끝까지 붙든다. 몸은 작아져도 지워지지 않는다.
4자세가 선이 되는 과정
도쿄 시기의 인물화에서 굽음은 해부학적 부피와 포즈로 제시된다. 제주 시기에는 같은 신체 감각이 몇 개의 검은 선으로 압축된다. 이 변화는 '자세는 남고 형식은 변한다'는 이 책의 반복론과 연결된다.
중요한 것은 선이 몸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의 기울기와 방향은 화면 전체의 힘의 흐름을 만들고, 노인·나무·지붕을 서로 다른 사물이면서도 같은 풍토적 장 안에 놓는다.
따라서 굽은 몸은 도상적 상징 이전에 조형적 구조다. 신체의 중심축, 검은 선의 방향, 여백의 압력, 주변 사물의 기울기가 함께 작동할 때 '굽음'은 화면의 관계적 문법이 된다.
이 점에서 제주 풍토는 몸의 외부 배경이 아니라 몸의 선을 조직하는 조건으로 읽힌다.
5비교의 한계와 저항의 자세
노동 회화에서 굽은 몸은 반복되는 행위의 동작으로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9 변시지의 노인은 서 있을 때에도 굽어 있으며, 그 굽음에는 노동뿐 아니라 나이, 신체의 기억, 풍토의 압력이 중첩된다.
『도덕경』 22장의 '곡즉전(曲則全)'과 '부쟁(不爭)'은 굽음과 다투지 않음이 지속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비교 좌표가 된다.10 그러나 변시지가 이 장을 회화의 근거로 삼았다는 자료는 없으므로, 영향 관계가 아니라 형식적 유사성의 범위에 한정한다.
두 분석어도 이 한계 안에서 쓴다. 자연을 정복하지 않으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몸은 '싸우지 않는 미학'의 층위에, 정치적 저항의 감정을 구호로 표상하지 않으면서도 힘을 받은 자세를 남기는 몸은 '저항의 자세'의 층위에 놓인다. 두 층위는 같지 않지만 화면에서 서로 겹칠 수 있다.
이러한 겹침을 영웅주의로 미화하거나 수동성으로 축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굽음은 약함의 표지가 아니라 힘과 관계 맺는 방식이며, 그 관계가 선과 자세의 형태로 지속된다.
6결론: 싸우지 않는 미학과 저항의 자세
이 사례의 결론은 두 층위를 함께 세우는 데 있다. 바람과 바다 같은 자연의 힘 앞에서 몸은 정복보다 조정을 택한다. 이것이 '싸우지 않는 미학'이다. 반면 역사적·정치적 힘에 대한 작가의 회고에는 명시적인 저항의 언어가 있다. 이것이 '저항의 자세'다. 두 층위는 같지 않지만, 굽은 몸·기운 나무·낮은 집·끊어지지 않는 선에서 서로 만난다.
'굽은 몸의 형식'은 이 둘이 같아지지 않은 채 교차하는 회화적 자리다. 이렇게 나누어 쓸 때 작가의 구술과 화면의 사실을 함께 보존할 수 있고, 자연과 정치라는 서로 다른 힘을 섣불리 동일시하지 않을 수 있다.
〈노송과 노인〉에서 노인의 등과 소나무의 줄기는 모두 기울어 있다. 그러나 둘 다 화면에 남는다. 풍토가 남긴 것은 패배의 표정이 아니라 지속의 자세다.
폭풍의 사례는 시대의 기억이 이름이 아니라 자세로 화면에 남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굽은 몸의 사례는 그 자세가 도쿄 시기부터 이어진 신체 감각이 제주에서 검은 선의 형식을 얻은 것임을 보여 주었다. 두 사례를 함께 놓으면 굽음은 패배도 영웅적 대결도 아니고, 자연의 힘과 시대의 힘을 겪은 몸이 같아지지 않은 채 사라지지 않고 남는 방식이 된다. 제17장은 바람이 아니라 빈자리와 시간 앞에서 몸이 어떻게 남는지를 빈 배 곁의 까마귀와 줄 없는 낚싯대에서 본다.
굽은 몸은 진 몸이 아니다. 힘을 받은 뒤에도 관계를 지속하는 몸이다.
주와 출처
- ↑ 〈태풍〉(1983). 화면은 byunshiji.org 작품 100의 도판(FŪDO 019)으로 확인.
- ↑ '폭풍의 화가'라는 별명.
- ↑ 『변시지 구술채록문』(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 채록연구 이인범) 제5차 구술(2005년 1월 18일, 기당미술관), 221~222쪽. 제주 사람들이 초가를 묶고 돌담을 쌓아 바람을 견디며 살아남으려 한 의지와 "내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마음이 "심리적으로 그 소재가 이제 맞아 들어가는 거죠"라고 했다. 이어서 시국을 품되 "예술로 승화시켜야 된다"며 "태풍도 그냥 태풍이 아니라 그걸 예술로 승화시킨 태풍"이라 했다. 같은 채록문 제5차 219쪽에서는 까마귀가 "독재정권하에서" 밝은 날이 올 것을 속삭이는 듯하다고 했다.
- ↑ 변시지, 『예술과 풍토』(열화당, 1988), 「제주에 산다」 가운데 '예술과 풍토'. "민족, 시대, 기후적 조건 등이 예술의 모체가 되고".
- ↑ J. M. W. 터너, 〈눈보라 — 항구 어귀의 증기선(Snow Storm -- Steam-Boat off a Harbour's Mouth)〉, 1842년 왕립미술원 전시, 캔버스에 유채, 91.4×121.9cm, 런던 테이트(N00530). 전시 때의 온전한 제목은 "Snow Storm -- Steam-Boat off a Harbour's Mouth making Signals in Shallow Water, and going by the Lead. The Author was in this Storm on the Night the Ariel left Harwich". 화가가 실제로 그 배에 탔는지는 뒷날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이 장은 제목에 적힌 말만 쓴다.
- ↑ 〈노송과 노인〉(1987). 화면은 byunshiji.org 작품 100의 도판(FŪDO 079)으로 확인 — 언덕 위에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굽은 노인, 왼쪽으로 쏠린 소나무의 꼭대기 가지, 작은 초가, 수평선 위의 해와 배 한 척.
- ↑ 『변시지 구술채록문』(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 채록연구 이인범) 제5차 구술(2005년 1월 18일, 기당미술관), 221쪽. 인용한 말은 이 집념과 "내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마음이 소재와 "심리적으로" 맞아 들어갔다는 말로 이어진다.
- ↑ 변시지, 『예술과 풍토』(열화당, 1988), 「제주에 산다」 가운데 '제주의 태양, 바다'.
- ↑ 장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사람들(Des glaneuses)〉(1857), 캔버스에 유채, 83.5×110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세 여인의 몸짓을 허리 굽히기·줍기·다시 몸 일으키기라는 되풀이 동작의 세 단계로 보는 풀이는 오르세 미술관의 작품 설명을 따랐다(2026년 9월 29일 접속).
- ↑ 『도덕경』(통행본) 22장. "曲則全... 不自矜故長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장의 끝도 굽으면 온전해진다는 옛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말로 맺는다. '長'은 '오래간다'로도, '으뜸이 된다'로도 풀린다. 이 장은 앞의 풀이를 따랐다. 부드럽고 약한 것을 살아 있음의 표시로 보는 생각은 76장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