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비평/풍토는 풍경이 아니다/논증 I/제3장
학술판 ·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 제3장 · 5 / 34
서울의 근대와 비원의 시간
관찰의 지속성과 전후 서울의 미술장
논증 I · 근대는 이동하면서 재구성된다
1기와를 세다
〈가을애련정〉(1971)에는 연못가의 정자 하나가 있다. 제1장에서 말한 창덕궁 뒤뜰의 비원, 그 안의 애련정이다. 계절은 가을이다.1 지붕의 기와는 한 장 한 장 그려졌고, 난간의 살도 하나씩 서 있다. 정자는 연못가에 돌을 쌓아 만든 축대 위에 있고, 물에는 정자와 축대가 거꾸로 비친다. 뒤로는 노랗고 붉게 물든 나무들이 빽빽하고, 그 위로 푸른 하늘이 조금 보인다.
이런 그림을 그리려고 그는 여러 해 동안 날마다 비원에 나갔다. 하루 세 시간쯤 그렸다. 기와를 한 장 한 장 세어 가며 붓을 댔고, 10호 한 점에 한 달이 걸렸다.2
귀국한 뒤에는 주로 풍경을 그리지 않았느냐는 채록자의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거는 비원 때문에..."3 그는 궁궐의 정원에서 무엇을 찾았을까. 그리고 뒤에 그것을 어떻게 돌아보았을까.
2피부로 느낀 모체
서울에 온 이듬해인 1958년, 한 신문 칼럼은 그의 말을 이렇게 옮겼다. 앞으로 지방을 떠돌며 "풍속과 습관, 풍물, 풍토를 우선 보고", 체질에서 우러나는 예술을 찾고 싶다.4
그는 뒤에 이 생각을 풀어 말했다. 한 나라의 풍토, 그곳 사람들의 의지와 철학, 그 사회가 겪어 온 일이 하나로 뭉쳐 예술의 '모체'가 된다. 책이나 스승에게서 얻은 생각이 아니라 "피부적으로" 느낀 것이라고 했다.5 그의 책 『예술과 풍토』에도 같은 말이 있다. 민족과 시대와 기후의 조건이 예술의 모체가 된다고 했다. 그는 그것을 정신문화의 '체온'에 빗댔다. 그는 이 모체를 '예술의 풍토'라고도 불렀다.6
고국에 온 그는 그 모체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지방을 떠돌겠다던 그가 오래 머문 곳은 궁궐의 정원이었다.
3궁궐의 기와, 짐 진 등
서울에 온 뒤 몇 해, 그의 화면에는 여러 가지가 오갔다. 대학가의 붉은 벽돌 건물,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보기 어려운, 추상에 가까운 그림, 부탁받아 그린 초상이 있었다.7 지게꾼도 있었다. 〈지게꾼〉(1958)은 지금 흑백 사진으로만 전한다고 한다.8
그의 기억으로는 1960년대 들어 비원이 일반에 열렸다. 그때부터 비원이 그의 작업장이 되었다. 화가 손응성과 천칠봉도 날마다 나와 그렸다. 사람들은 이들을 '비원파'라 불렀다.9
그림은 더디게 쌓였다. 잎 하나하나까지 그린 뒤, 얇은 색을 덧입히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듯 손을 댔다. 잎 하나에 칠이 대여섯 겹 올라갔다.10
그는 그 시절이 좋았다고 돌아보았다. 비원에서 그리는 나날이 "한국의 현실하고는 별천지처럼" 느껴졌다고 했다.9
4두 세계를 본 눈
궁궐의 정원과 길 위의 일꾼은 같은 도시의 두 얼굴이었다. 그에게는 기와를 세는 눈과 짐 진 등을 보는 눈이 함께 있었다.
비원에도 풍토가 있었다. 고요한 정원, 날마다 같은 자리, 더디게 가는 시간. 그 풍토 속에서 잎 하나까지 세는 방식이 자랐다. 그가 찾던 모체가 거기 있었는지는 뒤에 그 자신이 돌아본다. 그러나 눈은 거기서 생겼다.
두 눈은 뒤에 제주로 함께 갔다. 제주의 풍토 속에서 그 눈은 다른 방식을 얻었다.
5궁궐에서 바람 속으로
1970년대 초, 그는 병을 얻어 한동안 병원에 있었다. 몸을 추스를 무렵 제주대학교에서 와 달라는 청이 왔고, 1975년 그는 제주로 갔다.11
제주에 간 처음에는 그도 비원의 방식으로 제주를 그렸다. 그러나 그곳에 살면서, 그것이 "겉으로만 제주도지 내용적으로는 아니다"라는 것을 느꼈다. 소재가 제주라고 해서 제주의 그림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모체라 부른 것, 그곳의 풍토와 역사와 사람들의 의지에서 나와야 했다. 그는 뒤에 자기가 비원에서 익힌 방식을 '귀족의 문화'였다고 돌아보았다. 그리고 제주에서는 "가장 서민적인 걸" 파고들었다고 말했다.12
그는 비원의 우아하고 화려한 색을 모두 버렸다. 그 자리에 마른 풀잎색이 들어섰다. 그러나 기와를 세던 눈은 그대로 가져갔다. 제주에서도 그는 폭풍을 보고 집에 돌아와 그렸다. 보고 또 보아 머리에 담는 법은 비원에서 몸에 붙은 것이었다.13
〈가을애련정〉의 기와와 잎은 하나씩 그려졌다. 이 장은 비원이 그에게 남긴 것이 화려한 색이 아니라 오래 보고 머리에 담는 눈이었음을 확인했다. 식민지기의 이름과 얼굴, 도쿄에서 익힌 몸 그리기, 서울에서 기른 오래 보는 눈은 한 사람의 이동 속에서 차례로 겹쳤다. 그가 익힌 근대 회화는 어느 중심에서 그대로 옮겨 온 것이라기보다, 이 이동 속에서 거듭 다시 짜인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것이 논증 I의 잠정 결론이다. 1975년, 그 눈은 태어난 섬으로 돌아갔다. 논증 II는 제4장과 제5장에서 그 귀향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는지, 다시 배우는 일이었는지를 묻는다.
기와를 세던 눈이, 제주에서 바람을 외웠다.
주와 출처
- ↑ 〈가을애련정〉(1971). 제목과 연도는 「그림의 언어」를 따름. 홍성후의 글은 1971년 일본 오사카 후지화랑 개인전에 〈애련정〉이 나왔다고 적는다. 화면은 byunshiji.org 작품 100의 도판(FŪDO 036)으로 확인. 연도는 1971년으로 저자 확정(2026-09-30); 작품 100의 표기 1965년은 사이트 쪽을 고칠 것.
- ↑ 『변시지 구술채록문』(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 채록연구 이인범) 제7차 구술(2005년 4월 1일), 297~298쪽(기와를 셈, 날마다 세 시간쯤, 10호 한 점에 한 달).
- ↑ 같은 채록문 제2차 구술, 99쪽.
- ↑ 홍성후, 「경계를 넘어서: 변시지의 삶과 예술」(「예술과풍토」 파일 수록)에 옮겨진 '애꾸눈'의 1958년 글. 홍성후는 『경향신문』 1958년 6월 4일 자 「모일모시」로 적는다.
- ↑ 『변시지 구술채록문』 제3차 구술(2004년 12월 24일), 150~151쪽.
- ↑ 변시지, 『예술과 풍토』(열화당, 1988), 「제주에 산다」 가운데 '예술과 풍토'.
- ↑ 『변시지 구술채록문』 제4차 구술(2004년 12월 28일), 154~155쪽(붉은 벽돌 건물, 초상화), 제3차 구술 140~141쪽(추상에 가까운 그림).
- ↑ 「그림의 언어」의 작품 설명.
- ↑ 『변시지 구술채록문』 제4차 구술, 185~187쪽.
- ↑ 같은 채록문 제7차 구술, 297~298쪽.
- ↑ 『변시지 구술채록문』 제5차 구술(2005년 1월 18일), 200쪽. 화가의 집을 꾸미던 중 병이 나서 입원했고, 퇴원할 무렵 제주대학의 청이 왔다고 했다.
- ↑ 같은 채록문 제7차 구술, 303~304쪽. "가장 서민적인 걸"은 제3차 구술 151쪽.
- ↑ 같은 채록문 제7차 구술, 298~2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