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비평/풍토는 풍경이 아니다/논증 I/제2장
학술판 ·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 제2장 · 4 / 34
제국의 미술교육과 이동하는 양화
오사카·도쿄의 수련과 형식의 이동
논증 I · 근대는 이동하면서 재구성된다
1두 손
〈K씨의 상〉(1952)에는 한 남자가 있다. 야전 상의를 입었다. 왼손은 붉은 원 위에, 오른손은 오른발 위에 놓여 있다.1
도쿄에서 그린 그림이다. 이십 대 중반의 그는 이미 일본의 미술 단체 광풍회가 여는 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고, 광풍회 회원이었다.2
이 그림의 사람은 제주 시기의 사람과 다르다. 두 손이 어디에 놓였는지까지 보인다. 이 장은 도쿄에서 익힌 그리기가 제주에서 버려졌는지, 아니면 다른 모습으로 남았는지를 묻는다.
2오사카미술학교와 제국의 이동
변시지의 오사카미술학교 수련을 단순한 "일본 유학"으로 부르면 그의 이동이 놓인 식민지적 조건이 지워진다. 김지영의 2016년 연구는 오사카미술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이 도쿄미술학교 유학생과 다른 사회적 배경을 가졌으며, 상당수가 가족의 경제적 이주와 함께 오사카에 정착한 뒤 미술교육을 받았다고 지적한다.3
이 연구는 오사카의 조선인 학생들이 해방 뒤 반드시 서울 화단으로 향하지 않고 제주와 남부 지역으로 돌아가 미술교육과 지역 미술의 형성에 참여했다는 점도 강조한다. 변시지는 이 집단의 한 사례로 연구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사실은 그의 일본 경험을 "중심에서 선진 문물을 습득한 뒤 고향으로 가져온 과정"으로만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제국 안의 이동이 기술의 습득과 정체성의 불안, 언어와 이름의 문제를 동시에 만들었다는 점이다. 제1장에서 본 〈자화상〉과 이름의 변경, 도쿄의 수련, 1957년의 귀국은 이 연속선 위에서 읽어야 한다. 서양화의 형식은 이미 이동의 역사 안에 있었다.
입학 연도는 현재 자료 사이에 1941년과 1942년 표기가 공존한다. 이 책은 어느 한쪽을 단정하지 않고, 출판 전 학적 원부·졸업기록 등 1차 자료로 최종 확정한다.
3고쳐서 다시 가져가다
1945년이 저물기 전, 그는 오사카미술학교를 마치고 도쿄로 갔다. 이듬해 봄, 버스 안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화가를 알아보았다. 여인의 누드로 이름난 일본의 서양화가 데라우치 만지로(1890~1964)였다. 찾아가도 되겠느냐고 묻자,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4
스승은 작업실에서 가르치지 않았다. 제자가 그림을 가져가면 어디가 어떻다고 말할 뿐이었다. 제자는 돌아와 고쳤고, 일주일쯤 뒤 다시 가져갔다. '좋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였다. 그해 봄 전람회는 포기했다.4
선배들이 그의 그림에 말을 보태려 하자, 데라우치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고 막았다. 그것이 바로 이 제자의 좋은 점이라는 것이었다.4 1949년 그의 첫 개인전 때, 데라우치는 추천사에서 '화도의 풍설'을 견디며 정진하는 제자에게 성원을 청했다. 그림의 길에서 만나는 바람과 눈이라는 말이다.5
그가 배운 것은 스승의 그림을 닮아 가는 일이 아니었다. 스승의 눈앞에서 제 그림을 고쳐 가는 일이었다.
4선과 포즈
그는 인물의 아름다움이 "선에라든지 포즈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했다. "인물은 속임수가 없거든. 속일 수가 없어."6 풍경은 조금 크거나 작게 그려도 그런 풍경이 있을 수 있지만, 사람의 몸은 조금만 어긋나도 눈에 띈다는 것이다.
그 무렵 전람회에 내는 가장 큰 그림은 50호였다. 50호 인물형(F) 캔버스는 긴 변이 1미터를 넘는다.6 인물 하나만 그리면 양옆에 빈자리가 생겨, 흔히 테이블이나 꽃병을 놓아 채웠다. 인물이 아름다워서 그리는데, 빈 곳을 메우려고 다른 것을 놓을 까닭이 없다고 그는 보았다. 그는 캔버스를 인물 하나가 꼭 들어가게 잘랐다. 틀과 액자도 따로 맞췄다.6
〈K씨의 상〉에서 눈이 가는 곳도 몸의 자세다. 두 손이 놓인 자리가 이 사람의 앉음새를 정한다.
5옛것을 본받되 변할 줄 알면
그가 오래 기억한 스승의 가르침은 빛에 관한 것이었다. 빛 아래서 사물의 색은 서로에게 비쳐 든다. 노란 것 옆의 흰 컵은 노랗게 물든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바깥의 빛과 대기 속 색의 변화를 옮기려 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그림자는 검정이 아니라 파랑이라는 것이었다.7 그는 인물의 어두운 곳을 파랑으로 칠하고, 팔레트에서 검정을 없앴다고 말했다.8
그는 배운 것의 무게도 알았다. 데생의 힘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형태를 줄이고 바꾸어야 할 때,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7
전통을 익히되 그 자취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움을 추구하되 형식의 근거를 잃지 않는 문제는 동아시아 문론에서도 오래 논의되었다.9 여기서는 이를 변시지의 직접 영향으로 보지 않고, 배운 규칙과 변형의 긴장을 설명하는 비교 좌표로만 둔다.
도쿄의 그에게도 두 갈래 그림이 있었다. 스승의 길을 따른 인물화와, 제 마음대로 그린 단순한 풍경과 정물이다.7 본받는 일과 새로 여는 일이 한 사람 안에 함께 있었다.
6선 밑에 있는 것
스무 해 남짓 뒤, 제주의 화면에서 사람은 선 몇 개가 되었다. 그러나 몸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은 그대로다. 굽은 등을 긋는 선 하나가 그 몸의 무게를 받쳐야 한다. 도쿄에서 몸을 익힌 손이 그 선을 긋는다.
도쿄 시절 팔레트에서 지웠던 검정도 제주에서 돌아왔다. 그림자가 아니라, 사물과 몸을 긋는 선으로.
그는 뒤에, 고전주의와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공부한 일이 자기 그림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다만 그것이 규칙이 되어 자기를 묶지는 않았고, 작품이 이어져 온 길의 한 부분이었다고 했다.10
도쿄의 수련이 그에게 남긴 것은 스승의 화풍보다, 몸을 속일 수 없다는 감각과 고쳐 가며 보는 습관으로 읽을 수 있다. 스승의 풍설은 비유였다. 제자는 뒤에 제주에서 진짜 바람을 그렸다. 그보다 앞서 1957년, 그는 고국에 건너와 서울에 자리 잡았다. 다음 장은 인물을 그리던 손이 서울에서 왜 비원의 풍경을 그리게 되었는지를 본다.
배운 것은 버려지지 않았다. 선 하나의 무게가 되었다.
주와 출처
- ↑ 〈K씨의 상〉(1952). 화면의 사실(군용 야전 상의, 왼손은 붉은 원 위, 오른손은 오른발 위)은 저자 확인.
- ↑ 1947년 제33회 광풍회전 첫 입선, 1948년 제34회 광풍회전 최고상, 같은 해 회원. 『변시지 구술채록문』(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 채록연구 이인범) 인적사항, 제2차 구술 79~81쪽, 제3차 구술(2004년 12월 24일) 118~119쪽. 홍성후는 최고상 작품을 〈베레모의 여인〉으로 적는다(주4의 글).
- ↑ 김지영, 「해방 전 오사카미술학교의 조선인유학생들의 실태와 귀국 후 행방에 대하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2 (2016): 202–230.
- ↑ 『변시지 구술채록문』 제2차 구술(2004년 12월 4일, 기당미술관), 70~72쪽, 76쪽, 78쪽(누드). 데라우치 만지로(寺内萬治郎, 1890~1964)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1916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일본 국립아트리서치센터 「日本アーティスト事典」).
- ↑ 홍성후(명지대학교 한국미술사연구소 연구원), 「경계를 넘어서: 변시지의 삶과 예술」, 「예술과풍토」 파일 수록. 이 글에 옮겨진 데라우치의 추천사('화도(畵道)의 풍설(風雪)'). 첫 개인전은 1949년 4월 7~11일, 도쿄 시세이도화랑.
- ↑ 『변시지 구술채록문』 제2차 구술 80쪽("선에라든지 포즈에", 캔버스를 자름), 99쪽("인물은 속임수가 없거든"). 제3차 구술 117쪽에도 캔버스를 자른 이야기가 있다. 50호 캔버스는 인물형(F) 기준 116.7×90.9cm.
- ↑ 『변시지 구술채록문』 제2차 구술 75~76쪽(빛과 그림자), 79쪽(데생의 힘), 78쪽(두 갈래 그림).
- ↑ 『변시지 구술채록문』 제1차 구술, 63쪽.
- ↑ 박지원, 「초정집서(楚亭集序)」, 『연암집』 권1. "法古者病泥跡 創新者患不經 苟能法古而知變 創新而能典 今之文猶古之文也."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이 글에서 나온 말이다.
- ↑ 캐럴 네비스(Carole Neves, 스미스소니언 연구소 정책분석실장), 「화가와 바다: 변시지」. 인용은 한국어 번역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