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비평/풍토는 풍경이 아니다/논증 I/제1장
학술판 · 풍토는 풍경이 아니다 · 제1장 · 3 / 34
식민지기의 얼굴
자화상·이름·제국의 교육환경
논증 I · 근대는 이동하면서 재구성된다
1스무 살 전의 얼굴
〈자화상〉(1944)에는 젊은 얼굴 하나가 있다. 변시지가 오사카미술학교에 다니던 때,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그린 그림이다.1 젊은이는 어두운 웃옷에 흰 깃, 누런 넥타이 차림이다. 얼굴은 거의 정면이고, 눈은 그림 밖을 본다. 배경은 아무것도 없는 누런 갈색이다.
제주 시기의 그림에서 사람은 대개 작다. 얼굴의 생김새보다 몸의 자세로 그려진다. 굽은 등으로 알아보게 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 책은 역사적 계보를 시작하는 첫 장에 이 얼굴을 둔다. 그것도 화가 자신의 얼굴이다.
형식과 신체를 분석하기에 앞서, 먼저 그것을 가능하게 한 한 사람의 이동과 수련, 작업의 계보를 본다. 처음의 얼굴은 어떤 얼굴이었나. 그리고 그 얼굴은 그 뒤 어디로 갔는가.
2얼굴과 이름
자화상은 대개 거울을 보고 그린다.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이 같다. 그래서 자화상에는 보는 눈과 보이는 눈이 한 얼굴에 겹친다.
얼굴은 사람을 알아보는 자리다. 그런데 어린 변시지에게 얼굴은 그를 다 말해 주지 않았다. 그가 다닌 오사카의 소학교에서 한국 아이는 그 하나뿐이었다. 그는 구술에서 그때를 이렇게 돌아보았다. 얼굴만 봐서는 한국 아이인지 일본 아이인지 모른다. 이름을 대면 그때 안다.2
그 무렵 그의 이름은 '시군(時君)'이었다. 일본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 이름 뒤에 '군(君)'을 붙여 불렀다. '시군 군'이 된 이름은 놀림거리가 되었고, 그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 일 때문에 일부러 귀국해 호적의 이름을 고쳤다. '군(君)'과 획수가 같다는 '지(志)'를 골랐고, 이름은 '시지(時志)'가 되었다.2
얼굴은 말하지 않고, 이름이 말했다. 여러 해 뒤, 미술학교 학생이 된 그는 그 얼굴을 스스로 그렸다. 제주의 풍토가 그의 화면에 들어오기 전, 처음의 얼굴이다.
3빛을 받는 얼굴
미술학교의 인물화는 보는 훈련이다. 빛이 한쪽에서 들어와 얼굴의 한쪽을 밝히고, 다른 쪽에 그늘을 남긴다. 그 밝음과 그늘의 차이로 이마와 코와 뺨의 부피가 생긴다. 눈은 대상의 생김새를 정확히 옮기도록 길러진다.
서양화과 학생 변시지가 익힌 것도 이런 그리기였다. 〈자화상〉(1944)은 그 시절의 그림이다. 빛은 왼쪽 위에서 온다. 이마와 한쪽 뺨이 밝고, 다른 쪽 뺨과 목은 그늘에 들었다. 그 밝고 어두움이 얼굴을 둥글게 빚는다.
제주의 화면에서는 한 사람을 알아보는 자리가 얼굴에서 자세로 옮겨 갔다.
그렇다고 처음의 얼굴이 쓸모없어진 것은 아니다. 덜어내는 일은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다. 얼굴을 정확히 그릴 줄 알던 손이, 뒤에 얼굴을 덜어냈다.
4늙어 가는 얼굴, 풍경 속의 사람
렘브란트의 자화상 연작처럼, 자화상을 평생 반복한 전통에서는 삶의 시간이 얼굴의 변화에 축적된다.3 변시지에게는 이와 다른 경로가 두드러진다.
변시지의 자화상은 몇 점 되지 않는다. 한 연구 글은 1944년, 1959년, 1995년의 자화상을 든다. 그 글에 따르면 1995년의 얼굴은 정면을 보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 뒤로 수평선이 있고, 배 한 척이 떠 있다.4
그의 그림에는 자화상보다 풍경 속의 노인이 훨씬 자주 나온다. 미국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의 정책분석실장을 지낸 캐럴 네비스(Carole Neves)의 글에 따르면, 그 노인이 자화상이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이 내 많은 그림에 등장하는 노인이 나라고 믿고 싶다면, 그렇게 할 자유가 있습니다."5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은 대답이다.
화가는 소학교 2학년 때 씨름을 하다 다리 관절을 다쳤다.6 네비스는 그가 수십 년 동안 지팡이를 짚었다고 적었다.5 그림 속 노인도 지팡이를 짚는다. 그가 준 자유를 빌려, 이 장은 이렇게 읽는다. 삶이 얼굴에 쌓이는 자화상 전통과 달리, 변시지의 그림에서 삶은 풍경 속 작은 사람의 자세에 더 자주 축적된다.
5이젤 위의 처음
1970년대 초, 그는 서울 돈암동에 '변시지 화가의 집'을 마련했다. 한쪽에 쉬는 자리를 두고, 안락의자 앞에 놓인 이젤에 〈자화상〉(1944)을 걸어 두었다고 한다.4 그때 그는 창덕궁 뒤뜰의 정원인 비원을 세밀하게 그리던 화가였다. 제주로 내려가기 몇 해 전이다.
그 까닭을 화가가 직접 말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 일을 전하는 연구 글은 초심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었을까 하고 짐작한다.4 다만 이것은 말할 수 있다. 서른 해 가까이 지나서도 그는 처음의 얼굴을 앞에 두었다.
〈자화상〉의 얼굴에서는 밝은 뺨과 그늘진 뺨이 빛의 방향을 알려 준다. 제주 그림의 사람에게는 그런 그늘이 없다. 처음을 지운 것이 아니라 처음을 딛고 간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장은 식민지기의 이름과 미술학교의 인물 훈련이 한 얼굴에 겹쳐 있음을 확인했다. 다음 장은 이 얼굴을 그리던 손이 도쿄의 스승 데라우치 만지로 아래에서 무엇을 익혔는지를 〈K씨의 상〉(1952)으로 살핀다.
처음의 얼굴은 서른 해 뒤에도 그의 이젤 위에 있었다.
주와 출처
- ↑ 〈자화상〉(1944). 연도는 저자 확정. 홍성후의 글(주4)도 1944년, 오사카 시절의 그림으로 적는다. 「그림의 언어」는 1945년, '열아홉'에 그린 것으로 적는다. 화면은 byunshiji.org 작품 100의 도판(FŪDO 038)으로 확인.
- ↑ 『변시지 구술채록문』(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 채록연구 이인범), 제1차 구술(2004년 12월 3일, 기당미술관), 29~30쪽. 이름을 고친 때를 화가는 "3학년이나 4학년쯤"으로 기억한다.
- ↑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유화 마흔 점 남짓, 동판에 새겨 찍는 판화인 에칭 서른한 점, 드로잉 일곱 점가량으로 여든 점 남짓이다. H. Perry Chapman, Rembrandt's Self-Portraits: A Study in Seventeenth-Century Identity(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참고.
- ↑ 홍성후(명지대학교 한국미술사연구소 연구원), 「경계를 넘어서: 변시지의 삶과 예술」 가운데 '돈암동 시절: 비원파 활동'과 '고독한 자화상'. 「예술과풍토」 파일 수록. 화가 자신은 구술에서 이 집을 1970·71년 무렵 사서 개인 미술관으로 꾸미려 했고, 3층을 화실로 썼다고 말했다(제5차 구술, 200~202쪽).
- ↑ 캐럴 네비스(Carole Neves, 스미스소니언 연구소 정책분석실장), 「화가와 바다: 변시지」. 인용은 한국어 번역본.
- ↑ 『변시지 구술채록문』 제1차 구술, 33~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