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예술철학 · 98 / 100
폭풍의 화가
이름보다 넓은 그림
The Painter of Storms
이름을 듣고 들어오다
폭풍의 화가라는 말을 듣고 들어온다.
기운 나무와 굽은 몸을 찾는다.
입구를 찾았지만 아직 그림을 다 본 것은 아니다.
〈풍랑〉의 집 둘레는 거칠다.
아래의 사람과 말은 가깝다.
밀어붙이는 힘과 곁에 있는 자리가 한 화면에 있다.
이름을 버릴 필요는 없다.
그 이름 안에 그림을 작게 접어 넣을 필요도 없다.
들어온 뒤에는 다른 것을 보아도 된다.
만년의 획들
2007년의 〈정오〉에는 획이 많다.
집과 나무와 작은 사람의 둘레를 지난다.
늙은 화가의 그림이 늘 고요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획이 많다고 불안하다고 정하지도 않는다.
방향과 간격을 본다.
작은 몸의 둘레에서 큰 움직임이 생긴다.
늙었다는 말로 평온을 먼저 주지 않는다.
긴장이 있다는 말로 쉼을 지우지도 않는다.
늦은 그림도 한 점씩 만나야 한다.
이름이 고르는 것
별명은 한 가지를 앞에 세운다.
오래 듣다 보면 그 뒤의 것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때 이름은 그림을 가리키면서 가리기도 한다.
누가 처음 그 이름을 썼는지는 따로 확인할 일이다.
이 글은 그 시작을 새로 정하지 않는다.
지금 그 이름을 듣고 무엇을 보는지 살핀다.
폭풍을 보고 난 뒤 작은 몸도 본다.
그 몸 곁의 틈을 살핀다.
이름이 닿지 못한 곳에도 눈이 갈 수 있다.
앉아 있는 여인
〈네모의 상〉의 여인은 흰 블라우스를 입었다.
짙은 치마 위에 손을 포갰다.
훗날의 폭풍을 기다리느라 거기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도쿄의 사람과 서울의 정원, 제주의 바다가 남아 있다.
한 화가의 눈이 지나온 서로 다른 자리다.
나중의 바다만이 앞선 시간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별명이 모자란다고 별명만 더 붙이지 않는다.
다른 그림을 한 점 가져온다.
한 사람의 손에서 다시 본다.
입구에 걸 그림
폭풍만 입구에 걸면 다른 그림이 예외로 보일 수 있다.
고요한 것만 골라도 그렇다.
대표작 곁에 더 볼 길을 둔다.
큰 미술관의 이름도 그 길의 끝은 아니다.
어느 벽에 걸렸든 사람과 말의 거리는 다시 보아야 한다.
작은 도록에서도 그 눈길은 시작될 수 있다.
소개는 짧아도 좋다.
그 뒤의 그림과 기록은 열려 있어야 한다.
한 문장에서 한 점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한다.
남은 설명을 고치다
화가는 새 그림으로 이름을 바꿔놓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남은 그림을 더 볼 수 있다.
빠졌던 작품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구술 속 화가는 보고 익힌 것을 자기 양식으로 옮겼다.
기억도 달라진 풍경도 함께 작용했다.
바람이 시키는 대로만 그린 사람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망설임을 지울 때가 있다.
모든 선택을 반드시 그럴 일이었다고 쓰게 된다.
그 사람에게 다시 생각할 시간을 돌려주고 싶다.
한 점씩 남는 것
발견하고 성숙했다는 순서가 모든 그림의 순서는 아니다.
색이 밝아졌다고 마음도 평온해졌다고 할 수 없다.
연도 곁에 화면을 다시 놓는다.
〈풍랑〉에서는 두 몸이 가까이 있다.
〈정오〉에서는 작은 사람 둘레로 획들이 돈다.
같은 화가가 몸을 서로 다른 곳에 놓았다.
익숙한 색을 알아보아도 한 점 앞에서는 다시 보아야 한다.
그림마다 같은 말을 하지는 않는다.
이름은 그 말을 듣기 시작하는 데까지만 도울 수 있다.
이름이 물러난 곳
폭풍을 보러 와서 사람과 말의 가까움을 보고 갈 수 있다.
짙은 나무보다 그 곁의 밝음이 남을 수도 있다.
이름을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 그림을 더 본 것이다.
모두 그림 속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
곁의 말을 볼 수도 있다.
멀리 있는 배에서 화면을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두 몸 곁을 한 획이 지난다.
그 사이에 작은 밝음이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