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예술철학 · 95 / 100
예술과 비예술
이름을 붙인 뒤에도
Art and Non-Art
세 가지 물음
예술인가.
좋은 예술인가.
나는 이것을 좋아하는가.
세 물음은 같은 대답을 갖지 않을 수 있다.
마른 풀잎색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그다음 그 색 옆에서 무엇이 달리 보이는지 살핀다.
좋다는 마음이 그림을 더 보게 한다.
이름을 붙여 문을 닫지는 않는다.
왜 그렇게 보았는지 다시 묻는다.
그 물음이 그림 앞으로 돌아갈 길이 된다.
걸리지 못한 샘
1917년 〈샘〉은 전시에 제출되었지만 전시되지 못했다.
뒤이어 사진과 옹호하는 글이 나왔다.
처음부터 모두 예술이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사물을 내놓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이름과 놓인 자리가 문제가 되었다.
예술이라는 말의 둘레가 그 자리에서 흔들렸다.
이것을 변시지의 그림 곁에 두어본다.
누가 진짜 예술가인지 먼저 정하지 않는다.
각자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고르게 했는지 묻는다.
예쁘지 않아도
판독본의 「예술과 미의 구별」은 두 말을 같게 쓰지 말라고 한다.
예쁘지 않다고 예술이 아닌 것은 아니다.
예쁘다고 예술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미술 해체」라는 대목에는 회화와 조각, 공예의 경계를 넘어서는 논의도 있다.
변시지를 경계를 닫기만 한 화가로 두지 않는다.
그가 곁에 둔 물음들을 더 읽는다.
노트에 적혔다고 모두 그가 처음 만든 말은 아니다.
옮겨 적은 것과 직접 논한 것을 가린다.
그렇게 해도 읽고 배운 시간은 남는다.
이름표와 그림
단토는 예술의 의미가 작품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물었다.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 사물이 무엇에 관해 말하는지도 보아야 한다.
어느 미술관에 걸렸는지 기록한다.
그러고 나서 나무가 어떻게 기울었는지 본다.
이력이 그 기울기를 대신 보여주지는 않는다.
제목을 읽고 화면으로 돌아온다.
제작연도를 보고 다시 색을 본다.
바깥의 기록과 안의 형상이 서로를 지우지 않게 한다.
남은 몇 획
〈정오〉의 사람은 몇 획으로 보인다.
곁에는 나무가 있고 집이 있다.
사람만 떼어내면 그 몸의 자리도 달라진다.
손의 능력과 고르는 눈이 함께 일한다.
많이 그리는 힘도, 덜 남기는 판단도 필요할 수 있다.
어느 쪽이 예술에 더 가까운지 미리 정하지 않는다.
변시지를 아끼려고 다른 예술을 밀어낼 필요는 없다.
넓은 화면에 작은 몸을 남긴 그의 선택을 본다.
그 몸이 계속 보인다는 것부터 오래 살핀다.
장식이라는 말 앞에서
편안한 그림도 생각을 일으킬 수 있다.
불편한 그림이 늘 깊은 것도 아니다.
겉의 느낌 하나로 다 보았다고 하지 않는다.
〈풍랑〉의 바탕은 밝다.
거친 획들 아래에서 사람과 말은 가깝다.
밝음과 거침, 그 가까움이 같은 화면에 있다.
장식적이라고 부르기 전에 다시 본다.
어디가 겉모습에만 머무는지 말할 수 있는가.
좋다는 말도 싫다는 말도 그림보다 빨리 끝나지 않게 한다.
다르게 본 사람
생명력이 느껴진다면 그 자리를 짚어본다.
굽은 몸인가.
곁의 말인가.
둘 사이의 좁은 틈인가.
옆의 사람은 다르게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본 곳으로 눈을 옮겨본다.
내 처음의 느낌을 버리지 않고도 다시 볼 수 있다.
비평 노트는 창작 안의 자기비평을 말한다.
보는 사람의 말도 다시 고칠 수 있다.
내놓은 해설 앞이 아니라 그림 앞에서 고친다.
이름 다음에
예술이라는 말로 끝내지 않는다.
무엇이 어떻게 보이는지 한 번 더 말해본다.
그림으로 돌아갈 작은 길을 둔다.
고유함을 말하려고 유일하다고 외칠 필요는 없다.
이 그림의 사람과 말은 이렇게 놓여 있다.
그 관계를 충분히 오래 볼 수 있다.
밝은 획 하나가 두 몸 곁을 지난다.
눈이 그 획을 따라간다.
다시 발밑의 작은 땅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