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예술철학 · 96 / 100
감상의 윤리
보고, 알고, 다시 보는 일
The Ethics of Looking
먼저 보는 것
한 사람은 제목을 먼저 읽는다.
다른 사람은 그림을 본 뒤 제목을 찾는다.
아직 누가 더 깊이 보았는지 알 수는 없다.
〈네모의 상〉의 두 손은 짙은 치마 위에 있다.
그림의 이름을 알아도 놓친 손가락이 있을 수 있다.
처음 보는 눈이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도 있다.
안다고 더 보지 않는 것은 아닌지.
느꼈다고 다 보았다고 여긴 것은 아닌지.
둘 다 그림 앞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안다는 것, 맛본다는 것
「미술 감상법」에는 ‘작품을 아는 것과 맛보는 것’이라는 부제가 있다.
좋은 책과 복제판으로 미술을 아는 일도 좋다고 적혀 있다.
그것과 직접 얻는 기쁨을 구별한다.
연도를 알아도 배까지의 거리는 다시 보아야 한다.
감동했다는 말도 그 거리를 대신하지 못한다.
알게 된 것과 마음이 움직인 자리를 함께 살핀다.
지금 읽는 것은 육필원고의 판독본이다.
일본어 본문과 한글 부제가 함께 있다.
적힌 말을 모두 화가가 처음 만든 말로 내놓지는 않는다.
내 집을 떠올려도
폴켈트에 관한 노트는 지나간 경험과 지식이 지금의 눈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느끼려고 살아온 날을 모두 지울 필요는 없다.
기억이 눈을 열 때도 있다.
〈빈 집〉을 보며 자기 집을 떠올릴 수 있다.
오래 못 본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저 집의 문과 지붕은 내 기억과 꼭 같지는 않다.
집 안에 누가 있는지 모른다.
모르는 채로 문을 본다.
내 이야기로 다 채우지 않아도 그 집 가까이 갈 수 있다.
느낌 옆의 확인
쓸쓸했다는 말과 사람이 없다는 말은 다르다.
앞의 말은 내 감상이다.
뒤의 말은 그림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좋은 도판에서 작은 형상이 새로 보인다.
같은 제목의 다른 그림이 구별된다.
정확해졌다고 마음이 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고독이나 귀향이라는 말을 붙이고 멈추지는 않는다.
어느 선에서 그 말을 떠올렸는지 돌아본다.
그림에 닿아 있는 말은 다른 사람도 따라갈 수 있다.
앉아서 보아도
변시지는 먹고살기 바쁜 이들에게 감상할 여유가 적었다고 회고했다.
오래 머물지 못했다고 성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림 앞에 올 시간도 필요하다.
의자 하나가 도움이 된다.
읽히는 글과 크게 볼 수 있는 그림도 필요하다.
앉아서 보거나 설명을 들어도 그 감상은 자기 것이 될 수 있다.
곧바로 감동하지 않아도 된다.
색 하나만 기억해도 된다.
정성껏 보라는 말이 슬픔이나 위안을 반드시 내놓으라는 뜻은 아니다.
글도 돌아본다
「미술 감상법」은 몬드리안의 선과 면과 색도 이야기한다.
사람이나 사과가 없어도 그림의 말은 들릴 수 있다고 한다.
형상을 아낀다고 형상 없는 그림을 닫아둘 필요는 없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려고 없는 사람을 넣지 않는다.
먼 배를 지우지도 않는다.
매끄러운 문장이 그림을 가릴 때에는 문장을 고친다.
이 책의 말도 마지막 답은 아니다.
도움이 되면 따라가고 아니면 물러나도 된다.
독자의 눈이 설 자리를 글이 다 차지하지 않는다.
색을 다시 알다
고흐의 〈침실〉은 노란 방이라는 말만으로 다 보이지 않는다.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벽은 원래 연보라색이었다.
지금 보이는 색에도 지나간 시간이 있다.
〈빈 집〉의 마른 풀잎색은 집을 작게 하고 배를 멀게 한다.
밝다고 그 안의 삶도 안온한 것은 아니다.
색은 곁의 형상들과 함께 느껴진다.
설명을 읽고 다시 보면 빛이 낯설어질 수 있다.
처음의 느낌을 잃은 것만은 아니다.
눈이 한 번 더 시작한 것일 수 있다.
한 번 더
놓쳤던 손가락 하나를 본다.
비었다고 지나친 곳에서 거리를 느낀다.
큰 깨달음이 아니어도 눈은 달라질 수 있다.
안다는 말 뒤에도 볼 것이 있다.
느꼈다는 말 뒤에도 남은 것이 있다.
그 사이에 잠시 머문다.
두 손은 치마 위에 있다.
양옆에 의자의 팔걸이가 있다.
눈이 손끝에서 멈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