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Ⅷ 예술철학

Ⅷ 예술철학 · 94 / 100

남겨진 바람

같은 그림 앞의 다른 하루

The Wind That Remains

빈 집 / Empty House · 1987. 왼쪽의 작은 집과 기울어진 나무, 오른쪽 먼 배와 태양. / A small house and leaning tree at left, with a distant boat and sun to the right.
〈빈 집〉 · 1987FŪDO 062
선착장 / The Landing · 1979. 뭍의 사람과 작은 배 사이에 넓게 남겨진 수면. / A stretch of water separates a figure on shore from a small boat.
〈선착장〉 · 1979FŪDO 078

집에서 배까지

〈빈 집〉의 집은 작다.
기울어진 나무가 곁에 있고 배는 멀리 있다.
눈이 집을 떠나 배로 가는 동안 넓은 색을 지난다.

그린 사람은 이제 없다.
그날의 날씨를 그대로 되찾을 수도 없다.
그런데 집과 배는 지금도 우리 눈의 거리를 바꾼다.

조금 가까이 간다.
다시 물러선다.
손댈 수 없는 사람이 남긴 그림이 보는 사람을 움직인다.

아버지와 화가

누군가는 아버지를 먼저 떠올린다.
다른 사람은 처음 보는 색 앞에 멈춘다.
같은 그림 앞에 서로 다른 시간이 온다.

가까운 기억이 모든 것을 알지는 않는다.
먼 눈도 아무 생각 없이 오지는 않는다.
누가 기억했고 누가 그렇게 읽었는지 서로에게 남긴다.

한 집의 기억을 지우지 않아도 낯선 사람이 들어올 수 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을 만큼 옆자리를 둔다.
그림은 둘 가운데 하나만 택하지 않는다.

다른 일을 하며

같은 화풍으로 그려야만 잇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기록하고 누군가는 번역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림을 보여주는 이도 있다.

그림을 지키며 글을 쓸 수 있다.
자기 작품을 만들며 다른 화가의 기록을 돌볼 수도 있다.
한 사람에게 한 가지 일만 남겨둘 필요는 없다.

다른 길로 가도 같은 그림을 아낄 수 있다.
닮지 않았다고 멀어진 것은 아니다.
다음 사람에게 열린 길도 함께 본다.

다 보지 못한 날들

가까이 살아도 모든 날을 함께 본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붓 앞에 있던 동안 다른 사람도 자기 하루를 살았다.
같은 집의 기억에도 빈 곳이 있다.

왜 그날 붓을 놓았는지 그림은 다 말해주지 않는다.
돌아갈 수 없는 하루가 있다.
그날 그가 남긴 선은 여기 있다.

빈 곳을 다 채워야 사랑한 것은 아니다.
잠시 그림 앞을 떠날 수도 있다.
돌아오면 다시 볼 자리가 남아 있다.

덧붙이지 않는 손

변시지는 더 좋게 하려다 좋은 것을 잃기도 했다고 했다.
그리는 일에 관한 말이었다.
남은 그림을 돌보는 일 앞에서도 그 말을 떠올려본다.

색을 더 환하게 만들지 않는다.
전해지지 않은 말을 화가의 입에 넣지 않는다.
가까이 보이게 하려다가 남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그가 그린 것과 우리가 떠올린 것을 함께 둘 수는 있다.
다만 같은 것이라고 내놓지는 않는다.
그 사이를 지키는 손도 있다.

만난 적 없는 사람

〈선착장〉에서 배와 뭍은 가깝다.
그렇다고 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건넨다는 말 앞에 그 물을 먼저 본다.

화가를 몰랐던 사람도 그림을 볼 수 있다.
작은 기억 하나를 들으면 다시 볼 수도 있다.
설명이 대신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돌아오게 한다.

한 사람은 배를 보고 다른 사람은 뭍의 몸을 본다.
서로 다른 곳에 눈이 머물러도 된다.
건네준 사람이 모든 도착을 정할 수는 없다.

말을 멈추면

〈빈 집〉의 넓은 곳을 설명으로 다 채우지 않는다.
집과 배를 가리킨 뒤 잠시 멈춘다.
그 사이를 눈이 건너가게 한다.

모르는 것을 신비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확인할 일은 열어두고 해석은 하나로 닫지 않는다.
말이 필요하면 다시 그림 앞에서 시작한다.

제주라는 이름은 남아 있다.
화가가 살아온 시간도 있다.
그 곁에 오늘 보는 사람의 하루가 놓인다.

옆자리

남은 사람이 화가의 삶을 대신 살 수는 없다.
자기 하루 속에서 다시 그림을 만난다.
다른 물음으로 돌아와도 된다.

그림과 이름을 남긴다.
읽을 수 있는 기록과 아직 풀지 못한 물음도 둔다.
다음 사람이 머물 자리를 다 채우지 않는다.

집은 왼쪽에 있다.
배는 멀다.
한 사람이 물러서고 다른 사람이 그 옆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