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Ⅷ 예술철학

Ⅷ 예술철학 · 93 / 100

예술가의 유산

한 점을 다음 사람에게

An Artist’s Legacy

마지막 작품 / The Last Work · 2013. 아래쪽 왼편 작은 말과 땅의 윤곽, 위쪽의 태양과 먼 배, 넓게 남은 바탕. / A small horse and the outline of ground at lower left, a sun and distant boat above, and a broad open field.
〈마지막 작품〉 · 2013FŪDO 100
네모의 상 / Portrait of Nemo · 1951. 흰 블라우스와 짙은 치마를 입고 나무 의자에 앉아 두 손을 포갠 여인. / A woman in a white blouse and dark skirt sits in a wooden chair with her hands overlapping.
〈네모의 상〉 · 1951

하나를 세는 일

그림은 몇 점인가.
먼저 한 점을 꺼내 본다.
원화와 사진, 완성작과 습작을 가려야 숫자도 바르게 남는다.

〈네모의 상〉은 한 점이다.
사진은 여러 장일 수 있다.
책마다 같은 손이 보인다고 그림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한 점을 세는 일은 그 한 점의 자리를 찾는 일이다.
익숙한 그림도 다른 사람에게는 처음일 수 있다.
그 처음 앞에 틀린 이름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림 옆의 기록

그림을 가지고 있다고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잘못 붙이면 눈은 다른 이야기를 찾아간다.
짧은 기록 하나도 감상의 길을 바꾼다.

원화가 있는 곳을 적는다.
사진을 만든 사람과 공개할 수 있는 범위도 살핀다.
아끼는 마음이 클수록 작은 항목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같은 그림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다만 먼저 같은 그림을 보고 있어야 한다.
보관과 기록은 그 만남을 받친다.

마지막 그림 옆에

〈마지막 작품〉에는 작은 말이 있다.
작은 땅, 위쪽의 태양과 먼 배도 있다.
점 하나로 끝났다는 말보다 먼저 그 화면을 본다.

〈네모의 상〉의 손은 나중에 사라지기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다.
그때의 화면에서 이미 자리를 얻었다.
마지막 그림이 앞선 그림들을 대신하지 않는다.

포갠 손과 작은 말.
실내의 의자와 넓은 바다.
한 화가의 이름 아래 서로 다른 그림들이 남는다.

책에 없는 그림

변시지는 당시 보고 있던 자료에 나오지 않은 그림도 많다고 했다.
일본에서 가져온 공부 과정의 그림들도 이야기했다.
아직 더 살펴볼 자리가 있다.

책에 없다고 전시된 적도 없는 것은 아니다.
팔리지 않았다고 아무도 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모르는 칸에 걸작이라는 말을 먼저 넣지 않는다.

새 그림이 익숙한 이야기와 다를 수 있다.
그때는 그림을 빼놓기 전에 이야기를 고친다.
알고 있던 화가가 조금 달리 보일 수 있다.

읽을 수 있게 한 손

요 반 고흐-봉어는 1914년 빈센트의 편지를 세 권으로 엮었다.
그림을 남기는 일과 편지를 읽히게 하는 일은 달랐다.
그 사이에 한 사람의 일이 있었다.

제목을 찾고 날짜를 견준다.
흐린 문장을 읽고 다른 언어로 옮긴다.
그런 손이 없으면 남은 것마저 다시 멀어질 수 있다.

이름을 크게 쓰는 일만이 계승은 아니다.
작게 적더라도 출처를 분명히 남긴다.
다음 사람이 자기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말도 거리를 건넌다

마른 풀잎색이라는 말을 옮긴다.
그림을 보며 붙인 비유인지, 화가가 직접 쓴 말인지도 남긴다.
색의 이름 곁에 말한 사람의 자리가 있다.

‘그렇게 읽을 수 있다’를 ‘그렇게 그렸다’로 바꾸지 않는다.
쉽게 읽히게 하려고 작품의 질문을 늘리거나 줄이지 않는다.
가까이 건네면서도 남겨야 할 거리가 있다.

다른 언어의 독자는 다른 곳을 먼저 볼 수 있다.
같은 그림에서 서로 본 자리를 말한다.
모두 같은 감동을 받아야 만난 것은 아니다.

모른다는 자리

찾지 못한 그림을 사라졌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태운 것과 잃은 것도 다르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 사이를 메우지 않는다.

확인되지 않았다고 적는다.
그 짧은 말 곁에 다음 자료가 들어올 자리를 둔다.
남은 그림을 아끼기 위해 없어진 운명을 꾸미지 않는다.

새 기록이 오면 목록을 고친다.
왜 고쳤는지도 남긴다.
잘못 알았을 때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생긴다.

다음 눈을 위해

그림은 이미 만들어졌다.
그림을 읽을 자리는 계속 만들어진다.
화가가 남긴 것 곁에 남은 사람의 일이 놓인다.

큰 숫자보다 정확한 이름 하나가 필요할 때가 있다.
찬사보다 도판 두 장을 구별하는 일이 먼저일 때도 있다.
그림을 오래 건네기 위한 작은 일이다.

화면 아래 작은 말이 있다.
위쪽의 배는 멀다.
이름을 읽던 눈이 그 넓은 사이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