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예술철학 · 92 / 100
술과 예술
발견 뒤에 남은 시간
Alcohol and Art
밤과 낮
제주에서 자기 그림을 찾던 변시지는 해변에 앉아 고민했다고 했다.
밤에는 술을 마셨다.
어느 날 낮의 해변에서 흰 것이 누렇게 달라 보이는 것을 보았다.
그 색에 착안해 그림으로 옮겨보려 했다.
본 것과 그린 것 사이에 생각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림이 저절로 완성된 이야기는 아니다.
바다를 보고 돌아온다.
색을 고르고 다시 본다.
발견 뒤에도 화가가 해야 할 일은 남아 있다.
도취라는 말
니체는 꿈과 형상, 도취가 예술에서 만나는 일을 생각했다.
그 곁에서 이 그림들을 읽어본다.
강한 경험이 어떻게 남는 형식을 얻는지 묻는다.
〈난무〉의 하늘에는 날개가 흩어져 있다.
돌담에는 머무는 새도 있다.
눈은 날개와 낮은 돌 사이를 오간다.
그림이 흔들린다고 그린 사람도 취해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 흔들리는 것은 보는 우리의 눈일 수 있다.
화면의 리듬과 그날의 몸 상태는 다르다.
술 옆에 시가 있다
보들레르는 「취하라」에서 술 옆에 시와 덕행을 놓았다.
바람과 물결과 새에게 시간을 묻게 했다.
그 도취는 술 한 잔 안에만 있지 않다.
이것은 두 작품을 함께 읽으며 만드는 만남이다.
변시지가 그 시를 읽고 그렸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 생각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다.
처음에는 새떼가 보인다.
다시 보면 돌 위의 작은 새가 보인다.
모든 것을 잊기보다 하나를 더 보게 되는 순간도 있다.
하룻밤의 이야기 밖에
술을 마시고 한밤에 걸작을 그렸다는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그전에 배우던 날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뒤에 고치던 날도 빠지기 쉽다.
조용히 고른 선도 거칠게 보일 수 있다.
물 흐르듯 보이는 선에도 긴 연습이 있을 수 있다.
남은 선만으로 지나온 시간을 다 알지는 못한다.
마음이 크게 움직인 뒤에도 고를 일은 남는다.
무엇을 바꾸고 어디에서 멈출 것인가.
그 물음을 지나야 한순간이 그림에 머문다.
작은 접촉
〈풍랑〉의 집 둘레로 밝은 획들이 비스듬히 지난다.
아래에는 사람과 말이 가까이 있다.
큰 움직임 속의 작은 접촉이다.
그 가까움에서 위로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속마음을 알아낸 것은 아니다.
다 알지 못해도 곁을 볼 수 있다.
아픈 그림을 아낀다고 더 아파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술의 이야기도 그렇다.
그림이 남았다는 이유로 그 삶의 어려움을 필요한 일이었다고 부르지 않는다.
폴록의 다른 시간
폴록-크래스너 하우스의 기록에는 폴록이 술을 끊었던 1948–1950년이 나온다.
그때 중요한 그림들을 만들었다.
술과 충동만으로 그를 설명하면 이 시간이 빠진다.
그렇다고 술을 끊으면 걸작이 생긴다는 말도 아니다.
재료와 방, 반복과 판단, 사람들과의 관계가 있었다.
한 사람의 그림은 한 병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폴록에게 충동만 주고 변시지에게 절제만 주지 않는다.
각자의 화면에 무엇을 남겼는지 본다.
다르게 그린 두 사람에게 모두 고르는 시간이 있었다.
다시 보는 눈
변시지는 더 좋게 하려다 좋은 것을 잃기도 했다고 했다.
빨리 그렸는지 오래 그렸는지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도 했다.
강렬했던 순간 뒤의 손을 생각하게 한다.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
아끼던 획이 다른 형상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그때 좋았던 것이 지금도 그림 안에서 필요한지.
처음 떠오른 것을 모두 지킬 필요는 없다.
바꾸는 데도 자유가 있다.
도취가 지나간 뒤, 그림 앞에 남아 있는 일이다.
나는 새 곁에
구술에 남은 술을 지우지 않는다.
그 술에 모든 그림을 맡기지도 않는다.
보고 시험하고 다시 그린 사람을 함께 남긴다.
〈난무〉에도 멈춤이 있다.
날개와 날개 사이, 새가 앉은 돌 위에 있다.
춤은 그 머묾 곁에서 더 또렷해진다.
새들이 하늘에 흩어져 있다.
눈이 돌담 위의 새 한 마리에 머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