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비교와 맥락 · 87 / 100
마티스의 색, 변시지의 선
선 옆에 남은 색
Matisse’s Colour, Byun Shi-Ji’s Line
둘을 떼어놓지 않고
마티스에게는 색이 있고 변시지에게는 선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마티스의 색에도 가장자리가 있다.
변시지의 선 곁에도 넓은 색이 남아 있다.
〈빈 집〉의 검은 선이 집을 세운다.
넓은 마른 풀잎색은 그 집을 작게 한다.
배는 그 색의 먼 곳에 있다.
선은 어디에서 끝나는가.
색은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집을 알아보고도 눈은 그 둘레를 떠나지 못한다.
붉은 방의 가는 틈
마티스의 〈붉은 화실〉에서는 벽과 바닥을 붉음이 잇는다.
가구의 윤곽에는 붉은색을 채우지 않은 가는 틈이 있다.
칠하지 않은 곳이 선으로 보인다.
붉음은 방을 하나로 묶는다.
가는 틈은 그 안의 사물을 다시 나눈다.
같은 색 안에 있어도 탁자는 탁자로 남는다.
〈빈 집〉에서는 밝은 곳과 짙은 획이 만난다.
붉은 방과는 다른 만남이다.
둘 다 선과 색이 함께 사물의 자리를 만든다.
노트 속의 몸
변시지의 노트에는 마티스의 형태론이 있다.
몸의 중요한 선을 남겨 그 몸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색을 읽던 화가의 눈이 몸의 선에도 머물렀다.
멈춘 몸에도 움직임이 남을 수 있다.
손을 어디에 두었는지, 무게를 어디에 실었는지 본다.
달리고 있지 않아도 몸은 가만한 물건과 다르다.
노트에 적힌 마티스의 말은 마티스의 말로 남겨둔다.
그 곁에서 변시지가 무엇을 읽었는지 살핀다.
읽은 문장과 그린 그림 사이에도 거리가 있다.
검정이 밝음을 만든다
〈정오〉에는 획이 많다.
나무의 어두운 덩어리 둘레로 밝은 자리가 움직인다.
그림의 빛은 태양의 원 안에만 있지 않다.
검정은 가늘어졌다가 모인다.
선이던 것이 덩어리가 된다.
그 곁의 마른 풀잎색도 조금씩 달리 보인다.
변시지는 같은 누런 톤도 그리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본 색을 그대로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화면 앞에서 다시 고르는 일이 남았다.
가위 뒤의 시간
마티스의 종이 오리기에는 가위만 있지 않았다.
종이를 칠하고 말리는 손, 핀으로 고정하는 손이 있었다.
잘라놓은 모양도 자리를 바꿨다.
모양 하나를 옮기면 옆의 빈 곳이 달라진다.
가위질은 끝났어도 그림은 끝나지 않았을 수 있다.
남겨진 것이 적을수록 그 자리가 더 또렷이 보인다.
변시지도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손댔다.
구도를 생각하는 시간이 있었다.
간단해 보이는 그림 뒤에도 여러 날이 놓일 수 있다.
본 것 가운데 남기는 것
눈앞의 것을 모두 넣을 수는 없다.
많이 보았어도 덜 그려야 할 때가 있다.
무엇을 남길지는 다시 그림 앞에서 정한다.
마티스의 붉음도, 변시지의 밝은 바탕도 선택을 거쳤다.
색은 마음대로 붙인 이름도 아니고 저절로 생긴 흔적만도 아니다.
그림 안에서 다른 것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두 화가가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할 필요는 없다.
닮은 선택이 다른 그림을 낳을 수 있다.
다른 그림이 같은 물음을 다시 건넬 수도 있다.
집이 작아지는 곳
〈빈 집〉에서 집만 떼어내면 작음도 달라진다.
넓은 바다와 먼 배가 곁에 있어 집은 작다.
그 집의 크기에는 둘레의 몫이 있다.
〈정오〉의 작은 틈은 많은 획 사이에 있다.
넓게 비어 있지 않아도 눈이 쉴 곳은 생긴다.
눈은 그 틈에서 다음 획으로 건너간다.
대상 하나만 잘 그리는 일이 아니다.
그 곁에 무엇을 두고 무엇을 두지 않을지 보는 일이다.
선은 그 둘레와 함께 살아난다.
다른 그림 곁에서
한 사람은 정복하고 다른 사람은 항복했다고 쓰지 않는다.
붉은 방과 작은 집은 그런 승부를 하지 않는다.
각자의 색 안에서 사물의 자리를 만들 뿐이다.
변시지의 노트에는 다른 화가가 남아 있다.
배웠다고 닮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그림을 보고 자기 그림으로 돌아올 수 있다.
집의 검은 선 옆에 밝은 곳이 있다.
눈이 거기 머문다.
집이 조금 더 작아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