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Ⅶ 비교와 맥락

Ⅶ 비교와 맥락 · 86 / 100

에콜 드 파리와 에콜 드 서귀포

서로 다른 곳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

École de Paris and École de Seogwipo

선착장 / The Landing · 1979. 뭍의 사람과 작은 배 사이에 넓게 남겨진 수면. / A stretch of water separates a figure on shore from a small boat.
〈선착장〉 · 1979FŪDO 078
빈 집 / Empty House · 1987. 왼쪽의 작은 집과 기울어진 나무, 오른쪽 먼 배와 태양. / A small house and leaning tree at left, with a distant boat and sun to the right.
〈빈 집〉 · 1987FŪDO 062

배와 뭍 사이

〈선착장〉에서 사람은 뭍에 서 있다.
배는 가까운 물 위에 있다.
가까워도 둘은 닿지 않는다.

파리 옆에 서귀포를 적는다.
서귀포를 작은 파리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그린 그림이 어떻게 저곳의 사람에게 닿는지 보고 싶다.

‘에콜 드 서귀포’는 이 글이 빌린 이름이다.
그 이름으로 활동한 유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름 아래에 먼저 한 사람의 그림을 놓는다.

도시에 온 사람들

파리로 온 화가들의 사정은 달랐다.
박해를 피해 온 사람도 있었다.
조금 더 자유롭게 그릴 곳을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그림을 그리려면 방이 필요하다.
그 방 밖에는 그림을 보여줄 사람도 있어야 한다.
큰 도시에 도착했다고 그 문들이 모두 열리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 틈에서도 혼자일 수 있다.
혼자 있는 방에도 누군가의 도움이 닿을 수 있다.
지도에는 그 거리가 나오지 않는다.

지나온 방들

변시지는 도쿄의 하숙집에서 아틀리에 촌으로 옮겨갔다고 회고했다.
다른 화가들 가까이에서 지낸 시간도 있었다.
제주로 돌아왔다고 그 시간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유럽에서는 걷다가 그릴 곳을 만나면 그렸다.
길을 찾아가고, 그림을 그리고, 다시 걸었다.
그의 붓이 머문 곳은 제주만이 아니었다.

돌아온 사람의 눈에는 떠나 있던 곳도 남는다.
제주의 나무를 보면서, 먼 곳에서 배운 손으로 그린다.
고향은 그 손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지 않는다.

엽서를 보내다

한 사람의 화풍과 한 도시의 삶은 같지 않다.
변시지를 말한다고 서귀포를 다 말한 것은 아니다.
그곳에는 다른 그림과 다른 하루도 있다.

기당미술관에 걸 작품을 모으려고 그는 화가들에게 엽서를 보냈다.
기증을 부탁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한 사람씩 따로 교섭했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 손 옆에 부탁하는 손이 있었다.
자기 그림을 그렸다고 모든 일을 혼자 한 것은 아니다.
그림 곁에 그 손들도 남겨두고 싶다.

빈 집의 둘레

〈빈 집〉의 집과 나무는 한쪽에 모여 있다.
멀리 배가 있다.
눈이 그 배에 닿으려면 넓은 바탕을 지나야 한다.

그림에 사람이 적다고 화가의 삶에도 사람이 적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만난 사람을 모두 그리지 않았다.
만남 뒤에 남은 거리만 보일 때도 있다.

혼자 볼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눈이 필요한 때도 있다.
조용한 그림 한 점이 많은 사람을 거쳐 우리 앞에 온다.

먼 곳에 걸리기 전

그림이 먼 나라에 걸리면 새로운 사람이 본다.
그렇다고 그전까지 그림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작은 집은 먼 나라에 가기 전에도 작은 집이었다.

돌담은 돌담이라고 알려줄 수 있다.
초가의 이름도 옮겨줄 수 있다.
그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도 집 앞의 작은 몸을 볼 수 있다.

작품명 하나를 바르게 옮긴다.
연도를 확인하고, 같은 그림을 연결한다.
먼 독자가 다시 찾아올 길은 그런 작은 일에서 생긴다.

같은 바람, 다른 그림

같은 섬에 살아도 그림은 다르다.
바람을 맞은 몸이 다르고, 돌아갈 집이 다르다.
그 바람을 겪기 전에 살아온 날들도 다르다.

변시지는 마음의 풍경이 제주에만 머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그리려는 것은 어느 고장의 경치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일이기도 했다.

장소를 부르는 이름이 담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 화가가 그린 제주 곁에 다른 사람의 제주도 있어야 한다.
그림은 한 사람의 것이어도 섬은 그렇지 않다.

다시 선착장으로

파리와 서귀포 중 한 곳을 높이 세우지 않아도 된다.
서로 다른 곳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그렸는지 살피면 된다.
그 차이를 없애지 않아도 그림들은 만난다.

먼 나라의 사람은 굽은 몸을 먼저 볼 수 있다.
그다음 그 몸이 서 있는 땅의 이름을 물을 수 있다.
그림으로 들어오는 순서는 하나가 아니다.

사람은 뭍에 있다.
배는 물 위에 있다.
그 사이의 물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