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비교와 맥락 · 85 / 100
추상표현주의와 변시지
형상을 남기는 선택, 화면을 읽는 다른 길
Abstract Expressionism and Byun Shi-Ji
같은 시대를 정확히 놓기
1950년 무렵 뉴욕의 추상표현주의와 변시지의 제주 그림을 바로 나란히 놓으면 서로 다른 시간이 겹친다. 변시지의 〈네모의 상〉은 1951년의 인물화이고, 이 글에서 함께 보는 〈정오〉는 2007년 작품이다. 동시대의 선택을 비교하는 일과 서로 다른 시기의 형식을 비교하는 일은 구별해야 한다.
드 쿠닝의 〈여인 I〉은 1950–52년에 제작되었다. 형상이 강하게 남아 있는 이 작품은 추상표현주의가 인간 형상을 모두 지웠다는 설명을 바로 흔든다. 뉴욕의 화가들이 한 방향으로만 움직였던 것은 아니다. 변시지의 차이를 찾으려면 비교 대상의 다양성부터 남겨두어야 한다.
이 구별 뒤에 더 좋은 질문이 생긴다. 형상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형상을 알아보는 순간 화면의 다른 부분들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색과 선에 어떤 방향을 주는가. 또는 알아볼 사람이 없을 때에는 관객의 몸이 화면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가.
행위에는 통제와 되돌아봄도 있다
폴록의 〈넘버 1, 1950: 라벤더 미스트〉는 물감을 흘리는 몸의 움직임과 깊이 관련된다. 그러나 미국 국립미술관의 음성 해설에는 그가 물감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고 강조한 말도 나온다. 즉흥적인 인상과 통제의 부재는 같은 것이 아니다. 우연과 판단이 함께 작용하는 과정을 물을 필요가 있다.
드 쿠닝의 〈여인 I〉에도 다시 고치는 시간이 있었다. 모마는 오랫동안 긁어내고 덧그리며 작업한 과정을 설명한다. 거칠게 보인다는 이유로 화면을 감정의 즉각적인 방출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완성된 그림에는 움직인 손뿐 아니라 고쳐 볼 줄 아는 눈의 시간이 들어 있다.
변시지의 작업도 기다림과 재작업을 포함했다. 그러므로 폴록은 충동, 변시지는 수련이라는 대비는 설득력이 약하다. 차이를 찾을 곳은 누가 더 신중했는가라는 서열이 아니다. 각각의 판단이 물감과 화면, 알아볼 수 있는 형상에 어떤 역할을 주었는가다.
노트 속의 폴록을 다시 읽다
변시지의 추상회화 노트 판독본에는 바닥에 펼친 캔버스와 물감을 흘리며 움직이는 폴록에 관한 설명이 있다. 특히 그의 그림을 거친 바다를 보는 것 같다고 비유하고, 제작 과정의 역동성과 연결한다. 이 대목은 변시지의 자료 안에서 추상회화가 단순한 공백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폴록이 바다를 그렸다는 뜻은 아니다. 바다라는 비유가 화면의 힘을 느끼는 방법으로 쓰였다는 뜻이다. 또한 노트가 폴록을 설명한다고 해서 변시지가 그 이론을 모두 승인했거나, 정확히 반대하기 위해 구상을 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읽은 내용과 자기 작업의 선택 사이에는 더 살펴야 할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 거리는 생산적이다. 바다라는 대상을 그리지 않아도 바다의 거침을 떠올릴 수 있다면, 변시지의 바다는 형상과 그 밖의 힘을 어떻게 함께 다루는가. 배나 사람을 알아보기 전과 알아본 뒤에 같은 획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노트는 이런 비교를 시작할 근거가 된다.
몸으로 알아보이는 몇 획
〈정오〉를 멀리서 보면 짧은 획들이 화면 전체를 움직인다. 가까이 보면 나무와 집, 사람과 배가 다시 구별된다. 이 두 보기는 서로를 취소하지 않는다. 전체의 흐름 속에 들어갔다가 작은 몸으로 돌아오는 동안, 관객은 색과 선의 질서와 살아가는 장면을 함께 경험한다.
사람을 알아보는 순간 주변의 선은 다른 일을 한다. 그냥 휜 획이던 것이 몸을 둘러싼 바람처럼 느껴지고, 밝은 곳은 그 사람이 지나거나 머물 자리로 보인다. 형상은 추상적인 힘을 중단시키는 장애물이 아니다. 그 힘이 어떤 몸과 만나는지 알려주는 작은 전환점이 된다.
이것을 추상에 못 미친 구상이라고 부르면 중요한 선택이 사라진다. 반대로 모든 추상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높이면 다른 그림을 지워야 한다. 변시지의 선택은 비교적 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화면의 넓은 움직임을 살리면서, 그 움직임 속에 있는 누군가를 알아볼 만큼의 형상을 남기는 것이다.
만드는 몸과 그려진 몸
폴록의 화면을 볼 때 우리는 물감이 지나간 길에서 그린 몸의 움직임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은 제작 행위를 다시 공연하는 것과 같지 않다. 바닥에서 만들어진 그림도 벽에서는 다른 거리와 높이로 보인다. 만드는 몸과 보는 몸은 서로 연결되면서도 같은 자리에 있지 않다.
변시지의 획에도 그리는 몸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여기에 그려진 몸이 더해진다. 붓이 움직였다는 흔적과 사람이 서 있다는 형상이 겹치지만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손목의 방향을 실제 인물의 고통과 동일시할 수 없는 이유다. 화면은 제작자의 몸을 보여주면서 다른 몸을 상상할 자리도 만든다.
〈정오〉에서 나무의 짙은 부분과 사람의 작은 윤곽은 같은 크기의 흔적이 아니다. 사람을 그린 선은 주변의 수많은 획 가운데 일부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몸으로 묶인다. 그 중첩이 이 그림의 긴장이다. 물감이라는 사실을 잃지 않으면서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
다른 길은 다른 길을 낮추지 않는다
한국의 추상회화를 모두 외국의 유행을 따라간 결과로 묶으면 변시지의 길도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화풍을 택한 동기와 그것으로 이룬 성취는 작품마다 다르게 물어야 한다. 구상이라는 이유로 보수적이지 않듯, 추상이라는 이유로 뿌리를 잃은 것도 아니다. 외형의 분류만으로 작업의 주체성을 판단할 수 없다.
변시지가 놓지 않은 것은 정확한 외형의 복제라기보다 사람과 사물 사이의 알아볼 수 있는 관계라고 읽을 수 있다. 지팡이가 땅을 짚고, 말이 다른 몸 곁에 서고, 집이 멀리 놓인다. 이런 관계가 색과 선의 실험을 생활의 장면에 연결한다. 그 연결을 택했다고 다른 회화가 관계를 표현하지 못한다고 할 필요는 없다.
비교는 결국 각 작품이 관객에게 무엇을 하게 하는지로 돌아온다. 넓은 색 앞에 오래 서게 하는가. 움직이는 획을 따라가게 하는가. 작은 사람을 알아본 뒤 화면 전체를 다시 보게 하는가. 서로 다른 응답이 가능하다는 것이 한쪽의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 변시지의 고유함은 그 차이들 사이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형상이 남기는 물음
구상적 추상이라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두 범주를 초월한 최고의 단계가 아니라 서로 오가는 감상을 가리키는 말이어야 한다. 나는 먼저 획을 보고, 사람을 알아보고, 다시 획으로 돌아온다. 그 반복 속에서 사람도 물감도 사라지지 않는다. 분류보다 이 왕복의 경험이 변시지의 그림을 설명하는 데 더 가깝다.
남은 형상은 작지만 작은 장식은 아니다. 그 형상 때문에 큰 화면의 힘이 누군가의 하루와 연결된다. 그렇다고 관객에게 한 가지 감정이나 결론을 명령하지도 않는다. 얼마나 견딜 것인가보다 어디에 서 있는가, 누구와 가까운가를 다시 묻게 한다. 한 사람의 자리에서 화면 전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짧은 획들이 화면을 지난다. 그중 몇 획이 사람으로 보인다. 눈은 그 앞에서 조금 늦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