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Ⅶ 비교와 맥락

Ⅶ 비교와 맥락 · 84 / 100

고갱의 타히티, 변시지의 제주

섬을 그리는 사람은 어디에 서 있는가

Gauguin’s Tahiti, Byun Shi-Ji’s Jeju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Where Do We Come From, and Where Are We Going? · 1992. 큰 절벽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른쪽 아래 바위 위에 앉아 고개를 숙인 사람과 그 곁의 말이 있다. 왼쪽 먼 수면에 작은 배가 보인다. / A large cliff occupies most of the picture. At lower right a seated figure bows its head, with a pony beside it. A tiny boat appears on the distant water at left.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1992
선착장 / The Landing · 1979. 뭍의 사람과 작은 배 사이에 넓게 남겨진 수면. / A stretch of water separates a figure on shore from a small boat.
〈선착장〉 · 1979FŪDO 078

섬으로 가는 두 길

고갱은 타히티로 갔고 변시지는 제주로 돌아왔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그러나 낯선 곳으로 간 사람과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라는 구분만으로 두 그림의 가치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도착한 장소에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보았는지, 그 관계를 화면에 어떻게 옮겼는지가 더 필요하다. 이동의 방향은 비교의 시작이지 결론은 아니다.

타히티는 고갱의 상상력을 위해 비어 있던 섬이 아니었다. 그가 1891년에 찾아간 곳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 아래 있었고, 이미 변화하는 생활을 가진 사회였다. 보스턴미술관의 해설도 그가 기대한 낙원과 마주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설명한다. 원시라는 말보다 먼저 그 현실을 두어야 한다.

변시지의 제주 또한 어린 날 그대로 멈춘 섬은 아니었다. 그의 구술에는 달라진 풍경을 보며 옛 풍경을 떠올리는 과정이 나온다. 고향의 기억이 현재의 눈을 대신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남아 있는 것이 기억을 움직였다. 돌아왔다는 말 안에도 다시 배워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낙원을 찾는 눈과 그곳의 생활

낙원을 찾는 시선은 처음부터 어떤 것을 보지 않기로 할 수 있다. 변화한 옷과 집, 새로운 상품, 갈등과 노동은 순수한 섬의 이미지에 불편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고갱의 타히티를 읽는 일은 그가 무엇을 아름답게 만들었는지와 함께 무엇을 화면 밖에 남겼는지 묻는 일이다. 상상의 힘과 그 선택의 책임은 함께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타히티 사람들을 화가의 환상에 쓰인 수동적인 소재로만 다시 부를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비판조차 그들의 삶을 지운다. 그림 속 인물을 누가 이름 붙였는지, 그 사회의 언어와 지식으로는 어떻게 다르게 읽을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화가의 자전적 설명만으로 섬의 목소리가 모두 들린 것은 아니다.

이 질문은 작품을 보지 말자는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함께 보자는 요청이다. 색면의 힘과 인물의 배치를 살피면서, 그 인물들이 어떤 관계 속에서 나타났는지도 묻는다. 형식의 혁신과 시선의 문제는 서로를 지우는 판결문이 아니라, 함께 읽어야 할 두 층위다.

귀향은 소유의 권리를 뜻하지 않는다

고향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특정한 기억과 관계를 준다. 그러나 고향의 모든 사람을 대신 말할 권리까지 주지는 않는다. 같은 섬에 살아도 집의 형편과 몸의 사정, 지나온 시간이 다르다. 내부자의 시선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이런 가까운 책임을 드러낼 때다. 아무 오류도 없다는 보증이 될 때가 아니다.

변시지를 풍경의 주인이라고 부르기보다 풍경 안에 자신의 작은 자리를 둔 화가로 읽어보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의 사람은 산을 지배하는 자리에 있지 않다. 오른쪽 아래에 작게 앉아 있고, 말은 그 곁에서 고개를 낮춘다. 큰 자연은 두 몸이 함께 있어도 작아지지 않는다.

이 화면에서 귀향은 권좌를 되찾는 장면보다 앉을 자리를 얻는 일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 자리가 안전한지, 영원히 자기 것인지 그림은 말하지 않는다. 소속은 거대한 풍경을 소유하는 감정이 아니라, 그 풍경 안에서 다른 존재와 함께 있어보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원시 대신 구체적인 것을 남기기

돌담과 초가집을 문명 이전의 흔적으로만 보면, 그것을 쌓고 고치고 사용한 사람들의 기술이 사라진다. 소박한 집은 지식이 없어서 생긴 형태가 아니다. 몸을 두고 살아가는 생활의 형식이다. 변시지의 화면에서도 집을 오래된 상징으로만 읽기보다 벽과 지붕, 문턱이 어떤 자리를 만드는지 볼 필요가 있다.

마른 풀잎색도 원초적인 땅의 색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바랜 것 같은 감각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안에는 화가가 새로 만든 명암과 농도, 형상과 간격의 질서가 있다. 이 색은 땅을 그대로 옮긴 표본이 아니라, 땅과 빛을 겪고 다시 구성한 화면의 색이다. 가까운 기억과 작업의 판단이 함께 필요하다.

고갱의 원시주의를 비판하면서 변시지의 제주를 더 순수한 원시로 칭찬한다면 같은 틀이 남는다. 비교가 나아갈 방향은 누가 더 순수했는가가 아니다. 각 화가가 어떤 현실을 선택하고 변형했으며, 그 과정에서 누구의 삶이 보이거나 가려졌는가다.

비슷한 질문, 다른 제목

고갱의 큰 그림에는 세 질문이 제목으로 붙어 있다.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어디로 가는가. 1897–98년의 작품이다. 변시지의 1992년 작품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다. 중간 질문이 원제에 없으므로 영어 번역에도 임의로 넣지 않는다. 닮은 물음이 있다고 두 제목을 같은 문장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제목의 닮음만으로 직접적인 영향 관계를 확정할 수도 없다. 그 관계를 밝히려면 작가의 기록이나 발언, 작품을 접한 경로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영향이 확인되기 전에도 비교는 가능하다. 같은 삶의 물음이 어떤 화면에서는 사람들의 연속으로, 다른 화면에서는 자연과 작은 몸의 거리로 나타나는지 물을 수 있다.

고갱의 화면을 보스턴미술관은 오른쪽의 어린아이에서 왼쪽의 늙은 인물로 이어지는 삶의 단계와 연결해 설명한다. 변시지의 화면에는 그런 단계별 인물의 행렬이 없다. 대신 산의 큰 덩어리와 아래쪽 두 몸, 먼 배가 서로 다른 크기로 놓인다. 한쪽은 시간을 인물들 사이에서 읽게 하고, 다른 쪽은 존재의 크기와 거리로 질문하게 한다.

감상하는 자리에도 책임이 있다

두 화가의 인물을 육체와 정신으로 나누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고갱의 인물은 관능뿐이고 변시지의 인물은 실존뿐이라는 설명은 몸을 너무 쉽게 사용한다. 감각과 삶의 물음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몸이 누구의 시선 아래 놓이며, 어떤 행동과 침묵을 허락받는가다.

이 책임은 화가에게만 있지 않다. 관객도 말의 낮춘 머리를 복종으로, 앉은 사람을 패배로 빠르게 이름 붙일 수 있다. 그 이름을 잠시 늦추고 발과 땅, 머리와 다른 몸 사이를 살펴보자. 그림 속 존재가 내 해석을 위한 예시로만 남지 않을 때, 감상은 조금 더 가까운 일이 된다.

고향을 안다는 확신과 낯선 곳을 안다는 확신은 모두 다시 점검할 수 있다. 낯섦을 소비하지 않는 일, 친숙함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일은 서로 다른 과제이지만 함께 필요하다. 비교는 두 화가를 심판하는 자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림을 보는 우리의 자리를 바꾸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

산의 크기와 몸의 거리

변시지의 그림에서 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크고 무거운 형태가 화면을 차지하고, 비스듬한 획들이 그 표면을 흔든다. 아래쪽의 사람과 말은 그 덩어리와 다른 크기로 남아 있다. 큰 것이 작아지고 작은 것이 커지는 환상보다, 그 크기의 차이가 계속 유지되는 점이 중요하다.

바다 쪽의 배는 두 몸보다도 멀다. 배를 바라보면 화면의 거리가 길어지고, 사람에게 돌아오면 다시 좁은 땅이 생긴다. 눈은 넓음과 가까움 사이를 오간다.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은 도착지의 이름보다 이 움직임에서 먼저 살아난다. 그림 안의 길을 다 알지 못해도, 바라보는 눈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여백을 친숙한 고향만이 허락하는 특권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낯선 화가도 비울 수 있고 귀향한 화가도 빽빽하게 그릴 수 있다. 이 그림의 넓음이 특별한 것은 국적 때문이 아니라 작은 몸이 사라지지 않을 만큼의 자리를, 큰 자연이 줄어들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함께 두었기 때문이다.

돌아온 뒤에도 남는 바다

귀향이 끝났다는 것을 오래 머문 햇수로 증명할 수는 없다. 사람은 한곳에 살아도 계속 관계를 고쳐 맺는다. 변시지도 구술에서 유럽의 풍경을 그리며 자신을 화면에 두었다고 말한다. 제주와의 깊은 관계가 다른 장소를 닫은 것은 아니었다. 귀향의 의미는 이동을 끝내는 데만 있지 않다.

〈선착장〉의 배는 뭍 가까이에 있지만, 그 가까움만으로 모든 만남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배와 사람 사이에 수면이 남아 있다. 돌아오는 것과 다 닿는 것의 차이는 이처럼 작은 간격에서도 느껴진다. 고향의 그림은 상실을 모두 회복해주는 약속보다, 그 간격을 안고 살아가는 형식이 될 수 있다.

큰 산 아래에 사람이 앉아 있다. 말은 곁에서 고개를 낮춘다. 바다에는 작은 배가 있다. 두 몸이 돌아앉아도 바다는 그만큼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