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비교와 맥락 · 83 / 100
들라크루아와 노자
색의 관계와 덜어냄을 읽는 비교
Delacroix and Laozi
비교를 시작하는 사람의 자리
들라크루아와 노자를 한 문장에 놓으면 쉽게 큰 이야기가 생긴다. 색을 펼치는 화가와 덜어냄을 말하는 사상가가 결국 같은 진리에 닿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비교가 먼저 결론을 정할 필요는 없다. 한쪽의 말로 다른 쪽을 번역하다가 남는 차이도 생각의 자리가 될 수 있다.
변시지의 색채론 판독 자료에는 들라크루아의 관찰과 일기, 회색에 관한 말이 나타난다. 이 기록을 읽는 것과 두 사상가의 만남을 화가가 직접 선언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여기서는 확인한 독서의 흔적에서 출발해, 노자의 문장과 나란히 읽을 때 변시지의 그림에 어떤 새 질문이 생기는지 살핀다.
그 질문은 색이 많은가 적은가에 머물지 않는다. 무엇을 더해야 관계가 살아나고, 무엇을 더하면 오히려 가려지는가. 화가는 매번 이 두 판단 사이에 있다. 풍부함과 절제는 작품을 가르는 두 편이 아니라 한 그림 안에서도 함께 필요한 능력일 수 있다.
회색이라는 낱말의 앞뒤
판독본은 모든 회화에서 회색이 적이라는 말을 들라크루아의 일기에 귀속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 면에서는 그림이 비스듬한 빛 아래에서 어둡게 보이는 문제와 색조를 조절하는 일을 설명한다. 그 뒤에는 빛이 너무 강하면 중간색이 사라질 수 있다는 대목도 있다. 문장을 앞뒤와 함께 읽으면, 특정 안료에 대한 금지보다 보이는 조건과 색의 관계가 중요해진다.
따라서 회색을 죽음, 선명한 색을 생명이라고 곧바로 나눌 필요는 없다. 약한 색이 있어야 강한 색의 자리가 보이기도 한다. 모든 부분이 큰 소리를 내면 서로의 차이를 듣기 어려운 것과 같다. 회색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그 이름보다 주변에 무엇이 놓였는가에 달려 있다.
〈정오〉의 짙은 획도 모두 똑같이 검지 않다. 밝은 바탕에 스미듯 약해지는 부분과 나무처럼 뭉친 부분이 함께 보인다. 이 차이를 지우고 황색과 검정의 대립만 남기면 화면은 오히려 단순해진다. 적은 색 안에도 여러 농도와 밝음의 관계가 있다.
오색을 경계한다는 것
『도덕경』 12장은 오색만 말하지 않는다. 소리와 맛, 사냥과 얻기 어려운 물건도 함께 든다. 따라서 이 대목을 회화의 색 수를 줄이라는 명령으로 곧장 옮길 수는 없다. 눈을 붙드는 자극과 욕망이 삶의 필요를 앞지르는 문제로 읽을 때, 그림을 보는 우리의 습관에도 질문이 생긴다.
무엇이 먼저 눈을 끄는가. 눈을 끈 것이 오래 남는가. 화려함을 덜어낸 뒤에도 볼 것이 남아 있는가. 이런 질문은 단색을 도덕적으로 높이고 다색을 낮추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시선을 붙잡는 힘과 오래 보게 하는 힘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것을 살피는 일이다.
변시지의 마른 풀잎색도 충분히 강한 인상을 준다. 소박한 색이니 욕망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첫 인상 뒤에 작은 집과 사람, 가지와 빈 곳이 어떻게 다시 보이는가다. 절제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눈이 한 번 더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일일 수 있다.
억지 없음은 작업 없음이 아니다
노자의 자연을 영어 nature와 곧바로 같게 놓으면 뜻이 좁아진다. 『도덕경』 25장에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의 문제와 연결된다. 48장의 덜어냄과 무위를 함께 읽으면, 더 많이 개입하는 것이 언제나 더 잘하는 일은 아니라는 질문을 끌어낼 수 있다. 이것은 화가가 아무 판단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과는 다르다.
변시지의 구술에는 좋은 효과가 나왔는데도 더 잘하려고 덧칠하다가 그것을 잃는 경험이 나온다. 처음처럼 되돌리기도 어렵다고 말한다. 이 경험은 노자의 이론을 실행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개입과 멈춤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실제 작업의 문제다. 무엇을 하지 않을지 아는 판단도 작업 안에 있다.
붓이 저절로 움직였다는 말만으로는 그 판단을 설명할 수 없다. 오래 본 눈, 마르기를 기다린 시간, 전에 고친 기억이 멈춤에 들어 있다. 억지 없는 획은 힘을 쓰지 않은 획과 같지 않다. 필요한 곳에 힘을 쓰고 나머지를 더 건드리지 않은 결과일 수도 있다.
자유와 자연 사이에 남는 차이
들라크루아의 색채 실험과 노자의 무위를 같은 개념의 두 이름으로 부르면 비교는 빨리 끝난다. 그러나 하나는 회화를 만들고 보는 구체적인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삶과 다스림까지 아우르는 사유다. 가까이 읽을 수는 있어도 서로를 남김없이 대신하지 않는다. 차이는 비교의 실패가 아니라 비교가 계속될 이유다.
루브르는 〈알제의 여인들〉을 준비한 들라크루아의 연필 습작을 보존하고 있다. 열정의 화가에게도 보고 그려보는 준비가 있었다. 그러므로 풍부한 색은 충동, 절제된 화면은 수련이라는 구분을 적용할 수 없다. 준비가 강렬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긴 망설임이 작은 획 하나로 남을 수도 있다.
변시지를 이 둘의 화해자로 세우기보다 그 차이를 견디며 작업한 화가로 읽을 수 있다. 색을 살아 있게 하는 일과 덧붙임을 멈추는 일은 서로를 없애지 않는다. 둘은 한 화면에서 번갈아 판단을 요구한다. 자유는 모든 제한을 없애는 것보다, 어떤 제한을 자기 작업의 조건으로 받아들일지 고르는 데 있을 수 있다.
색의 접점은 관계에 있다
황색이 들라크루아에게도 옳고 노자에게도 옳은 색이라는 판정은 필요하지 않다. 그림은 사상가 두 사람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빈 집〉의 밝음은 나무의 짙음과 만나고, 그 둘은 먼 배와의 간격을 만든다. 이 구체적인 관계가 색채론과 절제의 논의를 붙들어준다.
검정과 황색을 보색이라고 부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여기서 살필 것은 색상환의 정반대보다 밝고 어두움, 짙고 옅음, 넓고 좁음이 서로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검은 획이 줄어들면 넓은 색이 더 보이고, 넓은 색 때문에 작은 획이 멀리 남는다. 한 요소의 힘은 다른 요소와의 관계에서 생긴다.
이 관계를 읽으면 단순한 화면이라는 말도 달라진다. 단순함은 재료나 생각이 적다는 뜻이 아니다. 서로 필요한 것들이 남아 있다는 뜻일 수 있다. 무엇 하나를 더하거나 덜었을 때 전체의 호흡이 달라지는 자리, 그곳에서 색채의 실험과 절제의 판단은 실제로 만난다.
노트의 문장과 그림의 침묵
짧은 글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쓰인 것은 아니다. 일기의 단편은 어느 날의 관찰에 붙어 있을 수 있고, 『도덕경』의 단장은 반복과 역설 속에서 읽힌다. 변시지의 노트에는 다른 사람의 말을 옮겨 적은 자리도 있다. 문장이 짧고 감각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세 텍스트의 성격을 같게 만들 수는 없다.
오히려 옮겨 적고 비교하는 행위에 화가의 관심이 드러난다. 어떤 문장을 남겼는가. 왜 그 뒤의 설명도 적었는가. 회색이라는 강한 낱말만 떼어내지 않고 비스듬한 빛과 중간색의 문제를 함께 읽으면, 명언보다 작업에 가까운 생각을 만날 수 있다. 읽기는 화가의 목소리를 크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결을 구별하는 일이다.
그림 앞에서도 같은 절제가 필요하다. 말이 적은 화면을 곧바로 도가의 침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먼저 어느 곳에 획이 있고 어느 곳에 없는지 본다. 말은 그 차이를 따라가다가 멈출 수 있다. 그림이 모두 설명되지 않은 채 남는 것은 해석의 무능만이 아니라, 그림이 계속 보일 자리이기도 하다.
하나의 진리 대신 다시 볼 자리
이 비교가 남기는 것은 들라크루아와 노자가 같은 말을 했다는 결론이 아니다. 그림을 살아 있게 하는 풍부함과 그림을 가리지 않는 절제가 서로 필요할 수 있다는 질문이다. 변시지의 색과 선은 그 질문을 추상적인 선언에 머물지 않게 한다. 밝은 자리, 짙은 획, 작은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
덜어낸다는 말도 마지막에는 다시 살펴야 한다. 적게 그렸다고 더 깊은 것은 아니고, 더 그렸다고 덜 순수한 것도 아니다. 〈빈 집〉의 넓음과 〈정오〉의 촘촘함은 서로 다른 판단을 요구한다. 두 화면이 모두 살아 있는 까닭을 물을 때, 절제는 획의 수가 아니라 관계를 다루는 태도가 된다.
〈정오〉의 나무 아래에 작은 사람이 있다. 주위에는 짧은 획이 많다. 눈은 그 사이를 지나 한 번 더 사람에게 돌아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