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Ⅶ 비교와 맥락

Ⅶ 비교와 맥락 · 82 / 100

표현주의와 사의(寫意)

감정은 어떻게 형태와 거리가 되는가

Expressionism and Saui

풍랑 / Stormy Seas · 1983. 비스듬한 밝은 획들 아래 가까이 선 사람과 말, 뒤쪽의 작은 집. / A person and pony close together beneath diagonal light strokes, with a small house behind.
〈풍랑〉 · 1983FŪDO 067
난무 / Wild Dance · 1997. 하늘의 새떼, 돌담 위에 앉은 새들, 집과 그 안의 작은 인물, 왼쪽의 말. / Birds in the sky and on a stone wall, a house with a small figure within, and a horse on the left.
〈난무〉 · 1997FŪDO 097

표현과 표현주의를 구별하기

등이 굽어 있고 나무가 기울었다고 해서 그림이 곧 표현주의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표현적인 성격과 미술사적 운동의 이름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몇 획으로 그렸다고 해서 모두 사의화는 아니다. 비교는 닮은 흔적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하되, 그 흔적이 생긴 서로 다른 조건을 함께 물어야 한다.

이 글에서 사의는 뜻을 드러내는 회화의 지향을 가리킨다. 뜻에는 감정만 아니라 관심, 판단, 사물과 맺는 관계도 포함된다. 영문에는 한국어 독음인 saui를 남기고, 중국 회화론을 논할 때 쓰이는 xieyi와 같은 한자임을 밝힌다. 어느 한 영어 낱말이 이 여러 층위를 모두 대신한다고 보지 않는다.

변시지를 두 전통의 중간에 놓기보다 두 방향에서 질문해보자. 형태의 변형은 무엇을 느끼게 하는가. 생략은 무엇에 주의를 남기는가. 이 질문들이 같은 그림에서 만나면, 표현주의와 사의는 화가에게 붙이는 두 개의 이름이 아니라 화면을 다르게 살피는 두 개의 입구가 된다.

붐비는 거리와 가까이 선 두 몸

키르히너의 〈드레스덴 거리〉에서는 높은 시점과 강한 색, 가까이 겹치는 사람들이 관객을 좁은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모마는 1908년 작품을 1919년에 다시 손본 것으로 기록한다. 격렬하게 보이는 화면에도 다시 보는 시간이 있었다. 거친 표현을 곧바로 통제되지 않은 충동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풍랑〉에서는 사람과 말이 화면 아래쪽에서 가까이 선다. 집은 그들보다 위에 놓이고, 길게 쓸린 밝은 획들이 주변을 가로지른다. 사람의 표정을 자세히 읽을 수 없어도, 두 몸이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바깥에 드러나 있는지는 느껴진다. 감정은 얼굴 안에만 있지 않고 몸들 사이의 거리에도 생긴다.

거리의 군중과 해안의 두 몸은 같은 고독을 같은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가까움이 답답함이 되는 배치도 있고, 가까움이 잠시 의지할 가능성이 되는 배치도 있다. 색이 더 세거나 몸이 더 많이 뒤틀렸다고 감정이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강도들이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다.

사의에도 낯섦과 긴장이 있다

사의의 세계를 언제나 고요하고 조화로운 것으로 놓으면 팔대산인의 새들이 불편해진다. 〈연당희금도〉의 굽은 연줄기와 큰 잎, 작은 새들 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이 작품을 비단의 한 종류인 새틴 위에 먹으로 그린 두루마리로 기록한다. 먹그림의 바탕을 모두 흰 종이로 상상하는 습관도 여기서 멈춰야 한다.

생략된 형상은 반드시 평온하지 않다. 오히려 주변이 줄어들수록 작은 눈과 부리, 몸의 방향이 더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므로 서양은 변형하고 동양은 덜어낸다는 구분은 너무 단순하다. 변형과 생략은 한 작품에서도 함께 일할 수 있고, 어느 쪽도 감정의 독점적인 방식이 아니다.

〈난무〉의 새들은 하늘에만 있지 않다. 돌담 위에 머무는 새도 있고, 집 아래쪽에는 사람과 말의 자리가 남아 있다. 작은 검은 형상이 반복되지만 모두 같은 상태는 아니다. 사의의 눈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은 새를 몇 획으로 줄였는가만이 아니라, 줄인 형상들 사이에 얼마나 다른 관계를 남겼는가다.

변형과 생략은 같은 화면에서 일한다

변형은 대상을 틀리게 그리는 일과 같지 않다. 화면 안에서 방향과 무게, 움직임의 관계를 새로 만드는 일일 수 있다. 생략 역시 세부를 적게 쓰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보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형태가 바뀌거나 줄어든 뒤 무엇이 더 뚜렷해졌는지를 보아야 한다.

〈풍랑〉의 집은 낮고 기울어져 보이지만, 그 집을 동양적인 안식으로만 읽기는 어렵다. 몸들을 보호하기보다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 드러내는 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집이 있다는 사실과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다르다. 그림은 그 차이를 표정 대신 배치로 느끼게 한다.

자연의 격렬함은 서양적이고 인물의 절제는 동양적이라고 나누면 같은 붓질이 만든 관계가 갈라진다. 나무의 굽음과 사람의 굽음은 서로를 비추고, 밝은 획은 집과 몸을 함께 지난다. 한 화면의 상호작용을 두 문명의 성격으로 분배하기보다, 각 부분이 함께 무엇을 하게 되는지 살피는 편이 정확하다.

원시라는 말이 가리는 생활

원시라는 말은 꾸밈없고 직접적인 표현을 칭찬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이 실제 사람이나 문화에 붙으면, 그들의 오랜 역사와 배움을 문명 이전의 것으로 밀어낼 수 있다. 단순한 형태를 원시적인 사람의 순수한 본능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 선이 적다고 그 선에 이르는 과정도 짧은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외국의 화가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고향을 그리는 사람도 사라진 생활을 너무 순수하게 만들 수 있다. 가난한 집을 소박한 아름다움으로만, 힘든 몸을 강인함으로만 읽으면 그 안의 불편과 필요가 지워진다. 변시지의 풍경을 가까이 읽는 일은 그 몸들을 아름다운 상징으로 바꾸는 데서 한 번 더 멈추는 일이다.

〈난무〉의 말은 하늘의 새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에게도 집의 문턱과 땅의 높이가 있다. 각기 다른 생명의 조건을 남겨두면, 단순한 그림은 오히려 복잡한 생활을 품게 된다. 하나의 순수함으로 환원하지 않을 때 작고 소박한 형상들이 더 많은 것을 견딘다.

감정을 붙이기 전에 장면을 보기

절망이나 고뇌라는 작품명은 독자의 시선을 강하게 이끈다. 그러나 제목만으로 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이번 비교에서는 원문에 등장한 두 제목의 도판을 전제로 삼지 않고, 확인한 〈풍랑〉의 화면으로 돌아온다. 슬픔이라는 이름보다 먼저, 몸과 집과 밝은 획이 어떻게 놓여 있는지 묻는다.

사람과 말의 가까움은 위로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안전해졌다는 결말은 화면에 없다. 손의 접촉처럼 보이는 작은 관계가 거대한 바깥을 없애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바깥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 가까움이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위로는 해결보다 작은 크기로 생길 수 있다.

또 변시지의 감정을 사회와 역사 밖의 원초적 감정으로만 두어서는 안 된다. 구술에서 그는 시국의 경험을 형태와 색채의 문제로 바꾸어 표현하려 했다고 말한다. 모든 폭풍을 특정 사건의 암호로 해독할 수는 없지만, 풍토와 역사 가운데 하나만 남길 이유도 없다. 사람의 자세는 두 조건을 함께 지날 수 있다.

느끼는 것은 같아지는 것과 다르다

제공된 미학 노트 판독본의 한 대목은 폴켈트의 이름 아래 감정이입을 설명한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이 현재의 지각과 만난다는 내용이다. 이어지는 대리석 조각상의 예에서는 물질 자체의 성질과 우리가 작품에서 느끼는 감정을 구별한다. 관객의 느낌이 작품의 형식과 만나는 과정을 생각하게 하는 자료다.

이 관점에서 나는 굽은 사람의 등을 보며 내 어깨를 의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감각이 그림 속 사람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사람의 삶과 나의 삶은 다르다. 공감은 그 차이를 지우지 않고도 가능하다. 물아일체 역시 여기서는 실제 경계가 없어진다는 증명보다 관계를 가깝게 느끼는 비교 언어로 제한하는 편이 낫다.

〈풍랑〉의 사람에게 내 슬픔을 모두 맡기면 그 사람을 다시 못 보게 될 수 있다. 내 기억이 움직였다는 것을 인정한 뒤에도, 말의 다리와 집의 위치로 눈을 돌려야 한다. 감상은 안으로 들어가는 일과 밖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함께할 때 깊어진다. 그림은 내 감정의 이름보다 더 오래 남는다.

폭풍의 사의라는 하나의 제안

폭풍의 사의라는 말을 제안할 수 있다. 그것은 새 사조의 이름이나 화가 자신의 선언이 아니다. 거친 힘을 보여주면서도 그 힘을 겪는 작은 존재와의 관계를 놓치지 않는 회화를 읽기 위한 말이다. 표현주의의 질문과 사의의 질문이 함께 작용하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의 부족함을 메우는 공식은 아니다.

이 제안의 가치는 설명의 웅장함보다 다시 보는 힘에 달려 있다. 〈난무〉를 다시 보면 비행 사이에 머묾이 있고, 작은 몸들 사이에 비어 있는 땅이 있다. 감정은 그 땅을 건너가지만 한곳에 고정되지는 않는다. 슬픔도 위로도, 관객이 장면을 오래 살핀 뒤에야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새들은 위에 흩어져 있다. 말은 땅에 서 있다. 사람에게는 낮은 문턱이 남아 있다. 바람은 그 셋을 같게 만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