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비교와 맥락 · 81 / 100
문인화의 정신, 유화의 물질
닮은 획과 다른 바탕이 만나는 자리
The Spirit of Literati Painting, the Materiality of Oil
정신은 물질의 바깥에 있지 않다
〈빈 집〉을 보면 먼저 넓은 마른 풀잎색이 눈에 들어온다. 집과 나무는 왼쪽에 모여 있고, 오른쪽에는 작은 배와 해가 멀리 남아 있다. 검은 획은 형상을 묶지만 그 사이의 거리를 없애지는 않는다. 먹그림이 떠오르는 것은 검정이라는 색 하나 때문만은 아니다. 적게 그린 형상과 넓게 둔 자리가 서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오르는 전통과 실제 재료는 같은 것이 아니다. 유화의 표면이 종이를 닮아 보인다고 해서 종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을 동양에, 물질을 서양에 나누어 맡기면 양쪽 회화가 실제 재료를 다루며 생각해온 과정이 가려진다. 이 그림은 정신이 낯선 그릇에 옮겨 담긴 사례보다, 그리는 뜻과 물질의 조건이 서로를 바꾼 사례로 읽는 편이 낫다.
바탕이 달라지면 붓에 같은 힘을 주어도 다른 흔적이 남는다. 화가는 그 차이를 피할 수도 있고, 작업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변시지의 화면에서 물어야 할 것은 어느 전통이 다른 전통을 이겼는가가 아니다. 다른 조건을 통과한 획이 사람과 바람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만들었는가다.
쓰는 선도 보아야 한다
조맹부의 〈쌍송평원도〉에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바위의 비백과 소나무 윤곽을 서예의 필법에 연결해 설명한다. 글씨의 방식이 풍경의 형상을 조직하는 사례다. 그림을 읽는다는 말은 이처럼 획의 문화적 기억을 알아보는 일과 관련된다. 그렇다고 그림을 보는 일이 글자를 해독하는 일로 모두 바뀌지는 않는다.
사의의 뜻은 개인의 감정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무엇에 주의를 두고 어떤 관계를 남길 것인가도 뜻에 속한다. 나무를 절개의 상징으로 안다고 해도, 그 나무가 화면에서 어디에 서고 가지가 어디까지 뻗는지는 다시 보아야 한다. 상징을 먼저 알아버리면 오히려 눈앞의 나무를 놓칠 수 있다.
변시지의 〈빈 집〉에서도 나무를 인내라고 바꾸어 읽는 순간 설명은 쉬워진다. 그러나 줄기가 집 가까이에 놓이고 가지가 빈 쪽으로 뻗는 관계는 그 한 낱말보다 구체적이다. 전통은 그 관계를 읽는 눈을 열어줄 수 있다. 읽기를 끝내는 정답이 될 필요는 없다.
마른 획과 기다린 시간
마른 듯 끊기는 선은 붓이 닿은 자리와 닿지 않은 자리를 함께 보여준다. 이를 갈필의 효과와 비교할 수 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거침만으로 물감에서 기름을 얼마나 덜었는지, 어떤 첨가물을 썼는지 알 수는 없다. 갈필이라는 말은 여기서 먼저 획의 모습을 살피는 언어다. 확인하지 않은 제조법의 이름이 아니다.
변시지의 구술에는 유화가 어느 정도 마르기를 기다린 뒤 다시 손대는 과정이 나온다. 그사이 구도를 다르게 생각하기도 한다. 완성된 획이 단번에 나온 것처럼 보이는 것과 그림 전체가 한 번에 완성된 것은 다르다. 빠른 인상 안에 느리게 고른 시간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정오〉에서는 짧은 획들이 화면 곳곳에 이어진다. 나무의 짙은 부분과 집의 윤곽, 사람의 작은 몸은 그 흐름 안에서 각기 다른 무게를 갖는다. 한 획의 기세만으로 이 화면을 설명할 수 없다. 획을 더한 자리와 멈춘 자리를 함께 볼 때, 거친 표면 속의 판단이 드러난다.
두 색에 우주를 미리 나누지 않기
검정과 누런빛에서 천지현황을 떠올리는 독자가 있을 수 있다. 그 연상 자체를 막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고전의 구절이 떠오른다는 것과 화가가 그 구절을 조형의 설계도로 삼았다는 것은 다르다. 하늘과 땅의 색을 미리 나누면, 같은 기조가 수면과 지면과 공기를 오가는 이 그림의 움직임을 오히려 좁힌다.
구술에서 변시지는 검은색을 먹필로 편지를 쓰던 관습과 연결한다. 또 같은 누런 톤도 무엇을 그리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생활 속에서 익힌 감각과 작품마다 새로 하는 선택이 함께 있다. 이를 민족에게 타고난 색채 감각이라고 바꾸면, 그 익힘과 선택의 시간이 사라진다.
검은 선도 한 가지 일을 하지 않는다. 집을 두르고, 나무의 무게를 세우고, 먼 배를 작은 흔적으로 남긴다. 밝은 바탕 역시 언제나 따뜻한 위로는 아니다. 거리가 멀어 보이게 하거나 몸의 노출을 더 크게 느끼게 한다. 색의 의미는 이름 속에 고정되기보다 서로 만나는 자리에서 생긴다.
기운생동을 화면 전체에 묻다
사혁의 『고화품록』 서문은 기운생동과 함께 용필, 형상, 색, 배치, 모사를 육법으로 든다. 이를 단순히 세부와 기술을 버리라는 주장으로 읽기는 어렵다. 생동감은 형식 바깥에 놓인 신비로운 기운만이 아니라, 여러 조형 요소를 함께 살피게 하는 물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이 개념을 변시지에게 적용할 때에는 계승의 증명보다 비교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그의 선이 살아 있다고 느낀다면, 무엇이 그 느낌을 만들었는가. 굵기인가, 꺾임인가, 다른 획과의 간격인가. 또는 작은 사람이 큰 흐름에 완전히 묻히지 않는 배치인가. 고전의 말은 관찰을 더 구체적으로 만드는 데 쓰일 수 있다.
〈정오〉의 작은 사람은 주위의 획보다 크지 않다. 그럼에도 고개와 등, 땅을 짚는 방향이 읽힌다. 움직이는 듯한 바탕과 몸으로 알아보이는 몇 획이 서로를 붙든다. 화면의 생동은 화가의 힘을 과시하는 데만 있지 않다. 약한 형상이 여전히 하나의 몸으로 보이게 하는 데에도 있다.
경계를 넘되 차이를 남기다
유화로 그린 수묵화라는 표현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유용한 입구가 된다. 그러나 그 입구에서 오래 멈추면 유화는 껍데기이고 수묵은 진짜 내용이라는 생각이 따라온다. 변시지의 유화에는 그 매체로 기다리고 고치는 시간이 실제로 남아 있다. 닮은 효과를 얻었다고 해서 서로 다른 제작 조건이 소멸한 것은 아니다.
그의 묵화 노트 판독본에는 먹빛의 움직임과 종이의 고요함이 이루는 리듬에 관한 문장이 있다. 이 관심을 유화의 선과 바탕에 연결해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종이의 흰빛을 칠해진 마른 풀잎색으로 바꾸면 같은 관계가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는다. 비유는 이어지되, 화면은 달라진다.
여기서 새로운 것은 두 재료가 섞여 제3의 물질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한쪽의 질문이 다른 매체에서 다른 답을 얻는다는 뜻이다. 어디에 선을 두어야 빈 곳이 살아나는가. 어디를 더 칠하면 처음의 관계가 사라지는가. 경계의 실험은 이런 작고 구체적인 결정 안에 있다.
익힌 것과 살아낸 것의 만남
변시지는 추사의 글씨를 서첩에서 보았고, 길에서 만난 휘어진 나뭇가지와 조형적인 닮음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동시에 자신의 집과 나무가 〈세한도〉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받아들인 전통과 자기 눈으로 본 풍경을 구별하면서 연결한 것이다. 이 구별은 영향의 깊이를 줄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을 배웠는지 묻게 한다.
문인화의 감각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손에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고, 읽고, 비교하고, 마음에 두는 과정이 있었다. 또한 바깥 풍경을 그림으로 바꾸는 일에는 선택이 필요했다. 풍토를 살아냈다는 말은 훈련을 대신하지 않는다. 훈련이 무슨 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묻는 말이다.
같은 나무를 보고도 다른 그림이 나오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장소는 하나의 양식을 명령하지 않는다. 화가는 이미 익힌 것을 가지고 그 장소에 오며, 그 장소에서 익힌 것을 다시 고친다. 변시지의 그림에서 전통은 뒤에 버려진 과거도, 그대로 지켜야 하는 틀도 아니다. 눈앞의 풍경과 함께 다시 쓰이는 것이다.
유화로 남아 있는 그림
문인화의 정신이라는 말이 유효하려면 물질을 낮추지 않아야 한다. 유화의 물질이라는 말 역시 뜻과 판단을 지우지 않아야 한다. 변시지의 독자성은 두 전통의 부족함을 혼자 완성했다는 데 있지 않다. 익힌 형식이 자신의 생활과 장소를 만나 어떤 다른 관계로 바뀌었는지, 그 화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림을 변시지라는 고유명으로만 부르는 것도 끝은 아니다. 고유명은 다른 이름들과 비교할 길을 열어줄 때 살아 있다. 서예와 회화, 기억과 관찰, 얇은 획과 넓은 바탕을 차례로 보면서 우리는 이 그림이 어떻게 자신의 호흡을 얻는지 묻는다. 어느 하나의 전통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은 비교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집 옆에서 검은 가지가 뻗는다. 가지가 멎은 뒤에도 마른 풀잎색은 조금 더 이어진다. 멀리 배가 있다. 선이 그 배까지 다가가지는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