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비교와 맥락 · 80 / 100
데라우치 만지로와 변시지
닮게 하는 배움과 다르게 보는 배움
Terauchi Manjirō and Byun Shi-Ji
버스에서 시작된 관계
변시지는 데라우치 만지로와 처음 만난 일을 버스 안의 기억으로 전한다. 사진으로 보아온 화가인지 물었고, 찾아가도 되겠느냐고 청했다. 다음 방문에는 작품을 들고 갔다. 사제 관계는 처음부터 완성된 계보가 아니었다. 한 청년이 자기 그림을 보여주려 한 작은 행동에서 시작되었다.
이 장면을 천재가 천재를 알아본 운명의 순간으로 꾸밀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림을 들고 찾아갈 수 있는 문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업을 다른 눈앞에 내놓는 일. 그때 배움은 기술을 받는 것과 함께 자기 판단을 시험받는 일이 된다.
도쿄문화재연구소 자료의 이름은 寺内万治郎이며, 데라우치는 1890년에 태어나 1964년에 세상을 떠났다. 인물과 나부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이자 교육자였다. 이름과 이력을 먼저 바로 적는 것은 거창한 스승의 상징보다 실제 인물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첫 순서다.
한 화실에서 배우기보다 그림을 들고 오가다
구술에서 변시지는 스승의 작업실에 머물며 함께 그린 것과, 자기 그림을 가져가 평을 들은 것을 구별한다. 지적을 받으면 돌아와 고쳤고, 다시 들고 갔다. 배움의 중요한 장소는 스승의 방만이 아니었다. 조언을 들은 뒤 자기 화면 앞에 다시 서는 자리도 그 과정의 일부였다.
그 사이에는 번역이 있다. 다른 사람이 말한 부족함을 자기 눈으로 찾아야 하고, 말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덧칠할 수도 없다. 조언은 붓을 대신 움직이지 않는다. 무엇을 바꿀지 결정하고, 바뀐 화면의 결과를 감당하는 일은 다시 그리는 사람에게 남는다.
그래서 반복된 방문은 스승의 형식을 복제하는 단순한 훈련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림이 다른 눈을 만나고, 다시 자기 손으로 돌아오는 왕복이다. 같은 그림을 여러 번 가져가는 동안 작품뿐 아니라 무엇을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
흰 컵에 비친 노랑
스승에게 들은 말을 묻자 변시지는 빛과 반사를 설명한다. 노란 것이 흰 컵에 영향을 주어 흰 것이 누렇게 보이는 경우다. 이 회고의 핵심은 사물의 색을 그 사물 안에만 가두지 않는 데 있다. 하나의 색이 주변과 관계를 맺으며 보인다는 배움이다.
이것을 모든 색채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 법칙으로 확대하지 않아도, 회화적 질문은 충분히 깊다. 흰 옷을 흰 물감 하나로 끝낼 수 있는가. 얼굴과 배경은 어디에서 서로의 색을 바꾸는가. 밝음은 형태를 설명하는 동시에 형태들 사이의 관계를 만든다.
〈네모의 상〉에서 흰 블라우스와 살빛, 어두운 치마와 나무 의자는 따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 포갠 손이 만드는 작은 기울기와 옷의 밝음이 함께 인물의 자세를 세운다. 이를 스승의 특정 그림과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배운 눈이 이 화면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볼 수 있다.
잘 그린 뒤에 생긴 질문만은 아니다
독창성은 기술을 완전히 배운 뒤에만 찾아오는 마지막 단계라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변시지는 일본 시절부터 동료들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문제를 논했다고 회고한다. 인물을 그리고 싶다면 빈 곳을 채우려고 화분이나 탁자를 더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배움과 선택은 동시에 진행되었다.
상을 받은 일이 그 선택의 가치를 인정받는 계기는 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의 수상이 스승의 예술 전체를 넘어섰다는 증명은 아니다. 수상 기록과 작품의 비교는 다른 질문이다. 둘을 구별하면 젊은 변시지의 성취를 과장하지 않고도, 그가 이미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제자가 자라나는 순간은 스승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때만이 아닐 것이다. 조언을 알아듣되 그대로 적용하지 않을 이유도 설명할 수 있을 때, 배움은 자기 작업이 된다. 독립은 받은 것이 없다는 선언보다 받은 것에 어떤 일을 시킬 것인지 결정하는 힘에 가깝다.
빛을 버리고 바람을 얻은 것이 아니다
제주 회화의 바람을 말하면서 빛과 관찰을 이전 시대에만 남겨둘 수는 없다. 변시지는 폭풍을 현장에서 보고 익힌 뒤 집에서 자기 스타일로 그린다고 설명했다. 눈으로 본 것과 화면에서 바꾼 것이 함께 필요했다. 바람의 그림도 시각적 판단과 제작의 시간을 통과한다.
〈정오〉의 많은 짧은 획 사이로 밝은 바탕이 드러난다. 짙은 나무는 작은 사람과 집 사이에 서 있다. 여기서 빛은 바람의 반대가 아니다. 획과 획 사이의 밝음이 움직임을 느끼게 하고, 어두운 덩어리가 그 밝음을 다시 드러낸다. 색과 형태의 관계는 다른 방식으로 계속된다.
이 차이를 사실주의에서 표현주의로의 일방적인 상승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초기의 그림에도 표현이 있고 후기의 그림에도 관찰이 있다. 변시지가 바꾼 것은 보는 일을 포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본 것과 살며 느낀 것이 화면 안에서 서로 만나는 방식이었다고 읽을 수 있다.
사제 관계도 시대 안에 있다
데라우치의 이름은 도쿄문화재연구소가 공개한 1942년 육군 파견 화가 명단에도 있다. 전쟁 기록화를 제작하도록 선정된 화가들에 관한 기록이다. 한편 변시지는 전후인 1946년 무렵부터 지도를 받았다고 회고한다. 두 시점을 구별하는 일은 사제 관계를 시대 밖의 순수한 미담으로만 만들지 않게 한다.
이 기록을 이유로 제자에게 스승의 과거를 그대로 귀속할 수는 없다. 또한 배움의 실제 내용을 조사하지 않고 모든 조언을 제국의 언어라고 부르는 것도 성급하다. 역사적 조건과 개인의 만남은 함께 읽되, 한 사람의 행위와 다른 사람의 행위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동양에서는 존경하고 서양에서는 배신한다는 사제 관계의 구분도 이 복잡성을 담지 못한다. 존경과 경쟁, 비판과 친밀함은 같은 관계 안에 있을 수 있다. 변시지의 경우에는 실제로 어떤 말을 듣고 어떤 작업을 바꾸었는지부터 읽는 것이 대륙별 성격을 정하는 일보다 정확하다.
닮지 않을 부분을 알아보는 눈
변시지는 제자의 남다른 특기를 발견하고 키워주는 지도를 중요하게 회고한다. 스승을 너무 닮는 것에 대한 거리도 이야기한다. 그 말에 담긴 국가별 일반화는 그대로 따르지 않더라도, 그가 좋은 배움에서 무엇을 중시했는지는 읽을 수 있다. 반복된 형태보다 다른 가능성을 알아보는 눈이다.
그 관점에서 좋은 스승은 제자에게 완성된 답만 주는 사람이 아니다. 제자가 무엇에 마음을 두는지 더 잘 보게 해주는 사람이다. 좋은 제자 역시 스승과 달라 보이는 외형만 서두르지 않는다. 다른 형태가 필요한 이유를 자기 작품 안에서 찾아야 한다.
변시지의 그림을 스승과의 관계에서 읽는 일은 그를 영원한 제자로 묶는 일이 아니다. 어디에서 배웠는지 알면서도 그 이후의 선택을 따로 살피는 일이다. 받은 것을 정확히 인정할수록 바꾼 것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 감사와 독립은 함께 남을 수 있다.
다시 자기 그림 앞에
데라우치와 변시지의 관계를 초월이라는 한마디로 닫으면, 배움을 가능하게 한 왕복의 시간이 사라진다. 그림을 들고 가고, 평을 듣고, 돌아와 고친 시간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조언은 남았고 어떤 판단은 달라졌을 것이다. 전수는 같은 결과를 반복하는 일만이 아니다.
스승의 그림이 이르지 못한 곳을 제자가 완성했다고 미리 선언하는 대신, 각자의 작품을 각자의 자리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배움이 어떻게 다른 삶으로 옮겨갔는지 따라갈 수 있다. 관계를 잊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달라진 길에서도 받은 것을 알아보는 일이다.
그림을 들고 찾아갔던 청년은 다시 그것을 들고 돌아왔다. 평은 끝났지만 그림은 아직 그의 앞에 있었다. 고칠 자리는 자기 눈으로 보아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