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시간과 기억 · 79 / 100
K-모더니즘의 가능성
이름보다 먼저 살펴야 할 형식
The Possibility of K-Modernism
결론이 아니라 작업 가설
이 글에서 K-모더니즘은 이미 합의된 미술사적 분류가 아니라, 변시지의 회화를 읽기 위해 제안하는 작업 가설이다. 한국 작가의 그림이라는 사실만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배운 회화의 언어가 구체적인 생활과 장소를 만나 무엇을 다르게 하게 되는가. 그 변형의 과정을 묻는 이름이다.
이름이 먼저 완성되면 작품은 그 이름을 증명하는 예시가 되기 쉽다. 그러나 작품을 보는 동안 개념도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그림은 가설에 잘 맞고 어떤 그림은 어긋날 것이다. 그 어긋남을 지우지 않을 때 개념은 홍보 문구와 달라진다.
그러므로 변시지가 한국의 근대를 혼자 완성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한 화가의 경로를 정밀하게 읽어 한국 미술을 이야기하는 선택지를 늘리려 한다. 고유함은 유일함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다른 경로들을 없애지 않고도 한 경로의 구체성을 말할 수 있다.
배웠다는 것과 빌려 썼다는 것
〈네모의 상〉에서는 흰 옷과 포갠 손, 의자의 곡선이 인물의 자리를 만든다. 〈가을 애련정〉에서는 건물과 나무, 수면의 반영이 다른 질서를 이룬다. 두 그림을 단순히 서양의 기법에 한국의 소재를 넣은 결과로 설명하면, 작품마다 다른 선택이 보이지 않게 된다.
배운 기법은 내용과 무관한 빈 그릇이 아니다. 크기를 잡고 색을 나누고 시선을 배치하는 방식은 무엇을 중요하게 볼 것인지와 연결된다. 장소가 바뀔 때 이 선택들이 다시 조정된다면, 변형은 소재의 교체를 넘어선다. 보는 방식 자체가 새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학습은 독창성의 반대가 아니다. 남의 그림을 보며 얻은 능력이 자기 그림에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빌린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순수성이 아니라, 무엇을 받았고 무엇을 바꾸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구체성이다.
기법·형식·정신을 세 시기에 가두지 않기
오사카와 도쿄에서는 기법, 서울에서는 형식, 제주에서는 정신을 얻었다는 도식은 간명하다. 그러나 초기 인물화에도 판단과 감정이 있고, 제주 회화에도 기술과 구성이 있다. 한 요소를 한 시기에만 배당하면 변화는 선명해 보이지만 작품의 복잡성은 줄어든다.
변시지는 일본 시절 동료들과 무엇이 아름다운지 이야기하며, 그리고 싶은 인물 곁에 불필요한 사물을 더하지 않는 문제를 고민했다고 회고한다. 덜어냄의 관심은 제주에 도착한 뒤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 관심이 다른 소재와 넓이 속에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필 수 있다.
연속성과 변화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래 품은 질문이 다른 대답을 얻을 수 있고, 익숙한 기법이 새 목적에 쓰일 수도 있다. 풍토적 변화의 논지는 앞선 시간을 무효로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이전의 능력이 새로운 관계 안에서 다시 작동하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
색의 발명보다 색의 관계
마른 풀잎색을 다른 문화에 없던 색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변시지 자신도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 누런 톤이 조금씩 달라진다고 말했다. 고유함을 색 이름 하나에 맡기기보다, 그 색이 검은 선과 작은 몸, 넓은 간격과 함께 하는 일을 보아야 한다.
〈풍랑〉에서 밝은 획은 집 주변을 비껴가고, 아래의 사람과 말은 가깝게 놓인다. 색은 단순히 바다의 표면을 칠하지 않는다.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닿은 것, 넓은 움직임과 작은 접촉이 함께 느껴질 바탕을 만든다. 이 조직이 색 자체의 희귀함보다 중요한 비교의 단위다.
이때 풍토는 외부 환경이 화가에게 찍어낸 무늬가 아니다. 몸의 감각, 살며 익힌 기억, 배운 회화, 화면에서의 선택이 서로 만나는 조건이다. 기후가 자동으로 화풍을 결정한다면 같은 곳의 화가는 모두 같아야 한다. 변시지의 그림은 그 자동성을 설명하기보다 되묻게 한다.
전시는 증거이되 판결은 아니다
스미소니언의 공식 기록에서 한국관은 국립자연사박물관의 전시로,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운영되었다. 변시지의 국제 전시 이력을 논할 때에도 이러한 기관과 전시 맥락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큰 이름 하나로 서로 다른 전시와 소장, 대여의 구분을 덮어서는 안 된다.
어느 기관에서 소개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수용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이론의 옳음이나 모든 관객의 감동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전시된 경로, 붙은 해설, 함께 놓인 자료를 살피면, 무엇이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질문할 수 있다.
세계성을 외부의 승인으로만 정의하면 지역은 끝없이 인증을 기다리는 자리가 된다. 반대로 밖의 반응을 모두 무시하면 실제 교류의 역사를 잃는다. 필요한 것은 승인과 자부심의 이분법이 아니라, 작품이 다른 독자에게 도달한 과정을 읽는 비평이다.
서로 다른 세 이웃
키퍼의 〈마르가레테〉(1981)에는 실제 짚이 재료로 쓰였다. 마른 풀잎색을 말하는 변시지와 나란히 놓을 수 있지만, 식물이 화면에 들어간 사실과 식물을 연상시키는 색은 다르다. 비교의 힘은 둘을 같은 대지의 화가라고 부르는 데보다, 물질과 기억이 만나는 방식의 차이에 있다.
골즈워디의 〈스톰 킹 월〉은 기존 돌담의 흔적과 나무, 연못을 지나며 실제 장소 안에서 이어진다. 변시지의 돌담은 화면 안에서 몸과 집의 거리를 조직한다. 하나는 관객이 걸어 다닐 땅을, 다른 하나는 눈이 건너갈 공간을 바꾼다. 장소를 다룬다는 공통점 안에 매체의 차이가 남는다.
카푸어는 〈림보로의 하강〉에서 어둠으로 가득한 구멍이 평평한 표면처럼 읽히는 경험을 설명한다. 색과 깊이의 관계를 묻는 비교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을 인도의 정신과 제주의 정신으로 간단히 묶을 수는 없다. 관객의 몸과 작품이 어떤 관계를 만드는지에서 비교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가설을 시험하는 방법
K-모더니즘이라는 말을 쓰려면 어느 작품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색을 줄였다는 설명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윤곽과 바탕, 몸의 크기와 시선의 이동을 비교해야 한다. 비슷한 시기에도 다른 구성이 있다면, 그것을 예외로 버리지 않고 가설을 조정해야 한다.
또한 변화의 설명을 출생지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이동과 교육, 다른 그림을 본 경험, 전시와 독서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야 한다. 무엇이 한국적인가라는 물음은 고정된 혈통의 성질보다,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바꾸었는가라는 물음에 가까워진다.
마지막으로 이 개념은 다른 작가에게도 질문을 열어야 한다. 변시지에게만 유리하도록 기준을 만들면 비교는 순환한다. 서로 다른 작품을 같은 질문 앞에 놓되 다른 대답을 허락할 때, 한 화가를 설명하는 말은 더 넓은 비평의 언어로 발전할 수 있다.
이름을 내려놓고 다시 그림으로
가능성이라는 제목을 남기는 이유는 결론이 약해서가 아니다. 개념보다 작품이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K-모더니즘이나 풍토적 모더니즘은 작품을 향해 가는 길일 수 있지만, 작품이 그 말의 범위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변시지를 국제적으로 읽는 언어는 찬사의 크기보다 구별의 정확성에서 힘을 얻는다. 수용과 모방, 장소와 지역색, 재료와 감각, 전시 이력과 미학적 판단을 구별하는 일이다. 그렇게 남긴 차이 속에서 그의 그림은 다른 작품과 대화하면서도 자기 모습을 잃지 않는다.
〈풍랑〉으로 돌아온다. 사람과 말은 가까이 있다. 집은 조금 떨어져 있다. 이름을 다 읽고 난 눈이 두 몸 사이에서 잠시 멈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