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시간과 기억 · 78 / 100
세한도와 절도
고립된 풍경에서 관계를 읽다
Sehando and Jeoldo
두 작품을 부르는 이름
〈세한도〉의 제작연도는 1844년이다. 변시지의 〈절도〉는 1981년 작품으로 소개된다. 두 연도 사이에는 137년이 있다. 그러나 간격을 계산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두 이름을 각각의 작품과 정확히 연결하는 일이다. 닮은 그림을 같은 제목 아래 모으면 비교는 시작부터 다른 대상을 보게 된다.
세한은 추운 때를, 절도는 떨어져 있는 섬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시간을, 다른 하나는 공간을 먼저 부르는 듯하다. 그러나 추운 때에도 사람이 살아갈 자리가 필요하고, 떨어진 섬에서도 기다리는 시간이 흐른다. 두 제목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의 조건이 되는 곳에서 만난다.
여기서 비교하려는 것은 어느 그림의 고독이 더 깊은가가 아니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상황 안에서 무엇이 관계를 남기는가이다. 그림 속 가까움과 멂뿐 아니라, 그림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건네고 다시 보는 일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고립의 그림이 반드시 고립된 그림은 아니다.
세한도 밖에서 도착한 책
국립중앙박물관의 해설은 이상적이 유배 중인 김정희에게 책을 보내준 일을 〈세한도〉의 배경으로 설명한다. 이 그림은 아무도 남지 않은 세계의 증명서가 아니다. 어려운 처지에도 이어진 관계에 대한 응답이다. 화면에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화가에게 벗이 없었다는 것은 다르다.
박물관은 둥근 문이 있는 집의 좌우에 소나무 두 그루와 측백나무 두 그루가 놓였다고 설명한다. 나무를 한 그루의 상징으로 압축하기 전에, 서로 다른 나무들이 집 주변을 어떻게 이루는지 볼 필요가 있다. 집과 나무, 비워진 간격이 함께 한 자리를 만든다.
그림은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응답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백을 고독으로 읽으면서도 그 여백을 건너는 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비어 있다는 것은 관계가 없다는 뜻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향한 거리가 거기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절도는 무인도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절도〉에 관한 2018년 보도는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사진과 함께, 나무 아래 웅크린 사람과 조랑말을 설명한다. 따라서 사람을 직접 그리지 않은 빈 섬이라는 원고의 전제로 논의를 계속할 수 없다. 이 대목은 보도의 서술에 근거하며, 원화의 등록번호와 고해상도 도판 대조는 남아 있다.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고독의 뜻을 하나로 정하지는 않는다. 말이 곁에 있어도 위태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생명이 함께 있다면 고립은 완전한 무관계와 달라진다. 섬을 둘러싼 거리와 몸들 사이의 가까움이 서로 다른 크기로 작용할 수 있다.
제목의 절을 모든 관계의 단절로 풀면 이런 차이가 사라진다. 오갈 길이 제한된 상태와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자족은 같은 것이 아니다. 떨어진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닿을 수 있는지를 더 절실하게 묻게 되는 상황일 수 있다.
나무의 자세를 인격의 서열로 만들지 않기
추사는 곧고 변시지는 기울었다는 대비는 기억하기 쉽다. 그러나 기억하기 쉬운 문장이 항상 그림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줄기와 가지를 하나의 수직선으로 만들거나, 기울어진 모든 나무를 같은 생존의 교훈으로 읽으면 각 작품의 형태가 지워진다.
변시지는 자신의 나무와 집이 〈세한도〉의 형상과 다르다고 강조하면서도, 사람들이 비슷한 느낌을 받는 까닭을 생각했다. 그에게 공명은 같은 형상을 베꼈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서로 다른 형식이 어떤 감각에서 만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개인적 해석이었다.
그 구별을 따르면 나무의 자세는 도덕의 점수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로 돌아온다. 가지가 어느 빈 곳을 향하는가. 집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그늘이나 검은 덩어리가 무엇을 가까워 보이게 하는가. 비교는 정답을 붙이는 대신 이런 구체적인 질문을 늘려야 한다.
비워진 자리와 칠해진 자리
수묵의 여백과 유화의 색면을 비교할 때, 비어 있음과 채워짐을 곧바로 맞세울 필요는 없다. 인물이 없거나 사물이 적은 곳에도 종이와 물감의 표면은 있다. 형상이 놓이지 않은 자리와 재료가 없는 자리는 다르다. 무엇이 덜 그려졌는지가 무엇을 더 보이게 하는지 물어야 한다.
보조 비교작 〈빈 집〉에는 왼쪽 집과 기운 나무, 오른쪽 먼 배 사이에 넓은 빛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을 〈절도〉로 바꿔 부르지는 않는다. 다만 집 주변의 가까운 형상과 먼 수면이 어떻게 다른 거리를 만드는지, 확보된 이 도판에서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그 밝은 자리를 따뜻하다는 말 하나로 끝내면 거리가 주는 긴장은 줄어든다. 색은 가까움을 부르면서도 멀리 떨어진 것을 더 멀어 보이게 할 수 있다. 여백의 의미도 하나가 아니다. 쉼이 되기도 하고, 아직 건너지 못한 간격으로 남기도 한다.
섬 밖으로 나가는 그림
〈세한도〉는 이상적의 중국 방문에 동행했고, 청나라 문인들의 감상 글이 두루마리에 이어졌다. 외딴곳의 겨울을 그린 그림이 사람들 사이를 이동한 것이다. 작품의 고독과 작품이 만들어낸 교류는 반대가 아니다. 고독을 표현한 일이 다른 만남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변시지의 그림을 다른 장소에서 읽는 일도 출생지나 제작지의 감각을 지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제주에 있어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문을 닫아서도 안 된다. 장소를 모르는 독자에게 필요한 맥락을 건네고, 그 독자가 자신의 질문을 보탤 여지를 남길 수 있다.
이때 번역과 도판은 작품을 대신하는 축소판만이 아니다. 다음 만남으로 이어지는 매개다. 다만 매개임을 밝혀야 한다. 어느 부분이 원작이고 어느 부분이 해설인지 알 수 있을 때, 먼 곳에서 보는 사람도 이미 정해진 감동을 받는 대신 스스로 비교할 수 있다.
137년 동안 달라진 것
같은 제주라는 이름이 두 시대를 같은 세계로 만들지는 않는다. 유배라는 처벌과 근대의 이주·귀향은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이다. 바람이 분다는 공통점만으로 그 차이를 지우면, 풍토는 역사를 담는 장소가 아니라 역사가 없는 자연으로 바뀐다.
먹과 종이, 유채와 캔버스 역시 순서대로 발전한 두 단계가 아니다. 서로 다른 표면과 도구가 서로 다른 가능성을 연다. 두 작품이 같은 섬과 연결된다고 해서 하나를 다른 하나의 완성이나 현대판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번역처럼 읽더라도 남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137년의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 까닭은 시간이 지워져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시간이 오늘의 독자 앞에 함께 놓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작품을 같은 곳으로 환원하지 않고도, 집을 두고 살아가는 일과 멀리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일을 다시 물을 수 있다.
추위가 아니라 추위 속의 관계
고난이 닥치면 관계의 성격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고난 자체를 좋은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어려움 속에 예술이 남았다는 사실과 예술을 위해 어려움이 필요했다는 주장은 다르다. 그림에 대한 경의가 그 사람에게 가해진 상처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세한도〉와 〈절도〉를 함께 읽으며 얻을 수 있는 것은 고독을 견디는 사람의 서열이 아니다. 끊어질 듯한 자리에서도 무엇이 서로를 잇는지 보는 눈이다. 책이 도착하고, 그림이 건네지고, 다른 생명의 존재가 헤아려진다. 관계는 커다란 선언보다 작은 구체성 속에 남는다.
두 작품의 기록을 읽은 뒤 보조 도판으로 돌아온다. 집은 왼쪽에 있다. 배는 멀리 있다. 그 사이의 밝은 자리를 눈이 천천히 건너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