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비교와 맥락 · 88 / 100
동양화론의 현대적 변용
오래된 말 곁에 놓은 그림
Reworking East Asian Painting Theory
여섯 가지 물음
사혁은 그림을 보는 여섯 법을 적었다.
기운생동, 골법용필, 응물상형, 수류부채, 경영위치, 전이모사.
오늘의 유화를 위해 쓰인 말들은 아니다.
그 말에 변시지의 그림을 맞춰 넣지 않으려 한다.
말 하나를 읽고 그림을 다시 본다.
전에는 보지 못한 곳이 보이는지 살핀다.
전통은 태어날 때 손에 쥐여 있지 않다.
다른 그림을 보고, 글을 읽고, 자기 손으로 옮긴다.
변시지의 노트에도 마티스를 읽은 시간이 남아 있다.
기운생동 — 가만한 몸
〈네모의 상〉의 여인은 앉아 있다.
손은 포개져 있고 시선은 한쪽으로 향한다.
움직이지 않는데도 그 자리에 몸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난무〉에서는 새가 날고, 다른 새는 돌담에 머문다.
눈이 둘 사이를 오간다.
살아 있는 느낌은 빠르게 나는 쪽에만 있지 않다.
후대의 곽약허는 기운과 배울 수 있는 법들을 달리 논했다.
사혁의 말과 한데 섞지는 않는다.
그 오래된 논의로 오늘의 사람을 재능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나누지도 않는다.
골법용필 — 몸을 받치는 선
선이 굵다고 몸을 잘 세우는 것은 아니다.
가는 선도 방향을 바꾸면 무게가 달라진다.
다른 선과 만나는 자리를 함께 본다.
〈네모의 상〉에서 의자의 굽은 테두리가 몸 뒤를 지난다.
팔은 내려오고 손은 겹친다.
곡선들이 서로 다른 자리에서 한 몸을 받친다.
제주의 검은 획은 먹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먹처럼 보이는 것과 먹으로 그린 것은 다르다.
유화가 마르기를 기다렸다는 화가의 말도 그 획 곁에 둔다.
응물상형 — 말과 새
덜 그리려면 먼저 보아야 한다.
어디를 남겨야 그 몸인지 알아볼 수 있는가.
생략은 눈을 감고 하는 일이 아니다.
〈난무〉의 말과 새는 모두 간략하다.
그러나 서로 바꿔놓을 수는 없다.
목과 다리, 열린 날개가 저마다의 몸을 남긴다.
변시지는 현장에서 익힌 것을 집에서 자기 양식으로 옮겼다고 했다.
모든 세부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보고 온 것을 버린 것도 아니었다.
수류부채 — 같은 색 안에서
사물의 종류에 따라 색을 준다는 옛말이 있다.
그런데 변시지는 서로 다른 것들을 비슷한 색 안에 놓는다.
여기서는 옛말과 그림이 꼭 맞지 않는다.
같은 마른 풀잎색 안에서도 짙고 옅음은 남는다.
선이 모인 곳과 벌어진 곳도 다르다.
같은 날씨 아래 있다고 몸들이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화가는 그리는 것에 따라 누런 톤도 달라진다고 했다.
한 번 찾은 색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은 아니다.
그림 한 점 앞에서 다시 색을 골랐다.
경영위치 — 사이를 놓다
집을 어디에 둘 것인가.
사람을 얼마나 가까이 두고 배를 얼마나 멀리 둘 것인가.
사물을 그리면서 그 사이도 함께 만든다.
〈난무〉의 새를 모두 하늘로 올려보내지 않는다.
돌담 위에 머문 새를 그대로 본다.
그 작은 몸 때문에 눈은 아래로도 내려온다.
〈네모의 상〉의 의자 곁에도 빈 곳이 있다.
바다처럼 넓지는 않다.
그러나 그 좁은 곳이 앉은 몸의 자리를 정한다.
전이모사 — 배운 뒤에
풍경 앞에서 그리는 일과 남의 그림을 옮기는 일은 다르다.
평을 듣고 자기 그림을 고치는 일도 있다.
배움은 한 길로만 오지 않는다.
노트에 다른 화가의 문장이 있다.
읽고 옮겨 적은 손이 다시 붓을 든다.
그 문장과 꼭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배운 흔적을 지울 필요는 없다.
배운 자리에 그대로 머물 필요도 없다.
무엇을 이어받았는지는 다음 그림 앞에서 더 잘 보일 수 있다.
옛말을 덮고
앉은 여인과 날아가는 새를 나란히 본다.
젊은 그림이 늙은 그림의 연습장만은 아니다.
그때 그린 몸은 그때의 화면에서 이미 살아 있다.
오래된 말을 읽고 나서 눈이 달라질 수 있다.
그림을 보고 나서 그 말의 뜻도 달라질 수 있다.
책을 잠시 덮는다.
새 몇 마리는 날고 있다.
몇 마리는 돌담에 머문다.
눈이 낮은 돌 위로 내려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