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비교와 맥락 · 89 / 100
미술과 예술, 시각과 정신
눈앞에 있는 것에서
Visual Art and Art: Seeing and the Life of the Mind
두 손을 보다
〈네모의 상〉의 두 손을 본다.
손가락을 따라가면 짙은 치마가 보인다.
그 몸 뒤로 의자가 이어진다.
모양을 보는 동안 자세도 느껴진다.
잘 그렸다는 생각과 사람이 거기 있다는 느낌이 겹친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 꼭 가릴 수는 없다.
눈으로 본 것과 마음에 남은 것을 나누어 묻는다.
그러나 둘 사이에 벽부터 세우지는 않는다.
손은 아직 같은 무릎 위에 있다.
말을 옮길 때
‘미술’을 painting으로 옮기면 조각은 밖에 남는다.
이 글에서는 visual art라고 쓴다.
조금 더 넓은 ‘예술’의 자리는 art로 남겨둔다.
‘정신’도 몸 밖의 무엇으로만 옮기지 않는다.
기억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삶을 생각한다.
그 삶에는 보고 만지는 몸도 있다.
말을 옮기며 확신을 더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인다는 말은 그랬다는 말과 다르다.
다른 언어에서도 그 작은 거리를 남긴다.
손의 능력
「기술과 예술」이라는 발췌문 앞에 선다.
지금 확인한 것은 책 실물이 아니라 후대의 편집 자료다.
그 범위 안에서 만드는 일과 예술의 관계를 다시 묻는다.
손을 자세히 그려서 머뭇거림을 남길 수 있다.
몇 획만으로 멀리 있는 사람을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기술은 버리고 올라갈 계단만이 아니다.
초기의 그림에도 선택이 있었다.
제주에서 그 선택의 방식이 달라졌다.
그전의 그림을 지워야 나중 그림이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감 곁의 마음
「예술미와 자연미」를 다룬 노트에는 정신과 물질이 얽힌다는 논의가 있다.
생각은 재료를 떠나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붓이 닿을 곳에는 이미 칠해진 색이 있다.
〈정오〉의 나무는 짙다.
그 곁으로 짧은 획들이 지나고 작은 몸이 굽어 있다.
눈이 오가는 동안 바람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획 하나에 어느 날의 기억이 들어 있는지 알 수는 없다.
보이는 데까지 본다.
그다음의 말은 내가 붙인 것임을 잊지 않는다.
고운 그림에도
거친 그림이 늘 더 진실한 것은 아니다.
고운 그림에도 오래 남는 것이 있다.
손의 밝음 앞에서 눈이 늦어질 수 있다.
흰 옷 아래 짙은 치마가 있다.
그 사이에 두 손이 놓였다.
얼굴을 보던 눈이 거기로 내려온다.
삶을 느끼려면 그림 뒤의 불행을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손이 어디에 놓였는지 볼 수 있다.
알고 있는 일이 그 손을 가리지 않게 한다.
다시 보는 사람
비평 노트에는 고치고 가늠하는 일도 창작 안에 있다고 적혀 있다.
그린 사람이 자기 그림을 다시 본다.
손이 한 일을 눈이 되묻는다.
보는 사람도 돌아올 수 있다.
처음에는 외로워 보이던 몸에서 기다림을 느낄 수도 있다.
무엇 때문에 달리 보였는지 그림에서 다시 찾는다.
그림의 바깥을 알아도 화면을 다 본 것은 아니다.
화면을 오래 보아도 바깥의 삶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둘을 오가며 눈은 조금씩 배운다.
보고 돌아온 바다
변시지는 폭풍을 보고 돌아와 집에서 그렸다고 했다.
바다에서 본 것을 기억했다.
기억한 것을 자기 그림으로 옮겼다.
그 사이에 몸이 있고 시간이 있다.
같은 바람을 겪어도 남기는 것은 다르다.
풍토는 하나의 그림을 명령하지 않는다.
마음을 찾으려고 색과 선을 지나칠 필요는 없다.
사람 곁을 보고, 나무 곁을 본다.
앞서 하지 못한 물음이 눈앞에서 생긴다.
처음의 손으로
어디까지가 기술이고 어디서부터 예술인지 선 하나로 나누지 않는다.
보는 일과 만드는 일이 이미 얽혀 있다.
작은 손에도 그 시간이 있다.
말은 그림에 가까이 가게 한다.
그림은 그 말을 고치게도 한다.
어느 쪽이 먼저 끝났다고 할 수 없다.
한 손이 다른 손 위에 놓여 있다.
몸 뒤로 의자의 둥근 테두리가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