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Ⅵ 시간과 기억

Ⅵ 시간과 기억 · 70 / 100

이대로 가는 길

체념인가 수용인가

Going This Way

이대로 가는 길 / Going This Way · 2006. 화면 오른쪽 아래 사람, 왼쪽 아래 말, 나무가 늘어선 능선과 작은 집, 위쪽 수평선 아래 먼 배. / A figure at lower right, a pony at lower left, a tree-lined ridge and a small house, with a distant boat below the upper horizon.
〈이대로 가는 길〉 · 2006FŪDO 054
정오 / Noon · 2007. 촘촘한 짧은 획, 작은 집과 굽은 사람 사이의 짙은 나무. / Dense short marks surround a dark tree between a small house and a bent figure.
〈정오〉 · 2007FŪDO 012

이대로라는 말 앞에서

이대로 가는 길. 이 제목은 현재의 상태를 이어간다는 뜻과 지금의 방향을 따른다는 뜻을 함께 열어놓는다. 그러나 이대로라는 말만으로 어쩔 수 없다는 감정을 확정할 수는 없다. 같은 말이 체념으로 들릴 때도 있고, 더 바꾸지 않겠다는 판단으로 들릴 때도 있다.

그래서 제목을 읽은 뒤에는 화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누가 어디에 놓였는지, 어떤 것이 멀고 어떤 것이 가까운지 본다. 철학의 말이 먼저 인물의 마음을 대신하면 작은 몸은 그 주장을 증명하는 도구가 된다. 이 그림에서는 제목이 여는 질문을 형상들이 어떻게 더 복잡하게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영어 제목 Going This Way는 방향을 담담하게 남긴다. 원문의 모든 뉘앙스를 한 제목에 밀어 넣기보다, 이어지는 해설에서 지속과 선택의 차이를 살핀다. 번역은 질문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다른 독자도 그 질문 앞에 멈출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사람은 오른쪽 아래에 있다

도판을 보면 사람은 화면 오른쪽 아래에 있다. 왼쪽 아래에는 말이 있고, 그 위의 낮은 능선을 따라 나무들이 이어진다. 작은 집은 능선 오른쪽에 있다. 더 위에는 넓게 열린 바다와 작은 배, 희미한 수평선이 놓인다. 사람만 남은 무대가 아니다.

사람과 말은 가까이 붙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은 아니다. 두 형상 사이의 넓은 바탕을 눈이 건너갈 때 능선의 곡선도 다시 보인다. 화면의 길은 인물이 밟는 선 하나만이 아니다. 떨어진 것들을 차례로 보게 하는 시선의 길도 있다.

도착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착지가 없다는 말로 바꾸지 않는다. 집이 인물의 목적지인지도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그림은 그 이후를 남겨둔다. 제목은 가는 길이라 말하고, 화면은 그 길이 놓인 세계를 보여준다. 목적을 다 말하지 않아도 움직임의 질문은 남는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말의 한계

니체의 『즐거운 학문』 276절에서 아모르 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아가려는 긍정의 과제로 나타난다. 이 생각은 이미 주어진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묻게 한다. 다만 그 질문을 그림 속 인물의 확정된 심리로 옮길 수는 없다.

지팡이를 짚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원망이 없다거나 운명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굽은 자세는 감정의 고백문이 아니다. 우리는 그 몸에서 지속을 읽을 수 있지만, 그 지속에 어떤 마음이 담겼는지까지 모두 대신 말할 권리는 없다.

또한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잘못된 조건까지 바꿀 수 없다고 선언하는 일과 다르다. 도움을 요청하거나 방향을 바꾸는 일도 자기 삶을 돌보는 방식이다. 이 그림의 이대로를 읽을 때 남겨둘 여지는 바로 그것이다. 계속 간다는 말이 모든 것을 그대로 두겠다는 말은 아니다.

억지를 덜어내는 것과 판단을 버리는 것

노자의 무위를 떠올릴 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손이 움직였다는 제작 이야기와 구별해야 한다. 『도덕경』 48절의 덜어냄을 회화와 비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학습이나 판단이 필요 없다는 증거는 아니다. 철학의 비유와 화가의 작업 기록은 다른 층위에 있다.

변시지의 구술에는 관찰한 빛에서 색의 생각을 얻고 실제 그림으로 시험했다는 과정이 있다. 마르기를 기다려 다시 손대고, 더 그리려다 좋은 효과를 잃을 수 있다는 경험도 있다. 덜어냄은 판단의 부재보다 무엇을 건드리지 않을지 고르는 판단과 가깝다.

이 관점에서 이대로는 무조건의 방치와 다르다. 이미 생긴 관계를 더 설명하려고 덮어버리지 않는 선택일 수 있다. 집과 나무와 두 몸 사이에 남은 넓이를 보면, 더 그리는 일만이 적극적인 행위는 아님을 생각하게 된다. 멈추는 일도 그림을 돌보는 일이 될 수 있다.

쉬는 몸에게 체념을 묻지 않기

체념한 사람은 주저앉고 수용한 사람은 걷는다는 구별은 지나치게 쉽다. 쉬는 몸의 마음을 모르면서 실패를 붙이고, 걷는 몸에는 긍정을 붙이기 때문이다. 몸의 움직임은 마음의 상태를 일대일로 번역하는 표가 아니다. 그림의 자세를 읽을 때에도 이 거리를 지켜야 한다.

〈이대로 가는 길〉의 사람은 작게 놓여 있다. 그 작음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넓은 바탕과 함께 있을 때, 몸 하나가 차지하는 자리가 더 또렷해질 수 있다. 계속 걷는 영웅으로 키우지 않아도 그 형상은 화면 안에 충분한 무게를 가진다.

체념과 수용을 묻는다면, 걸음의 유무보다 관계가 닫혔는지 열려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마저도 관객의 독해이지 인물을 진단한 결과는 아니다. 그림이 알려주지 않은 마음을 남겨두면, 작은 자세는 하나의 교훈보다 오래 우리 앞에 머문다.

멀리 건너가도 남겨야 할 이름

이 제목은 스미소니언 전시 이력과 함께 소개되어 왔다. 그러나 전시되었다는 기록, 대여된 원화의 식별, 지금 읽는 복제 도판은 구별해야 한다. 같은 제목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물건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국제적 소개일수록 작은 식별 정보를 정확히 남기는 일이 중요하다.

다른 나라의 관객도 작은 몸과 먼 배 사이에서 자기 삶을 떠올릴 수 있다. 다만 누구나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대신 말할 필요는 없다. 공명은 가능성이지 관람객 기록 없이 확인되는 사실이 아니다. 작품은 낯선 경험과 만나면서도 낯선 채 남을 수 있다.

제주라는 이름도 그 만남을 방해하는 짐이 아니다. 집과 말과 바다의 생활 맥락을 알면 이미 느꼈던 간격을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보편성을 위해 장소를 지우는 대신, 장소를 통해 새로운 독해가 생기게 한다. 번역과 아카이브가 맡아야 할 일도 여기에 있다.

늦은 그림은 한 가지 표정이 아니다

2006년의 이 그림을 말년의 작품이라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말년이라는 분류가 곧 평온이나 달관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넓은 간격이 있고 작은 형상들이 있다. 그 넓이가 안도를 주는지 막막함을 주는지는 각각의 관객에게 다시 열린다.

그다음 해의 〈정오〉를 함께 보면 이 구별은 더 분명해진다. 많은 획이 화면을 채우면서도 작은 사람과 집이 남아 있다. 같은 화가의 늦은 시간 안에 성긴 배치와 촘촘한 배치가 공존한다. 만년은 한 표정으로 모든 것을 정리한 시기일 필요가 없다.

이대로라는 말도 그런 다양성 안에서 읽는다. 이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종결보다, 이 그림이 택한 하나의 호흡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다음 그림에서는 다른 간격이 생길 수 있다. 한 작품의 고요가 이후의 모든 바람을 미리 끝내지 않는다.

길을 다 말하지 않는 그림

처음의 질문은 체념인가 수용인가였다. 이제 그 둘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대신 그림이 보여준 것을 다시 놓아본다. 작은 사람, 떨어진 말, 나무들이 이어진 능선, 먼 배. 그 관계는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되기보다 서로 다른 삶의 순간을 받아들일 여지를 남긴다.

이 그림은 앞으로 가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는다. 어디로 가는 것이 옳은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한 몸이 놓인 세계를 충분히 넓게 남겨둔다. 그 안에서 관객은 자신의 속도를 떠올릴 수 있다. 해답을 얻는 것보다 잠시 자기 자리를 다시 보는 일이 먼저일 수 있다.

사람은 오른쪽 아래에 있다. 말은 왼쪽에 있다. 그 위의 넓은 바다에 배 한 척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