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Ⅴ 생애와 장소

Ⅴ 생애와 장소 · 69 / 100

하산(下山)

내려옴의 지혜

Descent

하산 / Descent · 1986
〈하산〉 · 1986 · 작은 복제 · 200 × 171px
이대로 가는 길 / Going This Way · 2006. 화면 오른쪽 아래 사람, 왼쪽 아래 말, 나무가 늘어선 능선과 작은 집, 위쪽 수평선 아래 먼 배. / A figure at lower right, a pony at lower left, a tree-lined ridge and a small house, with a distant boat below the upper horizon.
〈이대로 가는 길〉 · 2006FŪDO 054

봉우리보다 먼저 보이는 낮은 자리

제공 도판의 〈하산〉에는 가운데 먼 산과 오른쪽의 능선, 아래쪽의 나무들, 말과 작은 인물, 낮은 집이 있다. 태양과 먼 배도 보인다. 제목은 내려옴을 말하지만 화면은 인물의 이동 경로를 지도처럼 설명하지 않는다. 산보다 가까이 놓인 생활의 형상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편집본에 적힌 연도는 1986년이다. 따라서 이 그림을 곧바로 2000년대 말년의 연작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하산은 생애의 마지막 장면이라는 전제를 떠나 읽을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일뿐 아니라, 높은 곳을 바라보던 눈이 발밑으로 돌아오는 일이 된다.

도판이 작을수록 제목으로 세부를 메우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노인이 어느 발을 먼저 내딛는지, 정상에 올랐다 돌아오는지까지 알 수는 없다. 대신 볼 수 있는 관계를 붙든다. 산은 멀고, 나무는 가까우며, 작은 몸들은 나무와 집이 있는 낮은 쪽에 있다.

내려옴은 또 다른 승리가 아니다

내려오는 것이 오르는 것보다 더 높다는 말은 익숙한 서열을 뒤집을 뿐일 수 있다. 올라간 사람보다 내려온 사람이 더 지혜롭다는 새로운 경쟁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필요한 것은 높이의 순서를 바꾸는 일보다, 높이로 삶을 재던 눈을 잠시 거두는 일이다.

정상에 다녀온 사람만 내려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길을 바꾼 사람도, 쉬러 돌아오는 사람도, 더 오르지 않기로 한 사람도 내려올 수 있다. 그 선택의 값어치를 승리의 이력으로 증명할 필요는 없다. 하산을 정복 뒤에만 허락되는 귀환으로 만들면 그림 속 작은 몸의 자리가 다시 좁아진다.

낮은 곳은 높은 곳에 실패한 사람들이 모이는 나머지 공간이 아니다. 먹고 쉬고 누군가와 마주치는 장소다. 산이 화면의 먼 쪽에 남아 있는 동안, 집과 나무와 몸들은 다른 크기의 하루를 만든다. 하산의 의미는 그 하루로 돌아오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간결함을 노쇠로만 읽지 않기

작은 인물이 적은 획으로 보인다고 해서 단순히 솜씨가 줄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반대로 거칠거나 간략하면 모두 기교를 초월한 경지라고 높일 수도 없다. 판단은 그 획들이 무엇과 만나 어떤 공간을 만드는지를 본 뒤에 와야 한다.

〈하산〉의 작은 사람과 말은 나무들에 비해 크지 않다. 그래서 화면 전체를 지배하기보다 나무와 집 사이를 다시 보게 한다. 인물을 크게 확대해 표정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주변의 관계로 몸의 자리가 생긴다. 이 간결함은 세부를 줄이는 일과 공간을 여는 일을 함께 한다.

원숙함이라는 말도 그 관계를 대신할 수는 없다. 작품 하나가 만든 간격을 먼저 보고, 그다음에 다른 시기의 그림과 비교해야 한다. 한 화가의 생애를 오름과 내림으로 정리하는 것은 편리하지만, 각 그림의 시간을 하나의 곡선에 가둘 위험도 있다.

몸이 무게를 놓는 방식

내려오는 몸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몸이 아니다. 발을 놓을 곳이 필요하고, 때로는 지팡이와 잠시 쉴 자리가 필요하다. 낮아짐을 생각할 때에는 이 구체적인 필요를 남겨두어야 한다. 욕망을 버렸다는 큰 설명이 몸의 작은 요청을 덮어서는 안 된다.

비교 도판인 〈이대로 가는 길〉의 사람은 지팡이와 함께 화면 아래쪽에 있다. 그 몸을 통해 지탱한다는 행위를 생각할 수 있다. 도움을 받는 것이 자립의 반대인 것은 아니다. 몸은 자신만으로 완결된 덩어리라기보다 땅과 도구와 간격을 통해 자리를 갖는다.

내려옴의 지혜를 말한다면 무게를 혼자 감당하는 능력보다 어디에 나눠 놓을지 아는 감각에 가까울 수 있다. 잠시 멈추거나 기대는 일까지 포함하는 지혜다. 그림 속 사람이 승리의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그 자리가 작아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주를 아래라고 부르는 시선

서울에서 제주로 내려왔다는 일상적인 말을 곧바로 지위의 하강으로 바꿀 수는 없다. 지도상의 방향과 문화적 서열은 다르다. 오사카와 도쿄를 정상, 서울을 중턱, 제주를 낮은 기슭으로 놓으면, 그 서열을 비판하려던 글이 오히려 그대로 되풀이하게 된다.

변시지는 제주에서 이전의 비원 스타일로도 그려보았지만, 소재만 바뀌어서는 그곳의 생활을 담기 어렵다고 느꼈다고 회고한다. 이 말에서 중요한 것은 승진과 퇴보가 아니다. 달라진 곳에서 어떤 그림이 필요한지 다시 묻는 과정이다.

하산을 그 과정의 비유로 쓸 수는 있다. 다만 그 비유는 이미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칭찬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전의 기준에서 벗어나 다른 관계를 시작하는 뜻으로 열어두는 편이 낫다. 내려와서야 보이는 것이 있는 것처럼, 머물렀기 때문에 보이는 것도 있다.

멀리 있는 산과 가까운 집

〈하산〉의 산을 특정한 봉우리로 확정할 자료는 이번에 확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름을 모른다고 산이 하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먼 봉우리와 가까운 나무들이 겹쳐지며 화면의 여러 거리를 만든다. 집은 그 거리들 가운데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작은 크기로 놓여 있다.

산을 바라본다는 것은 반드시 올라가겠다는 뜻이 아니다. 먼 것을 먼 채로 두고 가까운 자리를 돌볼 수도 있다. 이 그림에서 산의 크기와 집의 크기는 누가 더 중요한지 다투지 않는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먼 풍경과 생활의 가까움이 함께 생긴다.

노자의 물에 관한 비유는 낮은 곳과 이로움을 함께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을 그림의 정답으로 붙이지는 않는다. 여기서 빌릴 수 있는 것은 낮음을 곧바로 열등함으로 읽지 않는 질문이다. 물의 비유에서 돌아와 다시 보면 작은 집은 여전히 산 아래 자기 크기로 있다.

곁에 있다고 같은 길은 아니다

〈하산〉의 말과 사람을 동행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두 몸이 함께 보인다는 사실과 같은 목적지를 향한다는 이야기는 다르다. 작은 도판에서 그 이후의 걸음을 알 수는 없다. 이 그림이 보여주는 함께 있음은 우선 같은 나무들 가까이에 놓였다는 데 있다.

〈이대로 가는 길〉에서는 그 간격이 더 분명하다. 말은 왼쪽 아래, 사람은 오른쪽 아래에 놓인다. 두 몸 사이의 넓이는 만남의 가능성이면서 서로 다른 자리를 보존하는 거리다. 동행을 꼭 바싹 붙어 같은 속도로 걷는 모습으로만 그릴 필요는 없다.

곁을 지킨다는 말은 상대의 방향을 대신 정해준다는 뜻이 아니다. 함께 있는 것과 같아지는 것은 다르다. 낮은 곳의 공동체를 생각한다면, 한 사람의 완성에 다른 생명을 들러리로 세우지 않는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

산을 다 설명하지 않고

하산을 죽음의 다른 이름으로만 닫지 않는다. 저 아래의 집은 최종 안식처일 수도 있지만, 오늘 다시 돌아갈 생활의 자리로도 읽을 수 있다. 그림은 그 어느 쪽을 확정하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제목이 열어놓은 움직임은 여러 삶의 시간과 만날 수 있다.

내려오는 자를 이미 모든 것을 안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 때, 그 몸에 아직 남은 일이 보인다. 가까운 길을 살피고, 쉴 곳을 찾고, 다른 몸과 거리를 맞추는 일이다. 큰 깨달음 뒤에 끝나는 그림이 아니라 작은 생활 쪽으로 계속 열리는 그림이 된다.

나무들 아래에 작은 몸들이 있다. 집의 지붕은 낮다. 먼 배 하나가 그 위쪽 바다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