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생애와 장소 · 68 / 100
난무(亂舞)의 시간
흩어진 획들이 이루는 리듬
The Time of Wild Dance
하늘을 먼저 보고, 다시 집으로
〈난무〉(1997)에서는 새들이 하늘의 넓은 부분에 흩어져 있다. 날개의 방향은 일정하지 않고, 새와 새 사이의 거리도 고르지 않다. 그 아래 돌담에는 내려앉은 새들이 있다. 화면은 비행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것과 앉은 것이 함께 그 넓이를 만든다.
오른쪽의 큰 초가집에는 앉은 사람이 있고, 왼쪽 아래에는 목을 든 말이 있다. 눈은 하늘에서 담으로, 담에서 집과 말로 내려온다. 이 움직임은 화면에 실제로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그림을 보는 눈의 시간이다. 난무는 대상의 운동과 감상의 운동을 함께 일으킨다.
그러므로 이 그림의 질문은 새들이 얼마나 빨리 나는가에만 있지 않다. 그 많은 방향을 보면서도 왜 집과 말의 자리를 잃지 않는가. 흩어짐이 화면을 깨뜨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부분을 다시 보게 하는 힘이 된다는 데서 난무의 형식이 시작된다.
어지러움에도 간격이 있다
난무라는 제목은 어지러운 움직임을 춤으로 읽게 한다. 그렇다고 그 춤에 한 사람의 지휘자나 정해진 박자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에서는 되풀이되는 검은 형상과 서로 다른 틈이 함께 리듬을 만든다. 같은 크기의 간격을 반복하는 대신 간격의 변화가 눈을 움직인다.
어떤 부분에서는 새들이 가까이 모이고, 다른 부분에서는 밝은 바탕이 더 넓게 열린다. 가까운 형상들을 훑던 눈이 열린 자리에서 잠깐 느려진다. 새 한 마리의 모양만 떼어내면 이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난무의 단위는 새이면서 동시에 새들 사이의 자리다.
이 간격은 질서를 보여주기 위해 어지러움을 없애지 않는다. 오히려 각기 다른 방향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전체의 긴장이 살아 있다. 회화적 질서는 모든 것을 같은 방향으로 몰아가는 일이 아닐 수 있다. 서로 다른 움직임을 한 화면에서 잃지 않는 일일 수 있다.
카오스의 증명 대신, 구도의 관찰
이런 화면을 과학의 질서 생성과 비교할 수는 있다. 프리고진의 연구는 비평형 조건에서 새로운 구조가 생길 수 있음을 다룬다. 다만 그 이론은 구체적인 물리적 조건과 과정에 관한 것이다. 불규칙해 보이는 새떼를 그렸다는 사실만으로 그림이 그 이론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완성된 도판에서 날아온 경로와 속도를 측정할 수는 없다. 새의 생물학적 행동이나 화가가 실제로 붓을 움직인 순서도 곧바로 알 수 없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형상의 배치다. 방향, 간격, 밝음과 어두움, 밀도가 달라지는 자리들이다.
이 범위를 지킨다고 회화의 힘이 작아지지는 않는다. 수식과 같다고 말하지 않아도, 흩어진 획이 어떻게 시선을 모으고 다시 흩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림은 과학의 직관적 예고가 되어야만 깊은 것이 아니다. 자기 화면 안에서 정밀하게 읽힐 때에도 깊어진다.
같은 제목보다 중요한 차이
〈난무〉라는 제목이 여러 작품을 묶더라도 그것만으로 일정한 발전 순서가 생기지는 않는다. 첫 사용 연도나 새의 수가 줄어드는 과정을 말하려면 해당 작품들을 연대와 함께 확인해야 한다. 여기서는 제공 도록의 1997년 작품에서 출발한다. 보지 않은 그림들까지 하나의 성장 이야기로 묶지 않는다.
이 한 점 안에서도 반복과 차이는 구체적이다. 검은 새의 형상이 되풀이되지만 같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집의 지붕은 새보다 큰 덩어리로 놓이고, 나무의 짙은 잎은 그 사이에서 다른 무게를 만든다. 반복은 이미 마련된 배경 위의 장식이 아니라 배경을 달리 읽게 하는 배치다.
다른 작품과 비교할 때에도 같은 질문을 가져갈 수 있다. 무엇이 되풀이되며, 무엇과의 거리가 바뀌는가. 새가 줄었다면 그 자리를 무엇이 맡는가. 조용해 보이는 그림에도 간격의 긴장이 있는가. 차이는 소재 목록의 증감보다 관계가 달라지는 곳에서 선명해진다.
춤이라고 부르는 눈
새의 비행을 춤이라고 부르는 것은 관객이 경험하는 리듬의 언어다. 새들이 먹이를 찾는지, 다른 자리를 향하는지, 아무 목적 없이 나는지는 도판만으로 정할 수 없다. 비유는 동물의 삶을 지우지 않을 때 더 정확해진다. 새는 우리의 감상을 위해서만 날지 않는다.
그럼에도 춤이라는 말이 유효한 것은 움직임을 정답으로 고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날개가 만드는 여러 각도와 새들 사이의 틈을 따라가며 눈이 방향을 바꾼다. 그림 앞의 몸은 가만히 있어도 시선은 머물고 돌아선다. 난무는 그 가만한 몸 안에서도 작은 이동을 만든다.
이 경험을 해방이나 불안 가운데 하나로만 정할 필요는 없다. 흩어지는 형상은 열림을 줄 수 있고, 너무 많은 방향은 긴장을 줄 수 있다. 두 감각이 함께 있는 것이 이 그림의 힘일 수 있다. 춤은 반드시 기쁜 얼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앉은 사람의 시간
집 안의 인물은 다리를 앞으로 내놓고 앉아 있다. 말은 집 밖에서 목을 들고 있다. 하늘의 새들과 이 두 몸을 함께 보면 움직임의 크기가 달라진다. 사람이 가만히 있기 때문에 새의 흩어짐이 두드러지고, 새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 곁의 작은 자리가 더 또렷해진다.
앉아 있다는 사실이 무기력의 증거는 아니다. 기다림이나 휴식으로 읽을 수도 있으나 그 가운데 하나를 작가의 확정된 뜻으로 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몸이 화면의 시간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속도로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비행의 자리 옆에 머무는 자리가 있다.
바람 앞에 사는 모든 존재가 같은 자세를 취하지는 않는다. 돌담의 새와 하늘의 새도 다르고, 말과 사람도 다르다. 한쪽의 운동을 자유로, 다른 쪽의 정지를 패배로 분류하지 않을 때, 난무는 서로 다른 몸이 자기 자리를 갖는 풍경으로 열린다.
고요는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이대로 가는 길〉(2006)의 넓은 간격과 〈정오〉(2007)의 촘촘한 획을 함께 생각해보자. 뒤에 그렸다는 이유로 언제나 더 비거나 더 조용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림의 연도는 순서를 알려주지만, 그 순서가 곧 격렬함에서 평온으로 가는 한 줄의 길은 아니다.
〈정오〉에서는 굽은 획들이 집과 나무와 작은 사람 주위를 촘촘히 지난다. 밝은 바탕과 많은 흔적이 동시에 남는다. 이 작품을 단지 폭풍을 이겨낸 뒤의 평화로 읽으면, 아직 화면에서 움직이는 힘을 놓치게 된다. 만년의 그림도 긴장을 새로 만들 수 있다.
난무와 고요는 서로를 지운 뒤 차례로 오는 결론이라기보다, 화가가 되돌아가며 달리 구성한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어느 날에는 간격이 넓어지고, 다른 화면에서는 획이 많아진다. 성숙은 모든 그림을 하나의 평온으로 모으는 일만은 아니다.
하늘에서 돌담으로 내려오는 눈
이제 〈난무〉의 하늘로 다시 돌아간다. 처음에는 새가 많다는 것이 보였지만, 오래 보면 새가 없는 자리도 보인다. 밝은 바탕이 새의 형상을 끊어놓으면서 서로 이어준다. 그 틈을 읽기 시작하면 어지러움은 사라지지 않은 채 더 구체적인 질서를 얻는다.
이 질서는 한 생애를 승리로 마감하는 표지가 아니다. 화면의 여러 부분을 다시 만나게 하는 방식이다. 같은 그림을 다시 본다는 것은 전에 세지 못한 관계를 하나 더 발견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난무의 시간은 그렇게 보는 사람에게도 이어진다.
위에서는 새들이 날고 있다. 아래에서는 몇 마리가 돌담에 앉아 있다. 집 안의 사람은 다리를 내놓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