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생애와 장소 · 67 / 100
머무르며 여행하는 화가
한 장소를 깊이 본다는 것
A Painter Who Stays and Travels
떠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 벗어나
변시지를 제주에 머문 화가라고 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여행하지 않은 화가라고 부르면 그의 회고와 어긋난다. 그는 유럽에서 길을 묻고 걸어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제주에서도 제주시의 생활과 서귀포 화실 사이를 오갔다. 머무름은 이동이 지워진 빈칸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몇 번 떠났는가보다 무엇을 가지고 돌아왔는가다. 장소를 바꾸면 눈앞의 건물과 말소리는 달라진다. 그렇다고 그림을 보는 눈이 매번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래 쌓인 관찰과 습관이 새로운 풍경 앞에서 다시 쓰이고, 때로는 그 풍경 때문에 고쳐진다.
머무름과 여행을 반대로 놓지 않으면 변시지의 풍토도 넓어진다. 풍토는 떠나는 순간 잃어버리는 자격이 아니다. 다른 곳을 본 뒤에도 작용하고, 돌아온 뒤에도 다시 배워야 하는 관계다. 한 장소에 깊이 산다는 것은 다른 장소를 닫아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길을 묻는 말, 멈추어 그리는 손
유럽 여행에 관한 구술에서 변시지는 일행과 걷다가 그릴 곳이 보이면 멈췄다고 회고한다. 예전에 배운 프랑스어가 혼자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말도 한다. 낯선 도시에서의 그림은 오직 영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묻고 알아듣고 다시 찾아가는 실제 일이 그 곁에 있다.
그 장면에서 화가는 풍경을 차지하는 주인이 아니다. 모르는 길이 있고 도움을 청할 상대가 있다. 그릴 자리를 정하려면 자기 몸의 피로와 남은 시간을 함께 헤아려야 한다. 여행의 자유는 아무 조건이 없는 자유가 아니라, 조건을 알아가며 움직일 수 있는 자유다.
멀리 떠난다는 큰 말은 이렇게 작은 행동들로 이루어진다. 길 하나를 묻고, 모퉁이를 확인하고, 그림을 그릴 만큼 멈추는 것. 제주에서 쌓은 눈이 그 거리에 나와 있고, 그 거리에서 본 것이 다시 화가의 기억에 들어간다. 여행은 자기 밖으로 나가는 일이면서, 자기 안의 것을 새로 시험하는 일이 된다.
디킨슨의 방에도 바깥이 있었다
에밀리 디킨슨을 방 하나로 우주를 쓴 시인이라 부르더라도, 평생 방 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박물관의 전기에는 학교생활과 산책, 치료를 위한 보스턴 체류가 기록되어 있다. 집에서의 글쓰기 역시 가족과 친구, 편지와 시를 주고받는 관계 안에 있었다.
이 비교에서 빌릴 것은 고립의 신화가 아니라 가까운 것에 오래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이다. 창밖의 정원이 넓은 세계를 대신한다기보다, 그 정원도 세계와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는 일이다. 작은 공간이 저절로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무엇을 살피는지가 중요하다.
변시지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섬이라는 경계만으로 작품의 밀도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가까운 바다를 다시 보고, 이전 그림과 다른 간격을 만들고, 익숙한 나무를 덜 익숙하게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머문 날의 수보다, 머무는 동안 다시 본 것들이 그림에 남는다.
낯선 곳을 자기 풍경으로 만드는 일
화가가 다른 지역의 풍경을 그릴 때, 그곳은 빈 무대가 아니다.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이 모르는 역사와 쓰임이 있다.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순수한 자연이라고 부르거나, 자신의 내면을 위해 준비된 장소처럼 다루어서는 그 구체성이 사라진다.
고향에 돌아온 경우에도 저절로 그 모든 사정을 아는 것은 아니다. 출생지는 관계의 시작일 수 있으나 장소를 독점적으로 이해할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 오래 떠나 있었던 사람에게는 다시 배울 일이 있다. 남아 살던 사람의 눈도, 돌아온 사람의 눈도 서로 대신할 수 없다.
변시지의 귀향과 여행을 함께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까운 곳을 깊이 그리는 일과 낯선 곳 앞에서 자기 판단을 늦추는 일은 맞닿아 있다. 풍토미학은 장소의 소유를 주장하기보다, 장소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책임을 묻는 언어가 될 수 있다.
닻은 하나여도 기억은 여러 곳에
제주를 작업의 중심으로 삼았다고 해서 오사카와 도쿄와 서울의 시간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가을 애련정〉의 정자와 반영을 보는 눈은 이미 거리와 반복을 다루고 있다. 뒤의 제주 그림에서 그 관계가 달라진다고 해도, 앞의 그림이 자기 삶과 무관했던 연습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일몰〉(1975)의 바다와 하늘에는 여러 빛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을 이후의 마른 풀잎색과 함께 보면, 한 장소에 산다는 것이 처음부터 한 가지 팔레트를 고정하는 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착한 주소와 완성된 화풍을 같은 날짜에 묶을 수는 없다.
닻을 내리는 것은 배의 지나온 길을 없애지 않는다. 오히려 돌아올 곳이 생기면 이전에 본 것을 다시 살필 자리가 생긴다. 한 장소는 여러 기억을 정리하는 중심이 될 수 있다. 그 중심은 밖과 이어져 있을 때에도 충분히 깊다.
익숙함을 다시 낯설게
오래 머물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변화가 보일 수 있다. 반대로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보지 않을 수도 있다. 머무름의 가치는 체류 기간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같은 집을 또 그렸을 때, 이전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작품에서 찾아야 한다.
변시지는 같은 누런 색조라도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회고했다. 변화는 반드시 새로운 소재를 데려오는 방식으로만 생기지 않는다. 이미 있는 집을 조금 작게 놓거나, 배를 더 멀리 두거나, 나무 곁의 간격을 다르게 남기는 데서도 일어난다.
여행은 이 익숙함을 흔드는 한 방법이고, 반복해서 보는 일은 또 다른 방법이다.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본래 더 깊지는 않다. 같은 질문은 장소를 바꾸어도 따라오고, 같은 장소에서도 다시 생긴다. 화가가 계속해야 하는 것은 이동의 횟수가 아니라 시선의 갱신이다.
돌아오는 곳도 달라진다
집으로 돌아오면 문은 전에 있던 자리에서 열릴 수 있다. 그러나 돌아온 눈까지 전과 같지는 않다. 멀리서 보았던 나무의 윤곽이나 물가의 빛이 익숙한 풍경에 겹친다. 귀환은 옛 장면의 복원이 아니라, 현재의 자리에서 기억을 다시 놓는 일이다.
서귀포라는 이름을 그런 관계의 중심으로 읽을 수 있다. 다만 이름이 화가의 전 생애를 예언했다는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돌아가는 사람과 맞이하는 장소는 함께 변한다. 이름이 같은 채로 남아 있어도 그 이름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변시지는 심상을 표현하는 소재가 꼭 제주에 한정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유럽을 그려도 자신의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 말에서 장소성은 국경 안에 갇히지 않는다. 어디를 그렸느냐와, 그곳에서 어떤 관계를 만들었느냐가 함께 중요해진다.
머문 자리에 다시 놓는 그림
한 장소에 충실하다는 것은 다른 장소를 보지 않았다는 증명과 다르다. 여러 곳을 거쳐 얻은 눈으로 한 장소를 오래 살필 수도 있다. 변시지의 정착은 여행을 취소한 결론이 아니라, 경험들을 되돌려 생각할 지속적인 자리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다른 나라로 가는 일도 풍토를 버리는 일이 될 필요는 없다. 제목과 연도, 그림이 나온 생활을 정확히 함께 건네면 낯선 독자는 자기 경험으로 들어올 길을 얻는다. 그림을 멀리 보내는 일과 그 출발지를 지키는 일은 함께 할 수 있다.
회고 속 화가는 낯선 길에서 멈춘다. 일행은 먼저 간다. 그는 그릴 곳을 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