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Ⅴ 생애와 장소

Ⅴ 생애와 장소 · 66 / 100

추사의 제주, 변시지의 제주

유배와 귀향 사이

Chusa’s Jeju, Byun Shi-Ji’s Jeju

빈 집 / Empty House · 1987. 왼쪽의 작은 집과 기울어진 나무, 오른쪽 먼 배와 태양. / A small house and leaning tree at left, with a distant boat and sun to the right.
〈빈 집〉 · 1987FŪDO 062

같은 섬이라는 말의 안쪽

추사 김정희와 변시지를 제주라는 이름 아래 놓으면 닮은 풍경이 먼저 보인다. 집과 나무. 적은 획과 넓은 간격. 그러나 닮음을 서둘러 말하면 두 사람이 그곳에 이른 사정부터 지워질 수 있다. 형벌로 보내진 사람과 돌아와 삶을 이어간 사람의 자리는 같지 않다.

추사의 〈세한도〉는 제주 유배 중이던 1844년에 그려졌다. 변시지는 훗날 제주에서 추사의 서첩을 보며 새롭게 그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두 사람을 잇는 것은 막연히 같은 바람만이 아니다. 앞선 사람의 글씨를 실제로 펼쳐 본 뒤의 눈도 그 사이에 있다.

이 비교는 어느 도착이 더 순수했는지 가리는 일이 아니다. 강제된 고립 속에서도 이어진 관계가 있었고, 귀향 뒤에도 새로 풀어야 할 어려움이 있었다. 같은 섬은 같은 경험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경험이 한 장소를 얼마나 다르게 열어 보이는지 묻게 한다.

책을 보내준 사람

국립중앙박물관의 해설은 〈세한도〉를 이상적이 보내준 귀한 책들과 연결한다. 궁지에 놓인 스승을 잊지 않은 제자에게 건넨 그림이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벗도 책도 없는 완전한 단절의 풍경으로만 읽을 수는 없다. 그림은 끊어지지 않은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고 건너갔다.

해설에 등장하는 것은 소박한 집과 네 그루의 나무다. 사람이 그려져 있지 않아도 사람이 사라진 그림은 아니다.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화면의 바깥에서 그 집을 둘러싼다. 여백의 넓이는 무인도의 넓이와 다르다. 누군가에게 닿으려는 마음이 머무는 거리이기도 하다.

여기서 절제는 관계의 삭제가 아니다. 많은 인물을 그리지 않고도 누가 누구를 잊지 않았는지 남길 수 있다. 화폭에 드러난 것만 세면 작은 그림이지만, 그 그림을 건넨 행위까지 읽으면 공간이 넓어진다. 침묵은 아무도 없다는 말과 같지 않다.

빈 집 곁에 남은 것들

변시지의 〈빈 집〉(1987)에는 화면 왼쪽의 작은 집, 그 곁의 나무와 새들, 먼 배가 있다. 제목은 비었다고 말하지만 화면은 텅 비지 않았다. 집과 배 사이에 넓은 빛이 놓여 있다. 집 안을 모두 확인할 수 없는 시선은 바깥의 거리부터 더듬게 된다.

집은 크지 않다. 그런데 그 작은 집을 지나면 바다가 멀어진다. 나무의 짙은 부분과 열린 바탕, 집 아래에서 바깥으로 뻗은 검은 획이 서로의 크기를 바꾼다. 빈 집의 의미는 문 하나에 갇히지 않는다. 곁에 무엇이 남아 있고 무엇이 멀어져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세한도〉와 이 그림을 나란히 읽을 때 유용한 질문은 어느 집이 더 외로운가가 아니다. 사람이 적거나 보이지 않는 풍경에서 관계는 어떻게 남는가. 한쪽에서는 주고받은 책과 그림의 내력이, 다른 쪽에서는 집과 배와 새 사이의 간격이 그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붙든다.

나무의 자세를 하나로 묶지 않기

추사는 곧고 변시지는 굽었다는 대조는 기억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 외우면 나무를 보기도 전에 뜻을 정해버린다. 곧음이 언제나 지조인 것도 아니고, 굽음이 언제나 순응인 것도 아니다. 줄기의 방향뿐 아니라 가지의 벌어짐과 주변의 간격을 함께 보아야 한다.

변시지는 추사의 글씨에서 오래 휘어진 나뭇가지와 통하는 조형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또한 자신의 집과 나무는 〈세한도〉의 집과 나무와 다르다고 구별했다. 같은 형태를 옮겼다는 설명보다, 서로 다른 형태에서 닮은 느낌을 만났다는 자기 설명에 가깝다.

그 말을 따라가면 비교의 자리가 바뀐다. 나무를 두 가지 성격의 표지로 나누는 대신, 선의 움직임을 받아들이는 눈을 본다. 바깥에서 본 가지가 서첩의 획을 다르게 보게 하고, 서첩의 획이 다시 가지를 보게 한다. 풍토와 전통은 그 왕복 안에서 만난다.

두 여백의 온도를 재지 않는다

종이의 여백은 차갑고 유화의 바탕은 따뜻하다는 구별도 충분하지 않다. 밝은 색 안에서도 막막함을 느낄 수 있고, 적은 먹획 사이에서도 온기를 떠올릴 수 있다. 감정은 색의 이름에서 바로 나오지 않는다. 형상들이 어떤 간격으로 놓였는지를 지나온다.

〈빈 집〉의 마른 풀잎색은 칠해진 자리다. 그 안에서 밝고 어두운 흔적이 겹치며 먼 배까지 거리를 만든다. 이를 종이에 먹으로 그린 공간과 비교할 때에는 재료의 차이를 남겨두어야 한다. 먹처럼 느껴진다는 감상이 유화가 실제로 먹이라는 뜻은 아니다.

두 회화가 만나는 곳은 재료의 동일성이 아니라 간격이 일하는 방식이다. 어떤 획은 집을 세우고, 어떤 비워둠은 그 집을 멀게 한다. 비어 있는 곳이 형상을 지탱한다는 질문은 공유할 수 있다. 그 질문에 답하는 표면까지 같아질 필요는 없다.

고난보다 오래 남은 관계

유배가 걸작을 낳았다는 문장은 작품의 성취를 말하면서 형벌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 수 있다. 고난이 필요했으므로 좋은 그림이 나왔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예술이 고난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고난이 예술을 위해 필요했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한다.

〈세한도〉의 내력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고립의 강도만이 아니다. 그 안으로 책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변시지의 회고에도 화첩과 표구점, 길을 오가며 본 나무가 등장한다. 그림의 깊이를 설명하려면 견딘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이 접한 관계와 사물을 함께 보아야 한다.

풍토는 사람을 혼자 단련하는 거대한 기계가 아니다. 날씨와 지형 사이에 생활이 있고, 생활 사이에 누군가의 도움이 있다. 제주의 예술을 고독의 이야기로 읽더라도 그 작은 연결들을 지워서는 안 된다. 때로는 먼 곳에서 건너온 한 권의 책이 섬의 크기를 바꾼다.

보았다는 것과 연구했다는 것

변시지는 추사를 많이 연구했다는 말에 선을 그었다. 자신의 경험을 표구점에서 보고, 서첩을 펼치고, 아름다움을 느낀 일로 설명했다. 이 구술은 추사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주장도, 추사 연구가 제주화의 모든 형식을 낳았다는 주장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는 수용이라는 넓은 자리가 있다. 앞선 작품을 보는 사람이 반드시 그것을 따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전에 알던 이름이 새롭게 보일 수도 있고, 이미 살아오던 감각에 다른 언어가 생길 수도 있다. 변시지의 회고에서는 제주에서의 생활과 서첩을 보는 경험이 서로를 밝힌다.

따라서 두 화가의 관계는 하나의 계보 화살표보다 왕복하는 시선으로 읽는 편이 낫다. 추사의 획에서 제주를 느끼고, 제주에서 추사의 획을 다시 느끼는 것. 그 사이에서 변시지는 자기 집을 그리고 자기 나무를 남긴다. 닮음을 느낀다는 것은 다름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만남은 지금의 화면 앞에서

추사와 변시지를 연결하는 일은 과거에 없었던 만남을 꾸며내는 일이 아니다. 남아 있는 작품과 기록을 오늘 함께 놓는 일이다. 유배와 귀향의 차이를 보존할수록, 집과 나무와 간격이 던지는 질문은 오히려 구체적이 된다. 무엇이 사람을 혼자 두고, 무엇이 끝내 이어주는가.

한쪽의 집을 다른 쪽의 집으로 번역할 수는 없다. 제자에게 건넨 그림의 내력과, 먼 배를 두고 선 작은 집의 공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붙든다. 그 다름을 남겨두는 비교가 두 작품 모두에게 자리를 준다.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빈 집〉의 나무는 집 위로 조금 더 뻗어 있다. 새들은 그 곁에 있다. 배는 멀리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