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Ⅴ 생애와 장소

Ⅴ 생애와 장소 · 65 / 100

기당미술관

한 화가의 기억에서 함께 보는 자리로

Gidang Museum of Art

빈 집 / Empty House · 1987. 왼쪽의 작은 집과 기울어진 나무, 오른쪽 먼 배와 태양. / A small house and leaning tree at left, with a distant boat and sun to the right.
〈빈 집〉 · 1987FŪDO 062
해촌 / Seaside Village · 2002
〈해촌〉 · 2002FŪDO 047

한 사람의 이름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미술관

기당미술관은 1987년 서귀포에 문을 열었다. 강구범이 건물을 마련해 기증한 일과 변시지가 명예관장으로 참여한 일은 함께 기억되어야 한다. 전시의 중요한 축이 변시지라고 해서 이곳 전체를 한 화가가 자신을 위해 세운 사립미술관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 구별은 화가의 역할을 줄이지 않는다. 건물이 생기는 일과 그 안에 작품을 모으는 일, 시민이 드나들 수 있게 운영하는 일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술관은 한 사람의 뜻이 여러 사람의 일로 옮겨지는 곳이기도 하다.

변시지의 그림을 그곳에서 읽는 일도 이 공동의 역사 안에 놓인다. 화가와 풍토만으로 끝나는 관계가 아니다. 작품을 받은 도시, 다른 작품을 보탠 사람들, 전시를 돌보는 이들과 관객이 함께 그 관계를 이어간다.

고향을 말하기 어려웠던 학생

미술관을 생각하게 된 계기에 관해 변시지는 학생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서울에서 만난 제주 출신 학생이 고향을 묻는 말에 머뭇거렸다고 한다. 자신도 제주 사람이라고 하자 학생은 반가워했다. 큰 제도의 출발을 설명하는 자리에 작고 구체적인 만남이 놓여 있다.

이 기억은 당시 제주에 문화가 없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구술 속 변시지도 지역 나름의 문화가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을 고쳐 설명한다. 문제는 이미 있는 삶을 낮게 보게 하는 시선과, 새로운 문화시설에 접근할 기회의 차이에 있었다고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술관은 밖에 내보일 자랑만이 아니다. 자기 고향을 설명할 때 목소리를 낮추지 않아도 되는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림을 가까이 두는 일이 사람의 자기 이해와 만나는 자리다.

그림을 부탁한 엽서

변시지는 미술관을 만든 뒤 서울의 화가들에게 작품 기증을 부탁하는 엽서를 보냈다고 회고했다. 기대한 대로 곧바로 작품이 모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개별적으로 다시 교섭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소장품은 선언만으로 생기지 않았다.

엽서 한 장에는 부탁과 기다림이 있다. 화가가 화면 앞에서 쌓은 관계가 다른 화가와의 대화로 이어진다. 이 일은 자신의 작품을 돌보는 것과 닮았지만 같지는 않다. 다른 사람의 그림이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당미술관의 이야기는 한 화가의 유산에만 닫히지 않는다. 자기 그림 옆에 다른 그림을 놓으려는 노력도 그 역사다. 이름들이 나란히 놓일 때 관객은 한 작가의 세계뿐 아니라 작품 사이의 차이를 만난다.

소유에서 만남의 조건으로

기증은 물건의 자리가 바뀌는 일이다. 그러나 공공성은 자리를 옮기는 순간에 모두 완성되지 않는다. 작품이 보존되고, 이력이 기록되고, 서로 다른 관객이 볼 수 있을 때 기증의 의미는 계속 자란다. 받는 일 다음에 돌보는 일이 온다.

〈빈 집〉 같은 그림을 제주에서 보면 주변 풍경의 기억이 감상에 더해질 수 있다. 먼 도시에서 보면 다른 기억과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어느 장소만이 작품을 올바르게 말하게 한다고 할 필요는 없다. 장소는 해석을 돕지만 해석을 독점하지는 않는다.

미술관이 해야 할 일은 정답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보다 만남의 조건을 마련하는 데 가깝다. 작품 전체를 볼 거리, 작은 글씨를 읽을 자리, 다시 돌아와 비교할 자료가 필요하다. 그 조건이 갖추어질수록 한 그림은 다른 사람에게 다르게 열릴 수 있다.

화가의 목소리와 다른 해석

명예관장으로 참여한 화가의 경험은 미술관의 중요한 자산이다. 무엇을 보았고 어떻게 그렸는지에 관한 말은 화면만으로 알 수 없는 정보를 남긴다. 그러나 작가의 회고도 당시 기록과 함께 살펴야 하며, 모든 관객의 감상을 대신할 수는 없다.

작품 해설은 화가의 말, 문헌의 사실, 학예사의 해석을 구별할 때 더 믿을 만해진다. 그 구별이 대화를 막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 같은 그림을 다르게 읽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작가를 존중하는 일과 다른 해석을 허용하는 일은 함께 갈 수 있다.

작업실 재현도 마찬가지다. 기당미술관의 방문 기록에 소개된 재현 공간은 남은 도구를 통해 작업을 생각하게 한다. 그 도구의 이력과 전시의 구성 방식을 알려준다면, 화가가 곁에 없는 시간에도 질문은 계속될 수 있다.

기증 이후에도 남는 일

모네의 오랑주리 〈수련〉은 기증과 전시 공간의 관계를 함께 생각하게 하는 다른 사례다. 미술관 기록에 따르면 작품은 1927년, 화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구상에 따라 설치되었다. 작품을 남기는 일과 그것을 보여줄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 이어져 있다.

그렇다고 오랑주리와 기당미술관을 같은 유형으로 묶을 필요는 없다. 특정 연작을 위해 구성된 공간과 여러 작가의 작품을 모으는 공공미술관은 서로 다른 일을 맡는다. 비교가 드러내는 공통점은 기증자의 유명함이 아니라, 기증 이후에도 돌봄과 해석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빛과 공기, 전시 기간을 조절하는 실무는 작품의 감각과 무관한 뒷일이 아니다. 오래 다시 볼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다. 그림에 바람이 있다고 해서 실제 바닷바람을 원화에 들여보낼 필요는 없다. 풍토의 감각을 지키는 일에는 원화를 보호하는 거리도 포함된다.

지역에 산다는 것

지역 미술관은 여행자가 한 번 들르는 곳이면서, 가까이 사는 사람이 다시 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어제 본 그림을 다른 계절에 다시 보고, 새로 들어온 작품과 나란히 보는 시간이 쌓일 수 있다. 명소의 가치와 생활 속의 가치는 같지 않다.

변시지의 구술에 남은 학생의 머뭇거림을 다시 생각하면, 미술관의 사회적 의미도 가까워진다. 자신의 고향이 남의 평가로만 설명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지역의 그림을 본 사람이 자기 말로 좋고 낯설고 어렵다고 말할 수 있을 때, 지역은 전시되는 대상만이 아니게 된다.

이런 역할은 화가 한 사람이 끝낼 수 없다. 다음 학예사와 다음 관객이 이어받아야 한다. 변시지의 그림이 새로운 질문을 만나도록 열어두는 것은 유산을 바꾸어 없애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관계로 지키는 일이 될 수 있다.

문이 열린 다음

미술관이 화가를 완성한다고 말하면 문을 연 뒤의 일이 너무 쉽게 끝난다. 건물은 시작이고, 작품은 계속 돌보아야 하며, 해설은 새로운 자료에 따라 고쳐질 수 있다. 공공의 장소는 완성된 선언보다 반복되는 책임에 가깝다.

강구범의 기증, 변시지의 참여, 작품을 보탠 화가들의 일이 한 공간을 만들었다. 그 공간을 오늘의 만남으로 잇는 것은 또 다른 손들이다. 한 사람을 기억하는 곳이면서, 한 사람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곳. 기당미술관의 의미를 그 안에서 읽을 수 있다.

한 사람이 그림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선다. 다른 사람이 그 옆에 선다. 그림은 둘 사이에서 다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