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생애와 장소 · 64 / 100
스미소니언에 걸린 변시지의 그림
작품이 멀리 가도, 장소를 지우지 않는 일
Byun Shi-Ji at the Smithsonian
한 벽에 이르기까지
스미소니언이라는 큰 이름 안에는 서로 다른 박물관과 전시가 있다. 변시지의 전시를 이야기할 때 먼저 밝혀야 할 곳은 국립자연사박물관의 한국관이다. 스미소니언 공식 기록은 이 한국관의 운영 기간을 2007년 6월 8일부터 2017년 7월 5일까지로 제시한다.
한국관은 회화만을 모은 전시가 아니었다. 공식 소개에는 생활과 가족, 문자, 풍경, 국경을 넘는 정체성, 현대미술이 함께 놓인다. 이 맥락에서 그림은 한 화가의 독립적인 작품이면서 한국을 소개하는 전시의 일부가 된다. 두 역할이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국제 전시는 걸렸다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떤 제목과 설명 옆에, 어떤 다른 물건들과 함께 보였는가를 묻게 한다. 작품이 먼 곳에 이르렀다는 것은 새로운 관객뿐 아니라 새로운 문맥을 만났다는 뜻이다.
전시와 소장을 구별한다
2017년 반환 당시의 보도는 재단의 설명을 인용해 두 작품이 십 년 대여 계약의 종료와 함께 돌아왔다고 전한다. 기사에 실린 영문 제목은 ‘Boisterous Dance’와 ‘Going the way as it is’다. 이 기록은 대여 전시의 이력이지 영구 소장 편입을 뜻하지 않는다.
한국관의 운영 기간, 대여 계약의 기간, 각 원화가 실제로 벽에 걸린 기간은 구분해 기록해야 한다. 현재 확인한 자료만으로 개별 작품의 모든 전시 교체일을 알 수는 없다. ‘상설’이라는 말이 보존·대여·소장의 차이를 지워서는 안 된다.
정확한 표기가 성취를 작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작품이 선택되고 이동하고 오랜 기간 소개된 일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다른 지위를 덧붙이지 않을 때, 다음 연구자는 같은 사실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제목보다 먼저 작품을 확인한다
제공 도록의 〈이대로 가는 길〉(2006)에는 왼쪽의 말과 오른쪽의 작은 사람이 떨어져 있다. 그 뒤로 나무들이 언덕의 선을 따르고, 오른쪽에는 낮은 집이 있다. 위쪽 넓은 공간에는 작은 배와 가는 수평선이 보인다. 이 도판에는 목적지가 없다는 설명보다, 형상들 사이의 거리를 먼저 보아야 한다.
같은 제목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도판을 대여 작품과 곧바로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연도와 크기, 등록번호, 전시 사진이 연결되어야 작품의 이력이 정확해진다. 제목의 번역이 달라질 때도 원제와 식별 정보는 함께 남아 있어야 한다.
이 확인을 거친 뒤에는 제목의 여운을 읽을 수 있다. ‘이대로’는 포기일 수도, 지금의 몸으로 계속 가려는 말일 수도 있다. 어느 뜻으로 읽든 그림 속 말과 사람의 거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문장은 화면에 기대어야 한다.
멀리 가도 장소는 지워지지 않는다
제주를 모르는 사람이 작은 몸이나 먼 배에서 자신의 시간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제주를 알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되지는 않는다. 처음 느낀 감정과 새로 배운 장소의 맥락은 서로를 바꿀 수 있다.
마른 풀잎색, 낮은 집, 돌담은 누구에게나 같은 기억을 불러오지 않는다. 어떤 관객에게는 낯선 생활의 모습이고, 다른 관객에게는 어릴 때 보던 풍경과 닮은 장면이다. 세계성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느끼는 상태보다, 다른 출발점들이 한 작품에서 대화할 수 있는 조건에 가깝다.
이를 입증하려고 실제 관객의 마음을 대신 써줄 필요는 없다. 무엇을 느꼈는지는 인터뷰나 기록이 말해줄 문제다. 비평은 가능한 읽기를 제안하고, 전시는 그 읽기에 닿을 자료를 마련한다. 공명과 증언은 서로 다른 층위다.
번역이 만들어야 할 거리
국제 아카이브에서 번역은 낯선 것을 모두 익숙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풍토를 단순한 날씨나 지역색으로 바꾸면 생활과 역사, 몸이 장소에 맺는 관계가 빠진다. fūdo라는 말을 남기고 처음에 짧게 풀어주는 방법은 이 차이를 보존하기 위한 하나의 선택이다.
반대로 용어를 그대로 두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도 않다. 말과 사람의 자세, 집과 배의 거리처럼 실제로 볼 수 있는 관계가 개념을 받쳐주어야 한다. 영어의 전문 용어가 한국어 원문보다 더 큰 주장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작품은 이동하되 장소는 지워지지 않고, 설명은 늘어나되 그림을 닫지 않는 것. 번역의 일은 그 두 가지 사이에 있다. 첫 느낌으로 들어온 사람이 더 정확히 알고 다시 그림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장소를 다루는 서로 다른 방법
골즈워디의 〈스톰 킹 월〉(1997–98)은 현장의 옛 담을 끌어안고 나무 사이와 연못을 따라 이어지는 돌 작업이다. 변시지의 돌담은 그와 달리 이동 가능한 화폭 안에서 선과 간격으로 나타난다. 장소에 놓인 돌과 장소를 느끼게 하는 그림은 같지 않다. 그 차이에서 매체가 장소를 붙드는 방식을 비교할 수 있다.
필립스컬렉션의 키퍼 작품 〈그대의 금발, 마르가레테〉(1981)에는 실제 짚이 사용되며, 해설은 첼란의 시와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연결한다. 이처럼 재료와 역사적 지시가 확인되는 경우와, 변시지의 화면에서 풍토의 무게를 읽는 경우를 구별해야 한다. 모든 폭풍을 특정 사건의 암호로 만들 수는 없다.
비교의 성과는 결국 같은 이름을 얻는 데 있지 않다. 돌을 쌓는 일, 짚을 화면에 붙이는 일, 유화의 선으로 집과 몸을 놓는 일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보이는 데 있다. 그때 변시지는 다른 작가를 대신하지도, 다른 작가로 대신 설명되지도 않는다.
하나의 중심을 넘어서
워싱턴에서의 전시는 변시지의 작품이 새 관객과 만난 중요한 이력이다. 그러나 그곳에 걸린 순간에야 작품의 가치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제주의 제작과 국내의 감상, 해외의 전시는 서로 연결되지만 어느 하나가 나머지를 무효로 만들지는 않는다.
비서구 모더니즘이라는 말도 주의해서 써야 한다. 유화를 배웠다는 이유로 모방이라 부를 수도 없고, 제주를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완성된 독창성을 선언할 수도 없다. 어떤 교육과 이동, 재료와 판단이 특정 작품을 만들었는지 드러내는 쪽이 더 설득력 있다.
풍토모더니즘을 제안한다면 그것 역시 연구의 이름이어야 한다. 지역 소재의 목록이 아니라, 살아온 조건이 선과 색과 공간으로 바뀌는 과정을 묻는 이름이다. 제주의 회화를 다른 장소의 현대미술과 동등하게 비교할 수 있게 하되, 차이를 미리 지우지 않는 언어가 필요하다.
다시 볼 수 있게 남기는 일
전시가 끝나면 기록이 그 뒤를 잇는다. 원제와 번역명, 제작 정보와 대여 기록, 설치 사진과 설명문을 연결해 두면 이후의 관객도 그 만남의 조건을 살필 수 있다. 유명한 미술관의 이름 한 줄보다 이런 연결이 연구를 더 멀리 보낸다.
한국 작가의 회화라는 말과 특정 매체 범주로서의 한국화는 같지 않다. 변시지의 작품이 유화라는 사실과 한국의 미술로 소개된 맥락을 함께 남겨두어야 한다. 한쪽만 강조하면 매체의 실험이나 문화적 이동의 의미가 흐려진다.
제공 도판의 사람은 오른쪽 아래에 작게 있다. 말은 조금 떨어진 왼쪽에 있다. 두 몸 사이에는 아직 걸어갈 자리가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