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Ⅴ 생애와 장소

Ⅴ 생애와 장소 · 63 / 100

모네의 빛, 변시지의 바람

감각을 나누기보다, 그림이 되는 과정을 보다

Monet’s Light, Byun Shi-Ji’s Wind

일몰 / Sunset · 1975
〈일몰〉 · 1975FŪDO 071
정오 / Noon · 2007. 촘촘한 짧은 획, 작은 집과 굽은 사람 사이의 짙은 나무. / Dense short marks surround a dark tree between a small house and a bent figure.
〈정오〉 · 2007FŪDO 012

제목의 대립을 넘어서

모네의 빛과 변시지의 바람을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쉽게 보이는 듯하다. 한 사람은 보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몸으로 겪는 것을 그렸다고 말하기도 쉽다. 그러나 빛은 몸이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고, 바람은 눈앞의 움직임을 통해서도 느껴진다. 두 감각은 그렇게 깨끗이 갈라지지 않는다.

변시지의 〈일몰〉에는 엷은 여러 색이 바다와 하늘에 겹쳐 있다. 〈정오〉에는 밝은 바탕과 굽이치는 획들이 함께 있다. 빛이 초기작에만 있고 바람이 후기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빛과 움직임이 한 화면을 이룬다.

따라서 이 제목은 두 화가를 나누는 표가 아니라 비교의 시작이다. 보거나 겪은 것이 곧바로 그림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사이에는 어떤 선택과 시간이 있는가. 두 화가를 함께 읽을 이유가 이 물음에 있다.

노트 속의 모네

제공된 육필원고 판독본에는 모네의 곡식더미 연작을 다루는 대목이 있다. 여름의 빛에서 해 질 녘으로, 겨울과 안개로 관찰이 이어지고, 하나의 대상이 여러 화면을 낳는 과정이 적혀 있다. 변시지의 노트 안에는 이렇게 다른 화가의 작업을 따라 읽은 시간이 남아 있다.

그 대목은 노트 안에서 모네의 말로 소개된다. 그러나 현재 확인한 것은 변시지가 남긴 학습·기록의 층위다. 그 문장의 최초 출처나 번역 경로까지 확정한 것은 아니다. 이를 새로 발견된 모네의 일기나 변시지의 독창적 문장으로 바꾸어 인용할 수는 없다.

이 구별은 영향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영향이 구체적인 읽기와 판단을 통해 오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화가의 색을 그대로 받는 대신, 같은 대상을 다시 보게 하는 방법을 생각했을 가능성이 열린다. 가능성은 남기되, 직접적인 제작의 원인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순간은 화실에서도 만들어진다

모네의 그림을 순간의 빛을 빠르게 받아 적은 기록으로만 볼 수는 없다. 미국 국립미술관은 루앙 대성당 연작을 현장에서 진행한 뒤 1894년 지베르니 화실에서 마무리했다고 설명한다. 현장의 관찰과 화실의 판단이 한 작품 안에 함께 있다.

시카고미술관의 〈곡식더미, 늦여름〉 조사 역시 물감층의 축적과 구도 조정의 흔적을 다룬다. 한눈에 즉각적으로 보이는 감각도 여러 작업의 결과일 수 있다. 그림 속 순간과 그 그림을 만드는 데 든 시간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변시지의 작업과 대화가 가능하다. 그 역시 해변에서 본 것을 집에서 자기 스타일로 옮긴다고 말했다. 두 화가의 방법을 같다고 할 필요는 없다. 다만 한쪽은 자연을 기다리기만 하고 다른 쪽만 세계를 능동적으로 만든다는 대비는 유지하기 어렵다.

제주 초기의 여러 색

〈일몰〉(1975)을 보면 바다와 하늘에 분홍빛, 청록빛, 엷은 누런빛이 어울려 있다. 왼쪽에는 해안의 덩어리가 있고 멀리 작은 배들이 놓인다. 색은 특정 사물의 표면만을 채우지 않고 화면 여러 곳에서 서로 응답한다.

이 그림을 나중의 마른 풀잎색에 이르지 못한 단계로 볼 필요는 없다. 엷게 나뉜 색과 작은 배, 남겨진 거리가 이미 하나의 장면을 이룬다. 다른 양식이 뒤에 왔다고 해서 그날의 그림이 미완의 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네와의 관계도 푸른색을 썼다는 사실만으로 판정할 수 없다. 실제 작품의 어떤 빛과 어떤 구성이 닮았는지, 노트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나누어 살펴야 한다. 형식의 유사성과 사료의 연결을 함께 볼 때 비교는 더 단단해진다.

바람을 느끼게 하는 빛

〈정오〉(2007)의 밝은 공간은 고요한 빈 바탕만이 아니다. 짙고 엷은 굽은 획들이 하늘과 땅을 가로지른다. 집과 나무와 사람이 그 흐름 안에 놓인다. 밝음은 움직임을 지우지 않고 획 사이를 드러낸다.

여기서 빛을 물리적 현상, 바람을 정신적 현상으로 나누면 그림이 좁아진다. 밝고 어두운 차이는 운동을 느끼게 하고, 운동의 흔적은 밝음이 퍼지는 방식을 달리 보이게 한다. 색과 선은 각자의 뜻을 따로 말하기보다 서로의 일을 바꾼다.

〈일몰〉과 〈정오〉를 함께 놓으면 단순한 청색에서 황색으로의 이동보다 복잡한 변화가 보인다. 색의 범위와 획의 밀도, 작은 배와 사람의 위치가 함께 달라진다. 바람은 색을 버린 자리에 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 맺어진 관계 안에서 느껴진다.

눈과 몸을 나누지 않는 감상

오랑주리의 〈수련〉은 여덟 구성이 두 개의 타원형 방에 이어지도록 설치되었다. 미술관은 이 공간이 모네의 구상과 연결된다고 설명한다. 이때 그림은 눈앞의 대상일 뿐 아니라 관객이 몸을 돌리고 거리를 바꾸며 만나는 환경이 된다.

이 사례만으로도 모네를 순수한 시각의 화가, 변시지를 신체의 화가로 나누기는 어렵다. 차이는 몸의 유무보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에 있다. 둘러싸는 큰 화면과 작은 형상 사이의 긴 간격은 서로 다른 감상의 리듬을 만들 수 있다.

변시지의 그림에서도 가까이 다가가면 획이 보이고, 물러나면 집과 사람이 다시 이어진다. 관객의 위치가 바뀌며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달라진다. 몸으로 본다는 말은 신비한 감각의 합일만이 아니라, 이런 작은 거리의 변화에서 시작한다.

다른 곳에서 다시 쓰는 회화

다른 회화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에 영원히 머문다는 뜻이 아니다. 변시지는 제주에서 비원 시절의 방식으로 그려보았지만, 소재만 제주여서는 부족하다고 회고했다. 장소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그림의 관계 안에서 다시 풀어야 했던 것이다.

이 과정을 서양의 눈에 동양의 정신을 넣은 결합으로만 설명하면 양쪽이 너무 단순해진다. 관찰과 기억, 재료와 습관, 생활과 판단은 처음부터 서로 섞여 있다. 바뀐 것은 문명의 절반을 교체하는 일이 아니라, 배운 것을 다른 조건에서 다시 쓰는 방식이었다.

모네를 지나야만 변시지에 도달한다는 계보도 필요하지 않다. 기록에 남은 학습은 연결을 만들고, 작품 사이의 차이는 연결의 한계를 보여준다. 영향은 종속의 이름도, 반드시 극복해야 할 빚도 아니다. 새 그림을 만드는 동안 계속 달라지는 관계다.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일

한 대상을 여러 번 그리면 대상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보는 습관도 시험받는다. 어제 보았던 색이 오늘은 다르게 이어지고, 당연했던 간격이 다시 문제가 된다. 반복이 깊어지는 것은 횟수 때문이 아니라, 그때마다 무엇을 다시 보았는가에 달려 있다.

모네의 연작과 변시지의 반복은 이 물음을 서로 다른 화면으로 돌려준다. 한쪽은 빛, 다른 쪽은 바람이라는 배분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움직이는 경험을 멈춘 화면 안에 남기면서, 다시 보는 사람의 시간은 닫지 않는 일이다.

〈일몰〉의 바다에 작은 배가 있다. 조금 물러서면 배는 더 작아진다. 그 곁의 엷은 색은 여전히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