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생애와 장소 · 62 / 100
터너와 변시지
폭풍을 보는 자리, 그 안에 남는 몸
Turner and Byun Shi-Ji
소용돌이와 곁에 선 몸
터너의 〈눈보라—항구 어귀의 증기선〉에서는 배가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놓인다. 테이트의 작품 기록은 이 배와 회전하는 주변의 관계를 핵심으로 설명한다. 배를 찾는 눈은 곧 그것을 둘러싼 움직임에 끌린다. 대상 하나와 그 대상을 알아보기 어렵게 하는 공간이 함께 작동한다.
변시지의 〈풍랑〉에서는 낮은 집 아래 사람과 말이 가까이 있다. 비스듬한 밝은 흔적들이 주변을 가르지만 두 몸의 윤곽은 비교적 또렷하다. 위쪽 멀리 작은 배가 보인다. 같은 화면에서 가까운 몸과 먼 배가 서로 다른 크기의 위험을 생각하게 한다.
두 그림을 잇는 것은 폭풍이라는 이름만이 아니다. 큰 움직임 속에서 작은 형상을 어떻게 붙들어두는가라는 문제다. 터너는 배를 찾게 하고, 변시지는 가까운 두 몸에서 주변으로 눈을 옮기게 한다. 비교는 그 시선의 차이에서 시작할 수 있다.
숭고와 안전한 자리
버크는 위험과 고통이 너무 가까우면 즐거움을 줄 수 없으며, 일정한 거리와 조건에서 다른 감정이 가능하다고 썼다. 숭고를 논할 때 중요한 것은 자연의 크기만이 아니다. 그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이 어떤 자리에 있는가도 중요하다.
미술관에서 폭풍을 보는 사람과 폭풍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의 자리는 다르다. 화면의 거침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동안에도, 그 안의 몸에는 피할 곳과 버틸 땅이 필요해 보인다. 감상의 감격이 그 필요를 지우지 않도록 그림을 다시 보아야 한다.
이 물음은 터너와 변시지 모두에게 열려 있다. 한쪽은 공포이고 다른 쪽은 평화라고 나누기 어렵다. 변시지의 사람과 말이 함께 있다는 사실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곁에 있음은 위험의 반대가 아니라, 위험한 세계 안에서 맺어진 관계일 수 있다.
흐려지는 배, 남아 있는 윤곽
터너의 배는 주변과 분리된 선명한 물체로만 보이지 않는다. 이를 인간의 패배라고 읽을 수는 있어도, 그림이 배의 결말을 증언하는 것은 아니다. 흔들리는 가시성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부터 묻게 한다.
〈풍랑〉의 검은 윤곽도 바깥을 완전히 막는 벽은 아니다. 사람의 몸과 말의 몸은 가까이 겹치고, 그 둘은 지면 위에 놓여 있다. 선이 형상을 구별하는 한편 접촉도 만들고 있다. 남아 있는 윤곽에서 독립뿐 아니라 의존을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흐림을 소멸로, 선명함을 승리로 번역하지 않는 편이 좋다. 다른 형식이 서로 다른 질문을 오래 붙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흔들리는 중심을, 다른 하나는 불안한 접촉을 보게 한다.
물감이 만드는 날씨
폭풍의 감각은 주제의 이름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선이 어느 방향으로 지나가는지, 밝은 자국이 어두운 형상을 어디에서 끊는지, 화면의 밀도가 어디에서 달라지는지가 중요하다. 물감은 날씨를 설명하기 전에 눈의 움직임을 만든다.
〈풍랑〉의 밝은 사선과 검은 몸 사이를 오가면 공간의 서로 다른 속도가 느껴진다. 주변은 빠르게 흘러가는 듯하고, 두 몸은 그 움직임 속에서 잠시 머무는 듯하다. 이것은 화면에서 느껴지는 속도이지 실제 붓질의 소요 시간을 측정한 결과가 아니다.
복제 이미지가 보여주는 흔적으로 물감의 배합까지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료 검사를 하지 않고도 방향과 밀도의 관계는 읽을 수 있다. 물감이 실제 파도와 같은 물질일 필요는 없다. 다른 물질이 파도를 느끼게 하는 데 회화의 힘이 있다.
작은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터너의 화면을 자연만 남은 그림으로 보면 증기선이 사라진다. 배는 사람이 만든 물건이며, 바다를 건너려는 행위의 흔적이다. 인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인간의 삶이 화면 밖으로 밀려난 것은 아니다.
변시지의 작은 사람도 크기만으로 낮추어 볼 수 없다. 〈풍랑〉에서 눈은 넓은 밝음보다 작은 두 몸으로 돌아온다. 무엇이 크게 그려졌는가와 무엇이 오래 마음에 남는가는 다를 수 있다. 작게 놓는 방식이 오히려 관계를 가깝게 한다.
이때 인간을 돕는 동물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말도 같은 지면을 딛는 몸이다. 어느 쪽이 누구를 지탱하는지 쉽게 끝내지 않을 때, 두 몸 사이에 긴장이 남는다. 그 긴장이 그림을 단순한 위로보다 오래 보게 한다.
런던과 서귀포를 비교하는 법
국제 비교는 익숙한 이름으로 낯선 이름을 인증하는 절차가 아니다. 변시지가 한국의 터너라는 결론을 얻는다면 오히려 차이를 잃는다. 두 작품을 함께 보아야 하는 이유는 서로를 닮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작품만 볼 때 놓치던 형식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터너가 폭풍을 경험하려고 몸을 돛대에 묶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테이트가 제공한 작품 해설도 이를 사실로 확정하지 않는다. 강렬한 그림을 위해 더 강렬한 일화를 보태지 않아도 된다. 변시지의 구술 역시 자신의 경험을 돌아본 기록으로 읽어야 한다.
두 화가의 위치는 작품과 기록을 함께 보며 구체화할 수 있다. 누구의 바다가 더 진실한가보다, 각 그림이 관객을 어디에 세우는가를 묻는다.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움직임과 곁으로 돌아오게 하는 움직임이 그때 서로를 비춘다.
두 그림 사이에 남는 바다
바다는 어느 한 미학의 소유가 아니다. 숭고라는 말로도, 풍토라는 말로도 남김없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 말들이 열어주는 것은 그림을 보는 입구다. 입구를 지나면 다시 색과 선과 작은 형상들을 보아야 한다.
터너의 배를 찾던 시선이 변시지의 사람과 말로 옮겨온다. 회전하는 공간에서 비스듬한 공간으로, 멀리 흔들리는 중심에서 가까이 놓인 몸으로. 관객의 몸은 같은 자리에 있어도 그림 앞에 서는 감각은 달라진다.
말 옆에 사람이 있다. 위쪽 멀리 배가 작다. 눈은 그 사이를 한 번 더 건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