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생애와 장소 · 61 / 100
아틀리에와 세계
밖에서 겪고, 안에서 다시 그리는 일
The Atelier and the World
밖에서 본 것, 안에서 그린 것
폭풍의 그림을 그리는 자리가 반드시 폭풍 속일 필요는 없다. 변시지는 친구의 차를 타고 해변에서 거친 바다를 본 뒤, 집으로 돌아와 그렸다고 회고했다. 눈앞의 파도가 사라진 뒤에도 그림은 시작될 수 있었다. 밖에서 보는 시간과 안에서 그리는 시간 사이에 작업실이 놓인다.
〈폭풍의 바다〉에서는 나무의 가지와 지면의 획이 사람과 말의 몸을 둘러싼다. 화면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바람의 압력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감각은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을 그대로 붙잡은 것이 아니다. 선의 방향과 겹침, 몸이 차지한 작은 자리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작업실은 바깥의 반대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바깥과 같은 곳도 아니다. 보고 돌아온 사람이 기억을 고르고, 놓고, 다시 보는 곳이다. 그 사이의 거리가 경험을 지우는 대신 그림으로 바꾼다.
하나의 방으로 묶을 수 없는 시간
변시지의 작업실을 생각할 때 한 채의 바닷가 집을 평생의 자리로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구술에는 제주시에 살면서 서귀포에도 아파트 화실을 마련하고 두 도시를 오갔다는 기억이 있다. 길에서 본 나뭇가지의 모양도 그 왕래 속에 남았다.
따라서 작업실의 역사는 주소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생활하는 방, 그리는 방, 이동하는 길이 서로 닿는다. 어느 그림이 어느 화실에서 시작되고 끝났는지는 작품별 기록으로 확인해야 한다. 여러 장소를 한 방의 전설로 합치면, 그 사이를 오간 실제 시간이 사라진다.
풍토는 창밖에 고정된 전망만을 뜻하지 않는다. 반복해서 지나간 길과 그 길에서 달라진 시야도 포함한다. 작업실 안의 화가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처럼 보여도, 그의 그림을 이루는 경험까지 한자리에 머문 것은 아니다.
작업실을 그린 그림
베르메르의 〈회화의 기술〉에는 등을 보인 화가와 모델, 벽에 걸린 지도가 있다. 빈 미술사박물관은 모델을 역사의 여신 클리오로, 지도를 네덜란드의 역사와 연결해 설명한다. 방 안에 놓인 것들은 단순한 작업 도구를 넘어 회화가 기억하고 전하는 세계를 가리킨다.
이 그림을 세계를 통제하는 서양의 방이라고만 읽을 필요는 없다. 지도는 벽에 걸려 있지만, 그 지도가 불러오는 역사는 방보다 크다. 커튼과 의자는 보는 사람의 자리도 만든다. 닫힌 실내의 표현 속에서도 바깥과의 관계는 계속된다.
변시지와 비교할 때의 질문도 달라진다. 어느 화가가 더 열려 있었는가가 아니다. 각자의 그림에서 방과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가. 한쪽은 작업의 장면을 그렸고, 다른 쪽의 바다 그림은 작업실 밖의 경험이 안에서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지 묻게 한다.
손과 물감 사이의 기다림
작업실에는 붓을 움직이지 않는 시간도 있다. 변시지는 유화를 칠해 놓고 어느 정도 마른 다음 다시 손댄다고 말했다. 바라보는 동안 생각이 달라지기도 했다. 한 화면에서 잠시 물러났다가 다른 때에 돌아오는 과정이 구술에 남아 있다.
이 기다림을 창조의 공백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붓이 멈춘 동안에도 이미 놓인 색과 다음에 놓일 선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손은 물감의 시간을 마음대로 없앨 수 없다. 작업실의 리듬은 화가의 의지와 재료의 조건이 함께 만든다.
몸과 세계의 관계를 여기서 거창한 합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붓을 쥔 손이 화면에 닿고, 물러나며, 다시 닿는다. 그림을 만드는 일에는 나아가는 동작과 건드리지 않는 판단이 나란히 있다.
문턱이 남기는 거리
작업실의 문은 세계를 들이는 문이면서 잠시 닫아두는 문이다. 비와 먼지가 들어오지 않는 자리도 작업에는 필요하다. 제주의 감각을 품는다는 말이 실제 바닷바람을 계속 들여보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보호받는 실내에서도 바깥의 경험은 그려질 수 있다.
구술에서 비원 그림은 현장 작업의 기억과 연결되고, 제주 폭풍화는 현장을 본 뒤 집에서 그리는 과정과 연결된다. 두 방법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각 대상과 상황에 따라 관찰과 제작의 거리가 달라진다. 실내에서 그렸다는 이유로 경험이 덜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문턱은 단절만을 만들지 않는다. 무엇을 들이고 무엇을 잠시 밖에 둘지 정할 수 있게 한다. 그 작은 구분을 거치며 실제 바다는 화면의 바다가 된다. 창밖과 화폭 사이에 화가의 선택이 남는다.
쌓이는 것은 그림만이 아니다
완성된 작품을 모아놓으면 작업의 시간을 볼 수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작품 수만으로 그 시간을 설명할 수는 없다. 한 화면에 오래 머문 날과 여러 번 다시 시작한 날은 숫자 하나 안에서 구별되지 않는다. 작업실의 역사는 생산량보다 섬세하다.
변시지는 더 좋은 것을 얻으려고 계속 손대다가 이미 좋았던 효과를 잃는 경험도 말했다. 이 말은 적게 그리면 좋다는 법칙이 아니다. 무엇이 생겼는지 알아보는 눈과 언제 멈출지 판단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작업실에 쌓이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다. 다시 보아야 할 문제도 쌓인다. 같은 집을 그려도 이번에는 문이, 다른 날에는 집과 사람 사이가 마음에 걸린다. 반복은 그 문제를 다음 화면으로 옮기는 일이 될 수 있다.
작업실을 보여주는 일
미술관에서 화가의 작업실을 만날 때는 그것이 원래의 방인지, 옮겨 놓은 물건인지, 전시를 위한 재현인지 살펴야 한다. 기당미술관 방문 기록은 변시지의 작업실을 재현한 전시를 소개한다. 재현된 방은 작업을 생각하게 하는 자료이지, 시간이 멈춘 원래의 방과 같지는 않다.
재현의 가치는 무엇을 근거로 놓았는지 알 때 더 커진다. 의자와 이젤이 언제 쓰였는지, 사진이 어느 시기의 모습을 남겼는지 밝혀지면 관객은 실제 생활과 전시의 구성을 함께 볼 수 있다. 빈 곳을 그럴듯한 이야기로 채우는 것보다, 남은 것의 이력을 정확히 알려주는 편이 오래 간다.
작업실에서 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사적인 방을 그대로 확대하는 일이 아니다. 혼자 쓰던 도구가 다른 사람의 질문을 받기 시작하는 일이다. 물건은 자리를 옮기고, 그 앞에 설 사람도 달라진다.
다시 그림 앞에
작업실을 알고 나면 그림이 달리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방의 사정이 그림의 의미를 모두 결정하지는 않는다. 어디에서 그렸는지는 중요한 물음이다. 그곳에서 무엇이 화면으로 옮겨졌는지는 다시 작품 앞에서 물어야 한다.
〈폭풍의 바다〉의 나무와 집, 사람과 말은 작업실의 가구가 아니다. 그들은 화폭 안에서 서로 다른 크기와 방향을 얻었다. 그 배치가 우리를 다시 해변의 경험으로 돌려보낸다. 방 안에서 만든 그림이 방보다 넓어진다.
집 앞에 말과 사람이 있다. 나무의 가지는 한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시선이 가지 끝을 지나 화면 밖으로 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