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생애와 장소 · 60 / 100
서귀포라는 이름
지명과 기억, 그림이 만나는 자리
The Name Seogwipo
세 글자를 천천히 읽기
서귀포(西歸浦)라는 이름의 글자를 풀면 서쪽, 돌아감, 물가가 남는다. 그 세 뜻을 따라 귀환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다만 글자의 뜻을 풀어 읽는 일과 지명이 생겨난 과정을 역사적으로 확인하는 일은 다르다. 이름은 상상을 열지만, 상상만으로 오래된 기록을 대신할 수는 없다.
변시지의 삶을 뒤에서 돌아보면 이 이름과 귀향을 연결하고 싶어진다. 서귀포에서 태어나 오사카와 도쿄, 서울을 거쳐 제주에 다시 작업의 기반을 둔 화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이 그 이동을 예언했다고 말하면, 실제로 고민하고 선택했던 사람이 사라진다. 지명과 생애의 만남은 예정된 노선보다 복잡하다.
이름은 사람을 움직이는 명령이라기보다 여러 경험을 다시 부르는 말이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서귀포는 태어난 집이고, 다른 이에게는 처음 일한 곳이나 잠시 머문 방이다.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기억을 부른다. 한 화가의 서귀포를 읽는 일도 그 여러 기억 가운데 하나의 길을 따라가는 일이다.
전설을 전설로 남겨두기
서복이 불로초를 찾아 제주에 왔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서귀포의 이름과 연결되어 전해진다. 제주관광공사의 서복전시관 안내도 이를 전승으로 소개한다. 이 기록이 보여주는 것은 오늘까지 전해지는 장소의 이야기다. 서복의 실제 행적이나 글자 표기의 변천을 모두 입증하는 자료는 아니다.
역사적 사실과 구별한다고 해서 전설의 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포구를 보며 떠난 이를 생각하고, 멀리 가는 배를 보며 돌아오는 길을 상상해 왔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 상상이 머무는 하나의 그릇으로 읽을 수 있다. 사실의 부족을 메우기보다 사람들이 무엇을 오래 이야기했는지 듣게 한다.
변시지의 그림과 전설을 연결할 때도 같은 거리가 필요하다. 작은 배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서복의 배를 그렸다고 할 수는 없다. 전설과 회화는 떠남과 돌아옴이라는 물음을 나눌 수 있지만, 서로의 정답은 아니다. 이름 곁의 이야기는 작품을 여는 길이지 작품을 가두는 제목이 아니다.
서홍리에서 효돈리까지
변시지의 구술에서 서귀포는 더 작은 이름들로 나뉜다. 집이 있던 서홍리, 외갓집이 있던 효돈리다. 아버지는 동생을 업고 그를 말에 태워 데려갔다고 한다. 그 길 끝에서 외할아버지가 꿀단지를 꺼내 한 숟가락씩 떠 주던 기억이 남아 있다. 큰 지명 안에는 이런 짧은 왕래가 들어 있다.
그 회고에는 달콤한 기억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안장 없이 말을 타고 돌아와 몸이 아팠던 일도 함께 남아 있다. 장소는 아름다운 빛과 냄새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걸었던 길과 탔던 몸, 먹었던 것과 불편했던 감각이 함께 있다. 풍토의 기억은 장식적인 향토색보다 이 가까운 경험들에 닿아 있다.
그러나 이 어린 시절의 말이 모든 조랑말 그림의 단일한 기원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구술은 한 경험을 전하고, 그림은 다른 시기의 선택을 보여준다. 둘을 함께 놓으면 관계를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다. 경험 하나를 화풍 전체의 원인으로 만들지 않을 때 기억의 구체성이 오히려 살아난다.
이타카도 처음에는 낯선 땅이었다
『오디세이아』 제13권에서 오디세우스는 잠든 채 이타카에 도착한다. 깨어난 뒤에도 오랜 부재와 여신이 드리운 안개 때문에 자신의 땅을 곧 알아보지 못한다. 귀향의 고전에서도 도착과 알아봄은 같은 순간이 아니다. 고향은 이미 닿은 뒤에 다시 확인해야 하는 장소로 나타난다.
이 장면은 변시지의 귀향을 더 위대한 신화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삶과 서사가 하나의 질문을 나누게 한다. 돌아왔다는 사실은 무엇을 끝내며, 무엇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가. 변시지의 짧은 제주 강의가 오랜 체류로 바뀐 과정은 이 질문을 신화가 아닌 일상의 시간에서 생각하게 한다.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을 알아듣고 땅을 확인하는 시간이 있었다면, 변시지에게는 그곳에서 더 살아 보며 어떤 그림이 가능한지 살피는 시간이 있었다. 두 이야기는 같지 않다. 다만 귀향을 문 앞에서 끝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만난다. 문을 지난 뒤에도 살아야 할 날이 남아 있다.
지도와 다른 방식으로 놓인 마을
〈해촌〉(2002)의 돌담은 화면 아래에서 굽어 들어간다. 그 사이에 사람이 있고, 왼쪽에는 말, 오른쪽에는 소가 있다. 집들과 나무 너머로 바다가 펼쳐진다. 마을은 건물의 목록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길과 몸, 동물과 담이 서로 자리를 나누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 그림을 실제 어느 길의 정확한 지도라고 확정할 근거는 여기서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귀포를 생각하게 하는 관계는 남아 있다. 바다 가까이의 생활, 담이 나누는 작은 자리, 그 사이로 이어지는 길이다. 장소성은 건물의 좌표를 맞추는 데서만 생기지 않는다.
왼쪽 말은 고개를 낮추고, 오른쪽 소는 머리를 들고 있다. 사람은 둘 가운데 같은 몸짓으로 서 있지 않다. 한 마을이라는 이름 안에서도 생활의 방향은 여럿이다. 이름이 하나라는 이유로 그 안의 생명까지 한 의미로 묶지 않는 것. 이 차이를 남겨두는 구도가 장소를 더 살아 있게 한다.
이름은 남고 풍경은 바뀐다
서귀포라는 이름이 오래 남는다고 해서 그 풍경도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변시지는 길이 넓어지며 나무들이 사라진 일을 회고했다. 또 남아 있는 고목을 보면 예전의 주변 풍경이 연상된다고 이야기했다. 이름 아래에서 변화와 기억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림은 사라진 장소를 완벽하게 되돌릴 수 없다. 대신 무엇이 남았고 무엇이 더는 보이지 않는지 질문하게 할 수 있다. 어느 나무의 모습, 담의 높이, 집과 바다의 거리가 기억을 여는 단서가 된다. 한 화가가 그린 장소는 변화가 없는 낙원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 다시 구성된 장소다.
오래된 풍경을 아끼는 마음과 현재 그곳에서 사는 사람의 필요는 때로 어긋날 수 있다. 그 어긋남을 모두 해결한 듯한 그림 해설은 오히려 장소를 단순하게 만든다. 남겨야 할 것은 한 화가의 기억만이 아니라, 그 기억과 지금의 생활이 만나는 질문이다.
다른 언어에서도 남겨둘 이름
영문에서 서귀포는 Seogwipo로 남기는 편이 좋다. 서쪽으로 돌아가는 포구라는 풀이만으로 바꾸면, 독자가 실제 장소를 찾아갈 이름이 사라진다. 이름을 먼저 남기고 그 옆에 전승과 생활의 맥락을 설명할 수 있다. 번역은 낯섦을 모두 없애는 일이 아니라, 낯선 것을 알아갈 길을 마련하는 일이다.
변시지를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다. 바람과 고독이라는 보편적인 말만 남기면 서귀포에서 실제로 살았던 시간이 옅어진다. 반대로 지명과 연도만 늘어놓으면 그림의 감각이 사라진다. 정확한 이름과 구체적인 작품, 짧은 해설이 서로를 받쳐야 한다.
이 이름이 한 화가를 통해 새로운 예술적 의미를 얻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오기 전에는 의미 없는 장소였다는 뜻은 아니다. 서귀포는 이미 여러 사람의 생활과 말, 떠남과 머묾을 지닌 곳이었다. 변시지의 그림은 그 긴 이야기 가운데 독자적인 한 부분을 더했다.
나가는 문, 돌아오는 문
포구는 떠나는 곳이면서 들어오는 곳이다. 어린 변시지의 구술에는 큰 배에 오르기 위해 작은 배로 건너가던 장면이 있고, 〈선착장〉에는 배와 뭍이 가까이 놓인 장면이 있다. 두 자료 사이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있다. 같은 포구의 실물 기록이 아니어도, 서로 다른 건너감의 모습을 함께 생각하게 한다.
서귀포라는 이름을 읽는 마지막 자리는 운명을 해설하는 문장보다 그림 앞이어야 한다. 사람과 배, 그 사이의 간격을 다시 본다. 이름은 이 장면을 모두 풀어주지 않는다. 다만 그림 앞에 조금 더 머물게 하는 장소 하나를 건넨다.
검은 뭍 아래 배 한 척이 있다. 사람은 조금 떨어져 서 있다. 배와 땅은 아직 한 선으로 붙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