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Ⅴ 생애와 장소

Ⅴ 생애와 장소 · 59 / 100

귀향의 풍경

도착한 뒤에 시작되는 시간

The Landscape of Homecoming

조랑말 / Jeju Ponies · 1975. 바위 해안 가까이에 서로 다른 자세로 선 두 마리의 말. / Two ponies standing in different postures near a rocky shore.
〈조랑말〉 · 1975FŪDO 053
일몰 / Sunset · 1975
〈일몰〉 · 1975FŪDO 071

처음에는 열하루였다

1975년 제주에 온 일을 변시지는 구술에서 뜻밖에도 짧은 방문으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열하루 동안 미학과 예술론을 가르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했다. 내려와 보니 실기 수업까지 더해져 일정이 스물사흘로 늘어 있었다. 오랜 정착의 처음에는 평생의 약속 대신 짧은 강의 일정이 놓여 있었다.

머무는 동안 정이 들었고, 주위에서는 더 있으라고 권했다고 그는 말했다. 한 학기, 일 년이라는 약속이 뒤따랐다. 이런 회고는 귀향을 작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한 번에 다 알 수 없었던 삶이 어떻게 시간을 늘려 갔는지를 보여준다. 오래 머물기로 한 결정도 처음에는 짧은 단위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귀향의 장면을 마침내 자기 운명을 알아본 순간으로만 그리면 이 망설임과 관계가 사라진다. 화가는 이미 완성된 해답을 들고 섬에 온 사람이 아니었다. 가르치고 살아 보며, 조금 더 그려 보고 싶어진 사람이었다. 돌아옴은 그렇게 도착 이후의 시간으로 자랐다.

날짜 사이의 생활

1931년의 일본 이주와 1975년의 제주 정착 사이에는 연도로 계산하면 마흔네 해가 있다. 그 가운데 1957년부터는 서울에서의 생활이 놓인다. 이 기간을 모두 일본 생활이라 부르거나, 귀향까지 서른여덟 해였다고 쓰면 서로 다른 시간이 섞인다. 1975년부터 2013년까지의 서른여덟 해는 제주 시기를 가리키는 다른 시간이다.

그러나 연도의 차이가 방문 한 번 없는 완전한 부재를 저절로 증명하지는 않는다. 생활의 중심을 옮기는 일과 잠시 다녀오는 일은 구별해야 한다. 정착 뒤에도 가족과 일 때문에 다른 곳을 오갈 수 있다. 귀향은 이동이 끝나는 지점이라기보다, 어디에 다시 돌아와 작업할 것인가를 정하는 과정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귀향은 연보의 한 줄보다 넓다. 초청한 사람, 수업을 기다린 학생, 서울에 있는 가족, 새 그림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함께 있다. 장소와 화가만 남겨두지 말고, 그 둘이 만날 수 있게 한 생활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

귀향의 해에 남은 두 가지 색

〈조랑말〉(1975)의 두 마리는 같은 자세가 아니다. 앞쪽 말은 고개를 낮추고, 뒤쪽 말은 목을 세운다. 주변에는 푸른빛과 분홍빛, 밝은 지면과 짙은 풀숲의 색이 어울린다. 제주에 도착한 순간 모든 색이 사라졌다는 설명과는 다른 출발을 이 그림이 보여준다.

같은 해의 〈일몰〉에서는 화면 왼쪽의 해안이 넓은 수면과 만난다. 작은 배들이 멀리 있고, 분홍빛과 푸른빛이 가로로 놓인다. 바다는 검은 선 하나로만 정리되어 있지 않다. 보는 눈은 색의 얇은 차이를 따라 물과 하늘 사이를 오간다.

두 그림은 완성된 후기 양식으로 곧장 가는 문턱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이미 이곳에서 말을 보고 바다를 보는 방식이 성립해 있다. 동시에 새로운 장소에서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도 남는다. 귀향의 해는 하나의 색으로 닫히지 않았다.

해변에서 본 것을 그림으로 시험하기

변시지는 제주에서도 처음에는 비원 방식으로 그렸다고 말했다. 소재는 제주인데 그곳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것과 그림의 방식이 맞지 않는다는 고민이 생겼다. 나무의 모양뿐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과 역사가 그림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풍토의 문제는 배경을 바꾸는 문제보다 깊어졌다.

그때의 색에 관해 구술은 해변의 관찰을 전한다. 강한 햇빛 아래 흰 것이 누렇게 달라 보이는 현상을 보았고, 그 색조로 그려 보려 했다는 설명이다. 보았다는 것과 시도했다는 것이 이어진다. 빛이 저절로 완성된 그림이 된 것이 아니라, 본 것을 어떤 관계로 옮길지 결정해야 했다.

마른 풀잎색은 이 시도를 읽는 비평의 말이다. 햇볕에 바랜 시간과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안료 하나나 한 번의 섬광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는 같은 누런 톤도 그리는 것에 따라 달랐다고 말했다. 귀향이 낳은 색은 한 번 발견하고 보관하는 정답보다, 계속 고쳐 쓰는 언어에 가깝다.

낯선 눈과 익숙한 눈

오래 떠났던 사람에게 익숙한 풍경이 새롭게 보일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익힌 비교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이곳에서 계속 살아온 사람은 보지 못한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오래 머문 눈은 계절과 생활의 작은 차이를 안다. 서로 다른 앎이 만날 수 있다.

변시지 자신도 일반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해도 이런 색을 알게 모르게 느끼며 살았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기 혼자만의 독창성을 주장하는 대신 다른 이들의 감각과 호응을 생각한 대목이다. 화가가 새롭게 그려 보인 것과 주민들이 이미 살아오며 느낀 것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풍토는 화가만 알아보는 비밀이 아니다. 몸과 생활, 관계와 기억을 통해 함께 형성되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이 느껴지지는 않는 조건이다. 화가는 그 안에서 자기 그림을 만든다. 그 그림이 고유해지는 것은 장소를 독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계에 하나의 분명한 응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제주시와 서귀포 사이

제주라는 섬의 이름 안에도 여러 장소가 있다. 변시지는 제주시에서 살면서 서귀포에 별도의 화실을 마련하고 오갔다고 회고한다. 도착 이후의 삶을 한 집 안에 머문 시간으로만 정리할 수 없는 이유다. 가르치는 곳과 그리는 곳, 가족을 만나는 곳은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그 왕래에서 길가의 굽은 나무를 보는 일이 즐거웠다고 그는 말했다. 뒤에 길이 넓어지며 그런 나무들이 사라졌다는 아쉬움도 전한다. 고향은 돌아온 사람을 위해 멈춰 있지 않았다. 다시 본 풍경은 계속 바뀌었고, 기억 속 풍경과 어긋나기도 했다.

이 어긋남은 회화가 할 일을 남긴다. 이미 없는 것을 기억하고, 아직 있는 것을 다시 보는 일이다. 과거를 복원한 사진처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남은 형태가 오래전의 감각을 어떻게 불러오는지 살피는 것. 돌아온 화가는 현재와 기억 사이에서도 계속 이동한다.

한 사람의 귀향에 함께 있는 사람들

구술에서 제주 체류는 가족과의 상의와 왕래 속에서 길어졌다. 서울의 생활이 사라지고 제주의 생활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작업을 더 해 보고 싶은 마음과 가족이 함께 살아야 하는 사정 사이에는 조정이 필요했다. 귀향은 화가 혼자 바람 앞에 서는 장면보다 많은 사람의 시간을 품고 있었다.

그 관계를 화가의 자유를 막는 장애로만 쓰면 다른 사람들의 생활이 지워진다. 가족도 자기 일과 기억, 기다림을 가진 사람들이다. 예술을 선택한 사람의 고독을 읽되, 그 선택을 곁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시간을 함께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볼 때 귀향은 자유와 책임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다음 그림을 위한 시간을 조금 더 얻는 일과, 그 시간을 누구와 어떻게 나눌지 묻는 일이 함께 있다. 삶은 처음의 결심대로만 가지 않는다. 약속을 다시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그림은 만들어진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그림 앞에서

귀향을 완성된 화풍의 출현 순간으로 보면, 그 뒤에 그려야 했던 그림들이 단순한 반복이 된다. 그러나 처음의 체류도 처음의 색도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새로운 장소에서 맞지 않는 것을 느끼고 다시 그리는 시간이 있었다. 돌아왔다는 말은 그 시간을 줄이지 않을 때 더 정확해진다.

〈조랑말〉의 두 몸은 가까이 있지만 같은 쪽으로 몸을 낮추지 않는다. 같은 땅에 서는 일이 같은 자세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초기 그림에서 이미 볼 수 있다. 귀향한 사람과 남아 있던 사람, 가족과 동료도 이렇게 함께 있으면서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질 수 있다.

앞쪽 말의 코는 땅 가까이에 있다. 뒤쪽 말은 목을 세운 채 서 있다. 두 몸 뒤로 푸른빛과 분홍빛이 조금씩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