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아틀라스WORKS · FŪDO · LANGUAGES

연구·비평/바람의 백년/Ⅴ 생애와 장소

Ⅴ 생애와 장소 · 58 / 100

비원파의 서울

정원에 드나들며 만들어 간 생활과 회화

Seoul and the Biwon Painters

지게꾼 / The Porter · 1958
〈지게꾼〉 · 1958 · 작은 복제 · 314 × 380px
가을 애련정 / Aeryeonjeong Pavilion in Autumn · 1965. 가을빛 나무와 정자, 아래로 비치는 연못. / A pavilion among autumn trees above a reflecting pond.
〈가을 애련정〉 · 1965FŪDO 036

돌아왔지만 처음 살아야 하는 도시

1957년 변시지가 돌아온 곳은 한국이었다. 그가 생활을 시작한 서울은 태어난 서귀포도, 성장한 오사카도 아니었다. 구술에서 그는 서울대의 초청을 받고 귀국을 생각했다고 말한다. 돌아갈 나라가 있다는 것과 그 나라에서 살아갈 하루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초청에 대한 기대를 실제 재직의 모든 기간과 곧바로 겹쳐 놓아서는 안 된다. 생활은 가르치는 일과 작업, 여러 만남 속에서 다시 꾸려졌다. 그는 수업 시간을 오전에 모으고 오후에는 그림을 그리러 가던 일을 회고한다. 화가의 하루에는 나라의 이름보다 먼저 시간표가 필요했다.

서울의 시작을 고궁의 아름다움만으로 볼 수도 없다. 〈지게꾼〉(1958)에는 몸보다 크게 쌓인 짐과 그 아래의 인물이 있다. 제공 도판은 작은 인쇄 복제라 세부를 읽는 데 한계가 있지만, 짐과 몸의 크기 차이는 분명하다. 서울은 그에게 정원이면서 사람이 짐을 지는 도시이기도 했다.

같은 정원에 드나든 사람들

비원은 창덕궁 후원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변시지는 구술에서 그곳에 드나들며 함께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자신과 손응성, 천칠봉이 자주 나갔다고 말하고, 장리석의 방문은 그와 구별해 이야기한다. 비원파라는 이름 안에는 똑같은 선언보다 서로 다른 빈도의 만남이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그린다고 해서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정자의 형태를 보고, 누군가는 계절의 빛을 본다. 같은 길을 지나도 이젤을 놓는 자리와 돌아오는 시간은 다를 수 있다. 화파라는 이름을 실감 있게 만드는 것은 이런 구체적인 작업의 왕래다.

이 정원을 당시의 새로운 미술과 대립시키는 요새로만 볼 필요도 없다. 다른 경향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변시지는 이곳에서 자신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 선택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화가들의 실험을 모방으로 낮출 이유는 없다. 차이는 무엇을 그렸는가와 그것을 어떻게 구성했는가에서 찾아야 한다.

〈가을 애련정〉의 위와 아래

〈가을 애련정〉(1965)에서 정자는 화면의 중심을 잡는다. 지붕의 휘어진 가장자리 아래 기둥이 서고, 그 뒤와 위로 가을 나무들이 빽빽하다. 청록의 대기와 노란 잎들이 함께 있다. 서울 시기의 색을 차가운 한 가지 정서로 묶기보다, 이 가까운 색과 먼 색의 관계를 먼저 보게 된다.

아래의 수면은 정자를 한 번 더 보여준다. 그러나 실물과 반영은 똑같은 면적으로 화면을 나누지 않는다. 위쪽 나무들이 차지하는 높이와 아래쪽 반영의 길이가 다르다. 반복되는 건물의 형태는 물속에서 어둠과 색을 달리하며, 단단한 구조와 흔들릴 수 있는 모습을 한 화면에 놓는다.

그 반영을 화가의 분열된 정체성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먼저 나무와 지붕, 물이 만들어내는 시선의 왕복이 있다. 눈은 위의 건물을 확인한 뒤 아래에서 다시 보고, 다시 위로 올라온다. 그림의 정적은 움직임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왕복이 서두르지 않는 데서 생긴다.

정밀하게 보는 일도 관계다

변시지는 비원에서 처음에는 기와와 난간을 하나하나 살피며 그렸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익힌 것이 나중에는 보지 않고도 떠올릴 만큼 남았다고 말했다. 이 정밀함은 대상을 멀리 밀어내는 차가움만이 아니다. 오래 보고 다시 확인한 시간이 몸에 익는 과정이기도 하다.

묘사가 세밀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 속하지 못했다고 말하면, 관심을 기울이는 여러 방식을 놓친다. 누군가는 적은 선으로 친밀함을 만들고, 누군가는 오래 들여다본 작은 차이로 친밀함을 만든다. 친밀함은 붓의 굵기로 재는 것이 아니다. 지붕 아래의 어둠을 얼마나 오래 보았는지도 관계의 일부다.

후기의 제주화를 알더라도 〈가을 애련정〉을 아직 자기 언어가 없는 그림으로 돌려놓아서는 안 된다. 정자의 크기, 나무의 높이, 반영의 길이를 정한 것은 이 그림의 화가다. 이 선택들이 이루는 공간은 지금 이 작품 안에서 읽힐 가치가 있다. 훗날의 변화가 그 가치를 지우지는 않는다.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오후

구술에서 변시지는 비원에 매일 나가 그림을 그리던 일을 좋았다고 기억한다. 오전의 수업을 마치고 정원으로 가는 생활이었다. 동료가 있었고 그림을 본 학생들도 있었다. 서울 시절을 고립과 공허로만 설명하면, 그가 직접 기억한 이 기쁨과 함께한 사람들이 사라진다.

작품을 사고파는 관계도 그 생활의 일부였다. 그는 일본 화랑과의 계약, 서울에서 작품을 내놓던 일, 구매자의 연락처를 기록해 안내장을 보내도록 조언한 일을 이야기했다. 거래는 그림 바깥의 속된 사건으로만 밀어낼 수 없다. 다음 작업을 이어갈 시간과 재료에도 연결되는 일이었다.

상업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만족이 모두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팔린 그림이 곧 공허한 그림이라는 뜻도 아니다. 이후의 변화는 이미 성립한 작업을 다른 장소에서 다시 묻는 일이 될 수 있다. 비원의 오후는 제주를 기다리며 낭비된 시간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살아낸 시간이었다.

다른 곳에서 다시 보이는 것

변시지는 서울에서도 추사의 글씨를 알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제주에서 옛 글씨와 그림을 보고, 굽은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그 조형미를 다르게 느꼈다고 말했다. 같은 이름을 안다는 것과 같은 형태가 새롭게 다가온다는 것은 다르다. 장소의 변화는 이전의 배움을 다시 읽게 할 수 있다.

이 회고를 비원의 실패에 대한 판결로 쓸 필요는 없다. 서울의 정원과 제주의 나무는 그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다. 어느 곳의 경험이 더 참된 것인지를 고르기보다, 무엇이 달라졌기에 다른 형식이 필요했는지 묻게 된다. 풍토를 읽는 일은 한 장소의 승리를 선언하는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집과 나무가 〈세한도〉의 집과 나무와 다르다는 점도 짚었다. 비슷한 느낌이 있다고 해도 형상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구별은 비교의 좋은 출발이다. 공통된 감각을 찾아가되, 눈앞의 서로 다른 지붕과 가지를 놓치지 않는 것. 다른 그림을 통해 자기 그림을 더 자세히 보는 일이다.

이어진 손, 달라진 화면

제주로 옮긴 뒤에도 처음에는 비원에서 익힌 방식으로 그렸다고 변시지는 말했다. 소재를 바꿨다고 그림이 곧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곳의 생활과 역사, 사람이 어려움을 견디는 방식까지 들어와야 한다고 느끼면서 색과 형식을 다시 생각했다. 변화에는 이미 아는 것과 아직 맞지 않는 것이 함께 있었다.

세필에서 거친 선으로 옮겨 갔다는 설명도 이 선택의 과정 안에서 읽어야 한다. 가는 선이 감정 없는 기록이고 거친 선만 살아 있는 표현인 것은 아니다. 선의 폭과 끊김은 주변의 색과 간격을 만나 기능이 달라진다. 변화의 핵심은 기교를 버렸다는 구호보다, 그 기교가 맡는 일이 달라졌다는 데 있다.

비원에서 익힌 관찰은 제주에서 기억과 결합해 다른 그림을 만들 수 있었다. 연못을 보는 눈과 파도를 보는 눈은 완전히 별개의 눈이 아니다. 손은 이전에 본 것을 가지고 새로운 곳으로 간다. 다만 새 장소에서 무엇을 남길지는 다시 결정해야 한다.

정자는 아직 연못 곁에 있다

비원파의 서울을 제주 이전이라는 말로만 정리하면 너무 많은 것이 빠진다. 노동하는 몸을 본 도시, 동료와 만난 정원, 수업과 작업을 나누던 시간, 작품을 건네던 관계가 있었다. 이 삶을 남겨두어야 귀향도 한 번의 계시가 아니라 실제 사람이 선택한 변화로 읽힌다.

조국은 어느 소재 하나에 모두 담기지 않는다. 고궁도, 길에서 짐을 진 사람도, 바다 곁의 낮은 집도 그 일부일 수 있다. 한 화가가 그 사이를 움직이며 그림의 말을 고쳤다. 나중의 말이 생겼다고 해서 먼저 했던 말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을 애련정〉의 기둥은 물가에 서 있다. 그 아래 기둥 하나가 거꾸로 내려간다. 잎들의 색이 물속에서도 조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