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생애와 장소 · 57 / 100
동경의 빛과 그림자
인정받는 일과 자기 그림을 만드는 일
Light and Shadow in Tokyo
전후 도쿄에 도착한 화가
변시지는 전쟁이 끝난 뒤 도쿄로 옮겨 갔다. 구술에서는 1945년 말 무렵의 이동을 이야기하지만 달은 또렷이 확정하지 않는다. 데라우치 만지로와의 만남은 그다음 해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이 약간의 흐림을 억지로 메우기보다, 전후의 도시에서 배움과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본다.
그가 회고한 첫 접근은 거대한 의식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알아본 화가에게 찾아가도 되는지 물었고, 뒤에 작품을 들고 찾아갔다. 배움은 이미 그린 것을 누군가 앞에 내놓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림을 보일 때에는 익힌 기법뿐 아니라 아직 정리되지 않은 판단도 함께 드러난다.
도쿄는 그에게 단순히 따라야 할 양식의 이름이 아니었다. 화가들이 만나고 작품을 비교하며 전시를 여는 생활의 장소였다. 화단을 하나의 정상과 그 아래로 나누면, 그런 왕래가 사라진다. 젊은 변시지에게 필요했던 것은 꼭대기의 자리만이 아니라, 다음 그림을 시험할 수 있는 자리였다.
수상 기록에 남은 이름
광풍회의 공식 수상자 목록에는 1948년 제34회전의 광풍상 수상자로 ‘宇城時志’가 기록되어 있다. 변시지는 구술에서 일본에서 우성(宇城)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설명했다. 서로 다른 언어와 이름으로 남은 기록을 대조하면, 한 사람의 경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어 볼 수 있다.
이 수상은 그의 작업이 일찍부터 공개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중요한 표지다. 그러나 한 단체의 수상 이력이 일본 미술 전체를 정복했다는 뜻은 아니다. 인정의 구체적인 자리와 범위를 남겨두는 편이 성취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찬사가 커질수록 기록도 더 정확해야 한다.
같은 시기의 작품도 상의 설명으로만 보아서는 부족하다. 〈네모의 상〉(1951)과 〈남자〉(1950)를 나란히 놓으면 같은 인물화 안에서도 서로 다른 자리가 열린다. 하나는 의자와 포갠 손을 중심에 두고, 다른 하나는 몸과 책장이 이루는 공간을 함께 보여준다. 수상 이후에도 그림의 물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배운 것과 다르게 그린 것
변시지는 일본 시절부터 두 방향의 작업을 했다고 회고했다. 데라우치의 영향을 받은 그림과 자신의 주관에 따라 그린 그림이다. 개인전에는 단순한 정물과 풍경도 내놓았다고 말했다. 자기 언어를 찾는 일은 제주에 와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배움의 내부에서도 다른 선택이 자라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 시기의 그림을 완벽한 모방이라고만 부르기는 어렵다. 배운 기법을 사용한다는 것과 자기 판단이 없다는 것은 같지 않다. 눈앞의 인물을 얼마나 크게 놓을지, 배경을 어디에서 멈출지, 어떤 색을 어둠에 남길지에 이미 화가의 선택이 들어간다. 독자성은 전통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때의 변화는 스승과 제자의 승패로 재단할 필요도 없다. 새로 배운 것이 오히려 다른 길을 알아보게 할 수 있다. 데라우치에게서 배운 회화와 변시지의 주관적 작업은 한 사람 안에서 서로 밀고 당겼다. 그 긴장을 남겨두면, 훗날 제주로 이어지는 길도 단절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스승 앞에 놓인 그림
구술에는 데라우치가 다른 이들의 평가 앞에서 제자의 그림을 지켜 주었다는 기억이 있다. 변시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사이토 요리의 강한 찬사도 전한다. 이 대목은 처음 닛텐에 입선했을 때의 일화로 서술된다. 이를 이듬해 광풍회 수상 심사 장면으로 옮기면 서로 다른 사건이 하나로 합쳐진다.
이 회고가 들려주는 것은 유명한 칭찬의 크기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그림을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곧장 고치려 하지 않는 태도다. 배움은 다른 사람을 닮게 하는 과정이면서, 다름을 지켜볼 자리를 마련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스승의 역할을 읽을 때 이 두 가지를 함께 보게 된다.
귀국을 둘러싼 스승의 편지는 별도의 원문과 맥락을 통해 살필 자료다. 확인하지 않은 문장을 작별의 대사로 만들지 않아도 사제 관계는 충분히 드러난다. 작품을 가지고 찾아갔던 일, 다른 경향의 그림도 그렸다는 일, 그 차이를 스승이 받아들였다는 기억이 이미 구체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같은 흰옷, 다른 공간
〈네모의 상〉의 밝은 블라우스 아래에는 짙은 치마가 있다. 두 손이 무릎 위에서 포개지고, 의자의 둥근 등받이가 머리와 어깨를 감싼다. 시선은 비껴 내려간다. 이름의 라틴어 뜻을 먼저 붙이지 않아도, 몸이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방식에서 충분한 긴장이 생긴다.
〈남자〉에서는 흰 셔츠의 면이 몸을 크게 드러낸다. 얼굴은 한쪽으로 돌아가 있고, 뒤에는 책들이 놓인 선반이 보인다. 밝은 옷과 붉은 갈색, 녹색 계열의 주변이 서로를 바꾸어 보이게 한다. 일본 시기의 모든 그림을 차가운 청색의 우수로 요약하기에는 이 화면의 색 관계가 복잡하다.
두 인물의 시선이 관객과 곧장 만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까지 닫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옷과 손, 의자와 배경을 함께 보면 화면의 관계가 먼저 보인다. 감정은 그 관계를 지나 읽힌다. 어느 색이든 한 사람의 내면을 대신 진술하는 완성된 문장은 아니다.
전후라는 시간과 한 사람의 얼굴
전후에 그렸다는 제작 시기는 중요한 맥락이다. 다만 모든 인물의 옷과 표정을 전쟁의 상흔으로 해독하면 서로 다른 얼굴이 하나의 시대 표정으로 줄어든다. 〈남자〉의 책장과 〈네모의 상〉의 의자는 구체적인 실내를 만든다. 역사는 이 사물들 곁에 놓되, 사물의 의미를 전부 선점하지 않아야 한다.
화가의 활동도 하나의 화단으로만 묶이지 않았다. 그는 여러 경향의 동료와 미술에 관해 이야기하던 일을 회고했다. 새로운 경향을 접하는 일과 그것을 그대로 따르는 일 사이에는 판단이 있다. 구상을 계속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전위를 거부한 화가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도 성공과 불행을 일대일로 나누는 표가 아니다. 인정과 배움, 관계와 망설임은 같은 날에도 함께 있을 수 있다. 도쿄의 시간을 통째로 공허라고 부르는 대신, 그 안에서 어떤 그림이 실제로 나왔는지를 보아야 한다. 두 인물은 여전히 서로 다른 자세로 앉아 있다.
떠나기로 한 날에도 여러 길이 있었다
귀국을 앞둔 변시지는 한국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개성과 특징을 더 알아갈 가능성을 생각했다. 구술에는 한국의 생활과 풍토, 역사를 더 깊이 알고 싶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혈통만으로 자기 그림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설명과 다르다. 살아 보며 알아가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다.
그에게는 프랑스로 가려는 생각도 있었고, 한국에서의 일자리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가족은 전후의 어려운 생활을 걱정했다. 이런 현실을 남겨두면 귀국은 덜 영웅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생활을 찾는 결정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절실해진다.
떠남이 이전의 성취를 무효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는 훗날 제주화의 양식이 광풍회의 분위기와 달라졌다고 느끼면서도 계속 출품한 일을 이야기한다. 한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과 그 관계를 모두 끊는 것은 다르다. 그의 경로에는 단절뿐 아니라 오래 이어진 연결도 있었다.
도쿄를 지난 눈
도쿄가 남긴 것을 데생의 기초만으로 줄일 수는 없다. 그것은 그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다른 그림과 비교하고, 배운 것과 자기 판단 사이를 오가던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은 제주에서 다른 색과 선을 선택할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장소를 바꾼 손은 이전의 손과 단절된 새 손이 아니다.
후기의 작업을 알고 초기 인물화를 다시 보면 이어지는 점이 보인다. 그러나 그 연결만 찾으면 초기 그림의 낯선 부분을 놓친다. 우리는 제주로 향하는 선과, 그곳으로 곧장 이어지지 않는 선을 함께 보아야 한다. 화가의 삶은 한 줄로 정리되지 않을 때 더 넓어진다.
〈네모의 상〉의 두 손은 아직 무릎 위에 포개져 있다. 의자의 둥근 선이 어깨 뒤를 지난다. 밝은 옷 아래로 짙은 치마가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