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시간과 기억 · 71 / 100
20대의 그림, 80대의 그림
달라지는 화면, 이어지는 물음
Paintings in His Twenties, Paintings in His Eighties
두 그림을 나란히 놓다
〈네모의 상〉의 여인은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고 있다. 흰 블라우스가 빛을 받고, 나무 의자의 등받이가 어깨 뒤로 둥글게 올라간다. 1951년의 그림이다. 2007년의 〈정오〉에서는 사람이 나무 아래쪽에 작게 놓여 있다. 같은 화가가 그린 두 몸인데, 눈이 그 몸에 이르는 길부터 다르다.
이 두 제작연도 사이에는 56년이 있다. 이것을 화가의 전체 화업과 같은 기간으로 셀 수는 없다. 여기서는 두 점을 삶의 시작과 끝으로 정하지 않는다. 스무 살 무렵과 여든 살 무렵의 그림이, 서로를 지우지 않으면서 어떤 물음을 주고받는지 보려 한다.
먼저 보이는 차이는 크기다. 한 화면에서는 사람이 보는 자를 가까이 붙잡는다. 다른 화면에서는 사람을 찾으려는 눈이 집과 나무, 수평선과 짧은 획들을 먼저 지난다. 얼굴이 작아진 만큼 인간의 의미가 작아진 것일까. 그 물음을 잠시 두 그림 사이에 놓아둔다.
젊은 그림의 손과 의자
〈네모의 상〉의 손은 인체 묘사의 솜씨를 확인하는 부분만이 아니다. 손이 포개지는 높이와 팔꿈치가 벌어지는 너비가 앉은 몸의 자세를 만든다. 의자도 장식으로 덧붙인 물건에 그치지 않는다. 몸을 받치는 물건과 그 위에 머무는 사람이 함께 하나의 자리를 이룬다.
옷의 주름에는 몸이 있으나 몸 전체가 설명되어 있지는 않다. 시선은 화면 오른쪽으로 비켜 있고, 입은 다물려 있다. 그 여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정밀하게 그린 얼굴에도 말하지 않은 것이 남는다. 여백은 이미 그 얼굴과 관객 사이에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을 훗날 버려야 할 기술의 표본으로 놓을 이유는 없다. 가까이 있는 한 사람을 함부로 설명하지 않는 일도 회화의 중요한 성취다. 후기의 풍경을 알고 돌아와 보더라도, 젊은 날의 여인은 자기 자리에서 기다린다. 뒤에 올 노인을 대신하기 위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작아진 사람, 넓어진 관계
〈정오〉에서는 어두운 나무가 먼저 시선을 붙든다. 그 아래쪽으로 몸을 굽힌 사람이 보이고, 반대편에는 낮은 집이 있다. 위쪽에는 작은 배와 둥근 해가 놓여 있다. 인물은 혼자 떼어내기보다 이 여러 크기의 형상 사이에서 읽힐 때 더 분명해진다.
얼굴의 표정이 맡았던 일을 이제 주변의 간격이 함께 맡는다. 사람과 집 사이, 사람과 나무 사이의 거리가 몸의 처지를 바꾼다. 그것을 단순히 내면으로의 침잠이라 부르기 어렵다. 오히려 사람을 이해하려면 사람 바깥도 보아야 하는 화면이다.
초기의 의자가 몸을 받쳤다면 후기의 풍경에서는 땅과 지팡이, 주변의 자리들이 몸을 둘러싼다. 그렇다고 의자가 자연으로 진화한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장면이 사람을 놓는 서로 다른 방법을 보여준다. 연속성은 같은 모양의 반복보다, 몸이 어디에 기대어 있는지를 묻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색보다 먼저 관계를 보다
〈네모의 상〉에는 흰 옷과 따뜻한 살빛, 갈색 의자와 어두운 치마가 함께 있다. 이 한 점만 보아도 초기 그림을 모두 차가운 청색으로 묶기는 어렵다. 색의 변화를 이야기하려면 우선 각각의 화면 안에서 어떤 색이 무엇과 이웃하는지 보아야 한다.
〈정오〉의 마른 풀잎색에는 짙고 옅은 자국이 수없이 스친다. 색채의 범위가 좁아 보이지만 표면의 움직임까지 줄어든 것은 아니다. 넓게 비운 후기작만 골라보면 이런 밀도가 사라진다. 늙어갈수록 언제나 더 적게 그렸다는 말은 이 그림 앞에서 멈추어야 한다.
변시지는 구술에서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 누런 톤도 달라진다고 말한다. 한 색을 찾은 뒤 평생 같은 값을 되풀이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색의 통일은 차이의 소멸이 아니라, 가까운 차이를 알아보게 하는 조건일 수 있다. 그림마다 다시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래 이어진 보는 일
그림이 크게 달라졌다고 해서 눈으로 익히는 일까지 버려진 것은 아니다. 변시지는 비원에서 기와와 난간을 자세히 보았던 경험을 말하고, 제주에서도 폭풍을 본 뒤 집에서 그렸다고 설명한다. 현장에서의 관찰과 나중의 구성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그는 본 것을 옮기더라도 현장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타일로 옮긴다고 말한다. 여기서 기억은 세부를 모두 저장하는 창고만은 아니다. 본 것들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만드는 힘이다. 화면이 달라지는 동안에도 보는 훈련과 고르는 판단은 함께 남는다.
불변을 찾는다고 해서 화가에게 단 하나의 질문만 있었다고 정할 필요는 없다. 이어지는 것은 완성된 답보다 다시 살펴보는 습관일 수 있다. 어제의 그림이 오늘의 눈을 모두 대신해주지 못한다. 익숙한 형상 앞에서도 손을 새로 멈추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년을 한 가지 표정으로 만들지 않다
노년의 작품에서 평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평온을 작가의 내면 상태와 곧바로 같게 놓을 수는 없다. 성긴 화면에도 불안한 간격이 있고, 빽빽한 화면에도 쉬는 자리가 있다. 작품의 제작연도는 중요한 조건이지만, 그림의 감정을 미리 결정하는 표정은 아니다.
구술에서 변시지는 집중이 되는 날을 기다리고, 밑바탕을 칠해둔 그림을 다시 보면서 구도를 바꾸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는 그 기다림에 신중함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노년의 시간은 단순히 욕심을 비우는 시간이 아니라, 가능한 작업의 리듬을 다시 찾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리듬을 성공담이나 쇠락의 기록 중 하나로만 고르면 그림의 실제 시간이 사라진다. 멈춤도 있고 다시 손대는 날도 있다. 충분하다고 여기는 순간과 아직 아니라고 여기는 순간이 같은 작업에 머문다. 오래 그린다는 것은 그 판단을 끝내 면제받지 못한다는 뜻일 수 있다.
모네와 나란히, 원인을 줄이지 않고
모네의 말년 수련을 떠올릴 때에도 같은 주의가 필요하다. 미국 국립미술관의 설명은 그가 가꾼 정원과 연못, 수면과 반영을 다룬 회화적 선택을 함께 살핀다. 질병 하나로 후기 양식을 설명하면 오랫동안 장소를 만들고 바라본 일이 뒤로 밀려난다.
모네의 수면과 변시지의 땅은 같은 화면이 아니다. 다만 두 화가를 나란히 놓으면 오래 본 것이 다시 낯설어질 수 있다는 질문이 생긴다. 수면의 반영을 어디까지 남길 것인가. 나무 아래의 사람을 얼마나 작게 둘 것인가. 반복은 이 구체적인 결정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비교는 누가 더 깊이 보았는지 순위를 매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 화가를 설명하는 말이 다른 화가 앞에서도 견디는지 시험하는 일이다. 모네를 단순한 눈으로, 변시지를 순수한 정신으로 만들지 않을 때, 두 사람의 물감과 장소가 더 구체적으로 보인다.
다시 젊은 그림 앞으로
시간을 건너 본 뒤에는 처음의 그림도 달라진다. 〈정오〉를 본 눈으로 〈네모의 상〉을 다시 보면 포갠 손과 의자 사이의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거꾸로 여인의 얼굴을 오래 본 뒤에는 작은 인물에게도 쉽게 마음의 이름을 붙이지 않게 된다. 두 그림은 한 방향으로만 서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화가의 생애를 하나의 길로 엮는 일은 유용하다. 그러나 그 길 바깥에 남는 그림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젊은 그림은 이미 조용하고, 어떤 늦은 그림은 여전히 촘촘하다. 연대기는 작품을 만나는 순서를 도와줄 뿐, 각 작품이 말할 수 있는 범위를 닫지는 않는다.
여인은 두 손을 포개고 있다. 먼 훗날의 그림에서는 사람이 나무 아래에 있다. 잠시 두 화면을 번갈아 본다. 어느 쪽에서도 사람이 놓인 자리를 서둘러 지나치지 않는다.
